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
[독서메모(870) - 아우구스투스]
원제 : AUGUSTUS
저자 : 존 윌리엄스(John Edward Williams)
출판연도 : 원서 - 1972 / 번역서- 2016
존 윌리엄스(1922~1994)가 쓴 소설은 4권이 있다. Nothing But the Night(1948), Butcher's Crossing(1960), Stoner(1965), Augustus(1972)
그 중 Nothing But the Night은 존 윌리엄스가 20대 초반이던 나이에 군대생활을 하면서 (2차 대전에 공군으로 징집되었고 인도, 버마 등 해외에서 근무하였다) 쓴 습작이었고 1948년에 출판되었다. 존 윌리엄스는 그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평소 자기의 작품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오직 밤뿐인'이라는 제목으로 2020년에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스토너와 부처스 크로싱을 예전에 읽었다. 너무 좋은 소설들이었다. 존 윌리엄스가 단 번에 나의 최애 작가가 되었다.
스토너와 부처스 크로싱은 그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지만 문장은 비교적 평범하였다. 존 윌리엄스는 시집도 두 권이나 내는 등 시인이기도 한 점을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였다. 시인의 산문은 꼭 시인의 티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 아우구스투스에서 존 윌리엄스는 드디어 시인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아름답고 정교한 문장들로 꽉 채워져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시저, Gaius Julius Caesar)의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이다. 즉 율리아의 딸 '아티아'의 아들이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친아들처럼 아꼈고 후계자로 공언하였다. 카이사르가 암살을 당하자 18살에 불과하였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카이사르의 직위와 재산을 물려 받았다.
당연히 반대세력이 있었다. 특히 안토니우스는 내심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망이 컸다. 힘이 없던 옥타비아누스는 초반에는 안토니우스의 비위를 맞추었으나 점차 세력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게 된다.
안토니우스 제거 이후 명백히 권력 서열 1인자가 되었고 그 때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한 자'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본인 스스로는 황제라고 칭한 적이 없지만 로마 최초의 황제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로마가 이상하기는 하다. 보통 황제 정치로 가다가 시민의 혁명 등에 의해서 공화정으로 바뀌는데 로마는 처음부터 공화정으로 출발했으니...
이 소설은 각종 문서기록의 집합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당시에 주요 인물들 간에 오고 간 편지, 역사서와 회고록의 일부 발췌 등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작가가 다 지어낸 것들이다.
초반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너무도 어렵고(익숙하지 않고), 또한 비슷비슷하여 괴롭다. 또한 시점(時點)도 왔다가, 갔다 하여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내가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인데 로마 시대의 고문서 뭉치가 발견되었고 그것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는 기분이 든다.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순간 이 소설의 깊이에 빠져든다. '깊이'가 진정한 재미다.
실제 역사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당연히 다를 것이다. 사실 역사에서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여당과 야당이 매일 이벤트를 만들고 있는데 그 해석은 국민의 절반(A)과 나머지 절반(B)이 완전히 다르게 하고 있다. A측의 기자가 쓴 기사, A측의 역사가가 쓴 역사서와 B측의 기자가 쓴 기사, B측의 역사가가 쓴 역사서의 내용(해석)이 완전히 다르다. 그 어느쪽도 전부 진실이 아니거나 일부만 진실이다.
그래서 나는 역사는 기본적으로 역사가들의 멋대로의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자기의 처인 리비아의 아들(리비아 전 남편의 아들) 티베리우스를 엄청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여러가지 이유로) 후계자로 지목하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총애하였던 것처럼 알려져있다. 통념과 다른 존 윌리엄스의 상상이 진실에 부합한다는 뜻이 아니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통찰력 있는 문장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보기엔 도덕주의자야말로 가장 쓸모없고 경멸스러운 존재들이야. 쓸모없는 이유는 지식을 얻기보다 판단을 내리는 데 에너지를 쏟기 때문이지. 단순히 판단은 쉽고 지식은 어렵기 때문에 말일세. 경멸스러운 까닭은 그들의 판단은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무지와 오만의 힘으로 세상에 강요하려 하기 때문이라네."
나는 존 윌리엄스의 위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시(詩)에 관한 다음의 대목들도 눈여겨 볼만한다.
"몇 년 전, 친구 호라티우스한테 어떻게 시를 쓰는지 배웠네. 우리는 와인을 마시면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었지. 내가 보기엔, 그때 그 친구 설명이 근자에 소위 <피소스에게 보낸 서한>에 담은 내용들보다 더 정확했어. 시의 기술을 논하는 글이지만 솔직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 내가 시를 쓰는 이유는 시를 쓰고 싶은 강한 충동에 떠밀리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감정이 단호한 의지로 굳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시를 쓸 때만큼이나 자연스럽게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을 늘 알지는 못한다.) 이제 소재를 최대한 활용해 시를 쓴다. 필요하다면 타인에게서 빌거나 (아무 문제없다.) 만들어낸다. (역시 문제없다.) 내가 아는 언어를 사용하고 그 한계 내에서 글을 쓴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내가 궁극적으로 찾아내는 목표는 처음에 내가 인지한 목표와 크게 다르다. 어느 해법이든 새로운 선택을 내포하고 선택은 예외 없이 새로운 문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역시 새로운 해법을 찾아내야 하며 그 과정은 무한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마음속으로 시가 궁극적으로 다다른 곳을 바라보며 그때마다 놀라고 만다.”
그가 시인이었으므로 시인에 대하여 지나친 예찬^^도 하고 있다.
"시인은 혼란스러운 경험과 난감한 사건, 이해 불가의 가능성 영역을 관조하네. 말하자면 우리 모두 살고 있으면서 거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세상이겠지. 관조의 결실이라면 무질서 속에서 사소하나마 조화와 질서의 법칙을 찾아내거나 만들고, 그 발견을 시적 법칙에 기반해 세상에 구현하는 것이겠지. 사실, 시인이 엄격한 정형률에 언어를 맞추는 것보다, 더 정교한 대형으로 병사들을 훈련시킬 장군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네. 시인이 나름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오와 열을 맞추는 것보다 이 파벌과 저 파벌을 적확하게 배치할 능력은 어느 집정관도 없으며, 시인은 구체적인 시어들을 배열하여 또 다른 차원의 세계(어쩌면 우리가 위태롭게 장악하고 있는 이곳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를 창조한 뒤 인간 정신의 우주 속에서 자전하게 할 수 있지만, 그 어떤 황제도 이 표리부동한 세계 이곳저곳을 조직하고 통솔해 전체를 구성할 수 없다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죽음을 앞 둔 아우구스투스가 배를 타고 표류하듯이 여행하면서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는 편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기록한 역사를 무덤 주변의 기둥들에 새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썼다.
"글은 청동판에 조각해 묘지 입구 열주에 걸어둘 걸세. 열주는 각각 여섯 개 정도의 공간이 있고 청동판도 각각 한 행에 육십 글자, 오십 행 정도의 글을 담을 수 있어. 그러니까 내 업적의 기록은 일만 팔천 자 정도의 글자로 제한해야겠지. 또한 내 삶이 그랬듯, 이 글들도 진실을 드러내는 만큼이나 숨겨야 할 걸세. 진실은 새김글 아래, 그 글을 에워싼 대리석 속 어딘가에 묻힐 걸세."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잡겠다고 결심한 동기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큰 야망을 가진 인물들은 사실 같은 동기(내 운명이다!)가 아닐까.
"따라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안이한 이상주의나 이기적인 정의감 때문이 아니었네. 그랬다간 백발백중 실패했겠지. 재산과 권력에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네. 개인의 안위를 넘어선 부는 지극히 천박하고 필요 이상의 권력은 비열하기 짝이 없으니까. 육십 년 전 그날 오후 아폴로니아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운명이었네. 난 운명을 피하지 않기로 다짐했지. 하지만 세상을 바꿀 운명이라면 먼저 자신부터 변해야겠지. 그 사실을 이해한 것도 지식보다 거의 본능에 가까웠네. 운명에 복종한다? 그럼 무엇보다 자신과 타인, 심지어 내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세상에 무관심할 수 있어야 하네."
존 윌리엄스가 묘사한 인간의 모순은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다.
"인간이란 얼마나 모순된 동물인지. 가장 아끼는 대상을 거부하거나 단념해야 하다니! 군인은 직업으로 전쟁을 선택하면서 평화를 갈망하고, 태평성대에는 검이 부딪는 소리와 전장의 혼란과 피비린내를 그리워한다네."
존 윌리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입을 빌려서 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요즘에 유행하는 말인 '메타 인지', 모두 같은 말이다.
"난 인간이야. 누구나처럼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 다른 사람들보다 잘난 점이 있다면 나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타인의 약점도 안다는 정도겠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거나 똑똑한 척할 필요가 없었고, 바로 그런 자각이 내 힘의 원천이었다네."
종이책들은 모두 버렸는데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15권)와 박경리의 토지 시리즈(21권)이다.
이런 긴 대하소설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를 읽으면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제1권부터 다시 읽고 싶어졌다. 시오노 나나미와 존 윌리엄스의 상상력 차이가 궁금하지 않은가.
내친 김에 박경리의 토지 시리즈도 제1권부터 21권까지 정독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결심이 지켜질지는 모르겠다. 남은 인생에서는 결심을 쉽게 버리면서 살려고 결심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