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R300

48_니체는 늘 니체한다

by Orbita
노부부가 창가에 앉아 이야기한다
- 세상 많이 변했다.
- 그래봤자 이승이지.
-ㅎㅎ 당신도 많이 변했네.


사람은 안 변한다지만 세월에 장사없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불꽃같은 청춘은 시들고 때로는 살자고 세상에 굴복하고 때로는 승리를 위한 비굴함을 배우게 되는 게 삶이다. 그래야 살아지기도 하고.


나는 대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내 돈을 주고 밥을 사 먹은 일이 거의 없다. 지방에 본가를 두고 기숙사생활을 하는 후배에게 학교 식당 식권 한장 사줄 선배는 늘 있었고 생각날만 하면 고기 사주는 친구도 여럿 있었다. 꼭 형편이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타지에서 혼자 떨어져 있는 스무살 새내기가 안타까웠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시절에는 이런 주변의 친절을 의심하지도 불편해 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스스로 좋은 친구가 많은 복받은 사람이라 여겼다.


어느날 친구 한 명이 좋은 아르바이트를 소개해주겠다고 불러냈다. 친구를 따라 강남역 뒷골목 어느 단독주택 마당에 들어서자 젊은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안채로 소개되어 실장이라는 사람에게 아르바이트 내용을 설명받았는데 문과생인 나로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복리개념을 설명하며 아주 큰 돈을 버는 획기적인 아르바이트라고 소개했다. 나는 조목조목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을 짚어댔고 곧 그 실장도 나도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여럿이 테이블을 애워싸고 열성적으로 실장이라는 사람 편을 드는 통에 조금 시끄러워졌기 때문이 더 이상의 논쟁대신 마당에 모여있는 젊은이 무리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세상 매력쟁이는 그 마당에 다 모인듯 다들 젊고 빛이 났던 것이 기억난다.


그 경험을 과선배에게 소상히 이야기한 후에 선배가 친구를 호되게 나무랐고 나는 그 마당을 그냥 나온 몇 안되는 젊은이였음을 알게되었다. 나중에 그 실장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할 말을 생각해냈지만 다시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기회를 갖지는 못 했다. 당연히 그 경험은 내게 잊지 못할 교훈을 남기며 핵심기억 중 하나가 되었다.


사람은 변한다.

십대의 나를 돌이켜보면 순종적이고 얌전하기 그지 없는 순둥이였다. 그러다 갑자기 고등학생이 되면서 세기말 반항아 놀이를 시작 했고 스무살이 넘어서 점점 고집을 겉으로 드러내는 X세대가 되었다. 겸손과 겸양은 저세상 개념이고 지구의 중심은 내가 정하던 시절이 나의 20대이다. 서른넘어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이 적어도 몇명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 거의 모든 일에서 그 단독주택에서 복리이자의 예외상황들을 따지던 자세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생살이는 만만하지는 않았고, 남보다 조금 잘났다 믿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 것 같다. 특히나 결혼을 하고 아기를 키우면서 현실적인 문제들에 매일 무너지고 구부러져 스무살의 패기는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사람이 변했다."라는 말이 좋게도, 나쁘게도 해석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양방향 어느쪽으로든 움직일 수있는 자유의지가 있기때문에 가끔은 잘못된 선택으로 마이너스 방향으로 폭주한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주변에서 하는 말은 들리지 않고 자의식에 함몰되어 어떤 장애물을 만나 상황을 직시하기 전까지는 자각하지 못 하고 달릴 가능성이 크다. 올해 조직관리를 공부하면서 여러가지 실험과 연구를 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기성 회사의 기성 경영자의 관습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스스로 스타트업이라 칭하며 자유롭고 신선한 기업문화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지난 세월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정들이 이어졌다. 사람에 실망하고, 반복적 실패에 지쳐가면서 '안전한' 길을 택하고 있었다. 최선의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들이 많이 하는, 이미 도래할 결과를 알고 있는 (그 결과가 좋지않더라도), 결정들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어느날 누군가 말했다. '너 많이 변했다.'


니체는 늘 니체한다.

나는 많은 철학가 중 니체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의 일관되게 잘난체 하는 성향 때문이다. 그는 변변한 학위도 없이 순수하게 본인의 문학적 재능으로 20대초반에 대학강단에 섰고 역사에 남을 글들을 썼다. 그리고 자신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일컬어 니체가 인류에 남기는 선물이라고 스스로 말했으며 죽음이 임박하도록 기존의 기독교적 관념을 무너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르는 말에는 그가 명상과 사색을 통해 세상 모든 관념은 이내 사라지고 결국 남는 것은 허무주의 뿐일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후대를 위해 기성관념을 부수고 새 것을 세우고자 힘썼다고 한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그리고 동시에 분명히 니체답고, 분명히 탁월하다. 니체는 초년에도 병약했고 반평생을 정신질환과 알수없는 마비증에 시달렸지만 신은 죽었고 본인이 새로운 구세주가 될것이라 말하며 사는 동안 주변 환경이나 조건을 들어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은 체 니체답게 마지막 삶을 살았다.


관계를 통한 변화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저서를 통해 분명히 한다. 상대방을 같은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그것'으로 간주할 때 홀로남게 된다. 관계는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므로. 사람들은 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점점 '나'와 '그것'의 관계를 넓혀간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고 상대방에 관한 보편화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어떤 존재도 보편화해서 무리지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은 개개인이 모두 '너'로서 인정받아야 옳고, 자연은 더더욱 시시각각 '너'로 존중받아야 옳다. 어느 순간 많은 관계들을 '그것'과의 관계로 치부하면서 수많은 다른 '너'를 향한 입장을 미리 결정해버리는 우리를 본다. 이는 우리가 지금은 예상할 수없는 오류들을 낳을 것이고 결국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버가 '나와 너'라는 책을 쓰기 전의 일이다.

그는 순도 깊은 아침 명상을 즐겼는데 어느 날 아침 명상 직후 낯선 젊은이가 찾아와 조언을 구했다. 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젊은이와의 대화를 마쳤다. 그러나 얼마 후 그 젊은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후회하며 그 이후로는 아침명상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고귀한 만남을 무성의하게 대한 스스로를 후회했고, 젊은이와의 관계를 '그것'과의 관계로 치부해버린 결과는 참담했다.


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니체와 신을 존경하는 부버가 삶을 대하는 자세는 분명히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는 공통적인 메시지는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이 나를 바꾸도록 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현실에 타협하거나 스스로의 코어를 무너뜨려서도 안 되며, 타인을 보편화하고 얼기설기 쌓은 데이터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어서도 안된다.


니체는 늘 니체할 때 니체같은 결정들을 내릴 수 있다. 나중에 (서른여섯살의 부버가 그랬듯이) 이리저리 굴러먹은 데이터를 들먹이며, 이런 이들에게 실망했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현실과 타협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스무살의 패기를 조금 되살리기로 했다.

시련이 계속된다고 해서 중심을 버리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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