상식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예를들면 정차시 기어를 중립에 두면 연비가 높아진다거나 뒷목이 뻐근하면 고혈압을 의심하라는 등의 상식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비슷한 기본 교육을 받은 비슷한 사회에 속한 사람들을 설득하기 알맞은 이야기들은 쉽게 상식이 된다.
상식에는 사상이 없다.
흑인은 게으르다던가 여자는 겁이 많다는 이야기를 상식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통용되는 상식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는 개념이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 상식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어르신들을 만나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북파 공작원이라는 괴소문을 상식이라고 치고 대화를 시작한다. 젊은 남자들은 한국여자들이 샤넬백을 가장 좋아한다고 굳게 믿는다. 알고리듬의 지배에 갇혀 하나의 메아리에 쇠뇌되어 버린 우리 각자는 자신의 신념을 상식이라고 믿게 되었다. 한 번 들어 알게된 사실을 다시 듣는 순간 사람은 어리석게도 확실성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인간은 확실하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 더이상 탐구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비상식적인 상식의 여러 비상식적인 변종이 생겨났다. 내 지인 중 한 명은 대선결과 발표를 끝까지 지켜보고 아침이 되도록 울었다고 했다. 글쎄..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산다. 내 생각에는 지금은 서로 대립하고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 우리의 상식이 민주적으로 펼쳐지는 상식적인 나라가 되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자기 몫을 해야할 때이다.
사석에는 상석이 없다.
이놈에 세상에는 언제나 선과 악, 강자와 약자, 갑과 을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약자이거나 을의 삶을 산다. 선과 악은 그렇다 치더라도 강자의 수는 언제나 드라마틱하게 적기 때문에 절대다수는 약자에 속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삶의 공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삶의 사적인 부분에서는 대체로 관계의 상하구분이 유연하다. 물론 선후배 사이가 있고 부모와 자식이 있어도 공석에서 이해관계를 두고 격식을 차리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공사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거래처 고객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동료가 고객이 되기도 한다. 십년이 넘게 하루에도 몇번씩 통화하고 부모님보다 자주 만나니 친분이 쌓여 호형호제하는 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관계를 순수한 사적 친분으로 천진하게 믿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목적이 있는 관계는 절대 그 목적없이 유지될 수 없다. 동지들, 절대 잊지 말자. 비즈니스가 끝나지 않는 이상 안타깝게도 사석에도 상석은 있다.
주먹쥐고 일어서
얼마전 직원들과 컨셉회의를 하다가 ‘늑대와 함께 춤을’ 이라는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 시절 인디언 이름이 한창 유행했는데 젊은 직원들에게 ‘인디언 이름’의 개념을 설명하느라 노래를 설명하고 끝에는 가수 임창정까지 설명해야했다. 늙어간다는 것은 이런 것인지 농담조차 서글프다. 여튼 ‘그 시절’ 우리가 상식이라고 부르던 우리들의 공통이해 범주에서 친구라는 관계는 인디언 어로 ‘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로 풀이되었다. 그리고 그 해석에 모두가 공감하고 한편으로는 반성했다. 나는 내 친구의 슬픔을 등에지고 공감하는가. 하지만 지금은 세대를 막론하고 ‘친구’의 개념을 그때와 똑같이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문득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관계들을 떠올리다가 내 상식에 대한 유연성을 다시 고민해야했다. 결국 결론은 그렇다. 상식이란 사실과 대등한 가치가 있다. 최소한 일정 그룹이 동의하는 합의점에 있다는 동질적 공통점이 있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갈릴레오 시대 사람들처럼 현재 우리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것들이 조만간 거짓으로 밝혀질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현재 밝혀진 사실에 기초해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을 상식이라고 정의한다면 나는 최소한 내 시대의 사람들이 인정한 친구의 개념을 그대로 지키고 싶다. 사석에서 상석을 찾지 않고 상식에 사상을 섞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들만 내 포켓에 남기기로 했다.
마흔이 넘으면 인간관계를 정리해야한다고들 말한다. 저급한 인맥관리 스킬따위로는 내 슬픔의 반려자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도 나는 그 인디언 이름이 좋았다. ‘주먹쥐고 일어서’ 누가 뭐래도 나는 내가 믿는대로 할 수밖에 없고 앉아있기 보다는 일어서는 사람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