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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Dec 20. 2020

공간값 대신 손편지 받는 공유서재

<첫서재 프로젝트 3 : 돈 대신 당신의 이야기를 모읍니다>


60년 묵은 폐가를 고쳐 만든 춘천의 공유서재, ‘첫서재.’
그 마지막 프로젝트 <첫, 편지>를 소개합니다.

(이전 프로젝트부터 보시려면 - )
<첫, 다락> 돈 아닌 것들로만 숙박비 받는 숙소
<첫, 작품> 서툰 당신의 작품, 대신 팔아드려요


2021년 봄부터 단 스무 달 동안 문을 열 첫서재의 대문에는, 새 둥지 모양의 나무 우체통이 매달려 있습니다. 멀리 태국에서 데려온 녀석인데요. 지금은 전기 및 수도요금 고지서만 꼬박꼬박 받아먹고 있지만, 봄이 되면 이 녀석 품에 손편지가 안겨 있기를 꿈꾼답니다. 첫서재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여기서 부화할 테니까요.


바로 이 녀석입니다.

첫서재에 오셔서 손편지를 쓴 뒤 이 우체통에 넣어두고 가는 손님께는 공간값을 받지 않겠습니다. 

편지지와 펜은 따로 준비해둘 텐데요. 다만 편지의 형식과 내용에 몇몇 조건이 따릅니다.

먼저 수신인이 분명해야 해요. 
이름까지 밝히지는 않더라도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써야 합니다. 그 대상은 떠나버린 가족일 수도, 옛사랑일 수도, 미워하는 상사일 수도, 미래 혹은 과거의 자기 자신일 수도, 사람이 아닌 책이나 영화일 수도, 애정하는 소품일 수도, 머리를 어지럽히는 상념일 수도 있겠지요. 물론 그 누군가에게 편지가 닿을 일은 없을 거예요. 수신인은 분명하지만 결코 전해지지 않는 편지인 셈이죠. 편지를 쓴 이, 즉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밝히셔도 좋고 감추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수신인에게 부칠 수 없는 사정 또는 사연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부칠 수 있는 편지는 받지 않습니다.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는 일기장에, 현재 사랑 혹은 우정 편지는 그 상대방에게, 신에게 쓰는 편지는 종교시설에서 쓰시면 될 거예요. 특정한 수신인이 있지만 부칠 수 없거나 차마 부치지 못하는 상황(혹은 사연)이 있는 분들만 편지를 남겨주세요.

정성을 담아주세요.
정성까지 조건을 달아야 하다니 좀 우습지요. 그러나 저희 입장에서는 돈을 받지 않고 공간을 내어드리는 만큼, 꼭 정성스러운 편지들이 쌓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무조건 몇 줄 이상 써야 한다든지, 우체통에 넣기 전 확인한다든지 그런 규칙까지 정할 수는 없을 거예요. 다만 믿을 뿐입니다. 애써 춘천까지 찾아오셔서 자그마한 공유서재에 앉아 손편지를 남기고 떠나는 분들의 서정을요.

편지는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질 거예요. 
우체통에 두고 가시면, 저희가 정리해서 엮을 예정입니다. 첫서재에 들르는 손님들께서 볼 수 있도록 노트로 만들 수도 있고, 온라인에 공개할 수도 있을 거예요. 출판물을 통해 내용의 일부가 드러날 수도 있고요. 그러니 아무리 익명이어도 편지가 누군가에게 보여지길 원치 않는 분, 혹은 쓴 글에 대한 저작권을 원하는 분의 편지는 죄송스럽게도 받을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공개에 대한 동의서가 편지봉투 안에 담겨 있어요.)


마지막으로 1인 손님의 편지만 받으며, 한 손님이 두 번 이상 편지를 쓸 수는 없습니다. 

다만 꼭 누군가와 함께 오셔서 편지를 쓰고 싶은 사연 혹은 사정이 있는 분이라면 말씀해주셔요. 기꺼이 편지지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첫, 편지'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유는 저희 공유서재의 방향성과 닿아 있습니다. 첫서재를 익명의 ‘처음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공간으로 만들어나가고 싶거든요. '첫, 다락' 프로젝트로 사람들을 쌓아가고, '첫, 작품' 프로젝트로 창작물들을 쌓는다면, 마지막 프로젝트로는 이야기들을 쌓아나가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 이야기는 체온이 느껴지도록 손끝에서 써 내려간 것들이길 바랐고요. 누군가에게 꼭 전하고 싶지만 결코 전해서는 안 되었던, 혹은 전하기 서먹했던 이야기들이 마음에서 출발해 손끝을 거쳐 여행하듯 첫서재에 다다랐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누군가 남기고 떠난 편지에, 또 다른 누군가가 정성껏 답을 해주는 공간이 되바랍니다. 서로의 익명성을 베고 누워 경험을 나누고 위로를 덧대는 가게가 서울이 아닌 어느 작은 도시에 하나쯤 있었으면 했거든요. 단지 공간만 공유하는 서재가 아니라, 마음의 온기까지 나누는 깊은 의미의 '공유'서재가요. 누군가를 향한 타인의 편지에 대신 감응해주는 손님들이 늘어날수록 저희 서재의 온도 역시 시나브로 사람의 체온에 수렴할 거예요.



첫서재에서 준비한 프로젝트는 여기까지입니다. 수없이 기획안을 뒤엎고 덧대고 다듬으면서도 단 한 번도 벅차거나 힘들지 않았어요. 저희 힘으로 만든 공간을 통해 누군가에게 기회와 위안을 드릴 수 있는 기획이기 때문이었겠지요. 사실 이제껏 통 큰 기부 한 번 해본 적 없이 생존을 핑계 삼아 이기적으로만 살아왔습니다. 힘들고 억울한 취재원들의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뉴스에 내면 할 일을 다 한 거야'라고 자위하며 애써 외면해왔지요. 그래서인지 휴직하는 20개월만큼은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어요. 물론 돈도 벌어야겠지만, 월급보다 커다란 목표에 시간과 공을 더 들이는 삶을 잠시라도 살아봐야 더 삶 다울 것 같아서요.

'이렇게 돈 아닌 것들만 받으면 가게는 어떻게 운영되니?'라고 걱정해주시는 분들도 가끔 계십니다. (아, 부모님) 그건 뭐 운영해봐야 알겠죠. 일단 와주시는 손님들께 공간값도 꼬박꼬박 받을 거고요. 무엇보다 첫서재가 팝업스토어로 열리는 20개월 이내에 '돈 아닌 것들'을 최대한 많이 벌 생각입니다. 소개드린 세 가지 프로젝트로 사람도 벌고, 이야기도 벌고, 창작물도 벌 거예요. 객들이 서재에 남기고 간 값진 경험과, 꺼내기 어려웠던 진심과, 미지근하게 퍼지는 정서를 벌 겁니다. 그리고 그걸 역량껏 글에 담아 콘텐츠로 생산해보려 해요.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나름대로 제 자신에게 기회를 줘보는 거랍니다, 저도.




오랜 시간 준비한 프로젝트를 전부 글로 털어내마음껏 홀가분하네요.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숨이 답답한 날들이어도 마음만은 상쾌한 연말 보내시기를요. 그리고 계절이든 시국이든 봄이 찾아오면, 봄의 도시 춘천에서 꽃처럼 만나기를요. 


봄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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