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윈도우 브러시에 부서지는 빗물 사이로 멀리서 흙빛 성전 같은 실루엣이 반짝였다. 우리의 출발지가 될 하바롭스크 중앙역이었다. 동화 같은 색감과 누아르적 음울을 동시에 내뿜는 이 오묘한 도시에서 이틀을 머문 뒤, 밤 11시36분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숙소를 나선 터였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빗줄기를 피해 서둘러 대합실로 들어섰다. 밤공기가 몰라보게 차가워졌다고 느꼈다.
밤이 늦어서인지 대합실은 한산했다. 수천 명의 군중이 들끓어도 끄떡없을 법한 땅의 기운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많아야 스무 명 남짓 정도였을까. 대개 러시아인들이었고, 더러 동양인도 눈에 띄었다. 스산한 날씨 탓인지 표정이 하나같이 서늘했다. 위축된 기분에 다시 한 번 비상물품을 확인했다. 겁이 나면 쓸 데 없이 몸에 지닌 것들을 점검하곤 한다. 슈퍼마켓에서 산 도시락 컵라면 1인당 한 개씩. 미니 보드카 두 병. 감자칩 세 봉지. 물티슈 한 통. 제대로 챙기긴 한 것 같다. 길게는 열 시간 넘게 정차하지 않을 때도 있다니 비상식량과 손발을 닦을 거리가 필요했다. 열차 안에도 식당은 있지만 비싸고 맛도 실망스럽다고 했다. 과자와 라면을 팔기도 하지만 소량만 들여놔 금방 다 팔리기 일쑤라고 했다. 샤워실은커녕 세면대 수도꼭지에서 답답하도록 찔끔찔끔 흐르는 물이 유일한 씻을 도구라고 했다. 일단 이만큼 준비한 정도로 버티고, 다음 기착지에서 내려 먹을거리를 다시 채울 셈이었다. 씻는 건? 참는 수밖에 없었다(사실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비상물품을 점검한 뒤, 열차 안에서 가지고 놀기 위해 따로 작은 가방에 빼어 둔 개인 소지품도 다시 한 번 챙겼다. 프랑스 작가지만 러시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내 가방에 담긴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최근 들어 푹 빠진 일본 작가 다나베 세이코의 <서른 넘어 함박눈>. 이번 여정을 위해 거금을 들여 산 밥 말리 헤드폰과 7년째 고장나지 않고 내 여행 주머니를 채워주는 기특한 아이리버 엠피쓰리. 반쯤 쓴 가죽 수첩과 선물 받은 샤프 한 자루. 캐논 D-100 카메라. 준비 완료다.
오후 11시 16분. 대합실 벨이 울렸다. 어둠의 저편에서 우렁찬 쇳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열차가 육중한 몸집을 드러냈다. 하바롭스크 역에서 20분을 정차한 뒤 출발할 열차였다. 상상하던 순간이었지만 상상보다 두근거렸다. 단지 ‘바로 저 열차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온몸이 주뼛했다. 기차여행자의 마지막 로망. 지구 둘레의 3분의 1을 달리는 열차. 만나기 전부터 거창한 수식어로 나를 움츠렸던 존재가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어서 그랬을까. 열차는 밤의 정령처럼 검고 파괴적인 얼굴로 속도를 조금씩 늦추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둠. 인적이 드문 기차역. 빗소리. 열차 쇳소리. 누구도 날 해치려 하지 않았지만 긴장감에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속으로 말을 건넸다. 누가 들으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꽤 경건한 마음이었다.
'어서 와. 지금부터 나는 너와 예순 시간을 함께 할 거야. 네가 날 바이칼 호수의 도시, 이르쿠츠크로 데려갈 거야. 아마 가족 말고는 누구와도 60시간을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던 적은 없었을 거야. 내 기억이 닿는 한. 너는 내게 그런 희소한 인연이 될 거야. 나를 잘 부탁해.'
골리앗 앞에 선 소년의 마음으로 다가오는 열차에게 악수를 건넸다. 열차는 내 앞에서 오차 없이 멈춘 뒤, 입을 벌리고 웃어보였다. 나는 그 입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