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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Aug 09. 2020

미국 건강보험에 가입하고

헬스케어 디자이너는 미국에 살면서

뉴스,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만 미국을 알던 내가 2011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출장을 갔을 때, 화면에서만 보던 미국 거리와 미국 사람들이 마치 영화 같아 보였다. 그러다 2016년 여름 이후 미국에 머무르게 되면서, 미국은 이제 좀 익숙하고 때로는 편하기도 한 나라가 됐다. 그리고 미국에서 반복 유산, 난임, 고위험 임신, 출산을 거쳐 육아를 하며 환자와 보호자의 자격으로 헬스케어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미국의 병원과 의료기기와 사람들을 리서치하러 출장 왔을 때는 접근하지 못했던 곳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 남동부의 조지아Georgia, 북서부의 오레곤Oregon과 워싱턴Washington 이렇게 3개 주를 옮겨가며 살았다. 여행으로 남동부의 테네시Tennessee,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플로리다Florida와 서부의 네바다Nevada, 애리조나Arizona와 캘리포니아California를 방문했다. 이전에 출장으로 왔던 북동부의 펜실베니아Pennsylvania, 뉴욕New York,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중부의 일리노이Illinois까지 하면, 넓은 미국 안의 지역 별 차이를 어느 정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림. 그동안 경험한 미국 주들의 위치

헬스케어 서비스 이용자로서는, BCBSGA(Blue Cross and Blue Shield of Georgia의 줄임말, 2019년 1월 1일부터 Anthem Blue Cross and Blue Shield로 이름 변경)와 Kaiser Permanente 보험사를 이용했고, HDHP, POS, HMO라는 다른 종류의 건강보험을 경험했다. 때로는 무보험자로 살았다. 그리고 2020년 8월 현재까지 6개의 클리닉과 2개의 병원을 이용했다. 산부인과, 소아과, 가정의학과를 포함해 13명의 의사들을 직접 또는 화면이나 채팅으로 만났다. MD(Doctors of Medicine) 뿐만 아니라 DO(Doctors of Osteopathic Medicine), 그리고 PA(Physician Assistant)와 MA(Medical Assistant)를 만났고, RN(Registered Nurse) 뿐만 아니라 NP(Nurse Practitioner), LPN(Licensed Practical Nurse), 그리고 PCT(Patient Care Technician)로 불리는 사람들을 만났다. 코로나가 유행하면서부터 병원들도 감염 예방을 위해 최대한 조심을 하니 병원과 약국을 갈 때 마스크를 쓰고 체온을 재고, 가능한 경우 화상 진료나 채팅 상담을 이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살며 미국의 브랜드들과 친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 일할 때 미국 시장에 관한 보고서를 볼 때 낯설게 보였던 브랜드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는 안다. 예를 들어,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는 Whirlpool 제품을 쓴다. 빌트인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주방 세제와 물비누는 Method, 세탁 세제는 Seventh Generation, 청소용 소독제는 Clorox와 Lysol, 휴지는 Charmin이나 Cottonelle, 키친타월은 Bounty를 쓴다. 유산균은 Culturelle, 우유는 Organic Valley, 형광펜은 Sharpie, 건전지와 사무용지는 Amazon Basics를 산다. 커피는 이태리 생활을 끝낸 후 기념으로 샀던 네스쁘레소Nespresso 대신 큐릭Keurig 머신에 K-cup capsule로 바꿨다. 미국 내 표준 같은 K-cup 제품들이 종류도 다양하고 할인도 많아 어쩔 수 없었다. 차 없이 외출을 할 때는 Uber나 Lyft를 이용하고,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Uber Eats로 배달음식을 주문해먹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외식 대신 Hello Fresh 밀킷을 배달받아 새로운 음식을 경험한다.  


한국에서 이마트, 홈플러스, 코스트코가 바로 앞에 있는 동네에 살며 쿠팡, 지마켓, 알라딘 등 각종 온라인 쇼핑몰을 열심히 이용하던 나는 이제 미국에서 아마존 프라임과 코스트코와 타겟 드라이브업(Drive Up) 덕분에 하루하루를 산다. 홀푸드(Whole Foods Market), 트레이더조(Trader’s Joe), 크로거(Kroger, 서부에서는 프레드 메이어(Fred Meyer) 명칭 이용), 홈데포(Home Depot)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병원을 다니고 쇼핑을 하는 사이 어느새 미국의 헬스케어, 미국의 서비스와 사고방식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나를 발견한다.


미국에서 건강보험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 국민건강보험은 마치 공기와 같은 느낌이었다. 학생일 때나 회사를 다닐 때나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을 때나 한국에서 나를 위한 건강보험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박사과정을 위해 이태리에 있을 때는 장기 유학비자를 받기 위해 건강보험을 구입했고 주치의를 지정했다. 싱가포르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는 회사에서 건강보험을 제공했기에 아플 때는 부담 없이 가까운 몰 안에 있는 클리닉에 갔다. 건강보험은 늘 당연하게 주어졌고,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이 어려웠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2016년 여름에 미국행을 준비하며 처음으로 건강보험이 내 인생에 선택 사항이 됐다.


2015년 초부터 2016년 여름까지 싱가포르의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합류했다. 짧은 시간 동안 짐 정리를 하고 이동을 준비하며 미국의 건강보험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오바마케어 법안에 따라 미국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이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그 기간 동안 벌금을 물어야 하는 규정이 있던 때였으나, 유학생의 가족 신분으로 비자를 받은 내게 누구도 건강보험을 요구하거나 보조해주지 않았다. 한국에서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면서 실비보험 역시 납부 중인 나는 여행 가는 기분으로 당분간 미국에서 무보험자가 되기로 했다. 건강보험이 당연한 의무나 권리가 아니라 경제적 선택이 될 때 사람들은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경제적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림. 그동안 경험한 미국 건강보험 가입형태

(참고. https://www.census.gov/library/publications/2019/demo/p60-267.html)

미국에서 건강보험에 가입하지도 않고 병원을 이용해 본 적도 없던 시기에, 미국의 건강보험이 어떤 것인지, 미국에서 의사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동안 살면서 의료서비스를 이용했던 한국, 이태리, 싱가포르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건강보험이 없는 처지가 되니 헬스케어와의 접점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널찍이 분산되어 있어 마트도 공원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애틀랜타에서 병원 갈 일이 없다 보니 내가 다니는 길에서 병원이나 의원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TV에서 약에 대한 광고들이 수시로 나왔지만 광고들 끝에 언제나 나오는 “Talk to your doctor today”할 미국의 의사가 나에게는 없었다. 늘 헬스케어 관련 리서치를 하고 디자인을 하면서 병원을 가까이하던 나는 동네 이곳저곳의 CVS와 슈퍼마켓 안의 약국들, Costco 안에 성처럼 쌓인 약과 영양제들을 구경하며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저녁에 밖에서 장을 보거나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의 몇 블록마다 Urgent Care라는 생소한 이름의 간판이 늦은 저녁까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내가 가도 되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무보험의 의미는 평범한 날보다 위기의 순간에 선명하게 다가왔다. 건강보험 없이 애틀랜타에 살던 시절,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고속도로에서 집으로 가는 출구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차 밖에서 익숙하지 않은 굉음이 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달리는 차 안에서 주위를 살펴보니, 우리 차 바로 앞에서 승합차 한 대가 도로를 가로지르며 회전하는 영화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회전하는 자동차가 진행하는 방향에 따라, 사고 차량의 앞차 또는 뒤차인 우리 차와의 충돌이 불가피해 보였다. 사고의 몇 초 전 같은 기이한 순간, ‘만약 사고가 나서 크게 다치면 의료비는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앰뷸런스를 타고 응급실에 가는 것만으로도 수천 불이 청구될 수 있는 미국에서 교통사고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링크). 감사하게도 몇 초의 차이로 사고를 모면하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그러다가 2018년에 남편이 여름 방학 동안 오레곤주(Oregon State)에 있는 회사로 3개월 간 인턴쉽을 가게 되었다. 대기업인 회사는 직원의 가족인 내게 별도의 비용 부담 없이 미국의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HDHP, HMO와 premium, deductible, co-pay, out-of-pocket limit과 같은 생소한 보험 용어들에 대해 공부해가며 건강보험을 선택했다. 남편이 회사에 소속되는 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가입하는 보험이기에 병원에 갈 일이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되어 직원에게 별도의 월별 보험료(premium)를 요구하지 않는 HDHP(High Deductible High Premium) 보험을 선택했다. Deductible이라 불리는 연간 자기 부담금 1,500불을 자기 돈으로 다 내기까지 보험에서 개입하지 않는 보험이었지만, 만약의 상황에 이용할 수 있는 건강보험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됐다. 드디어 미국에서 건강보험을 갖게 되어 설레는 마음에 집으로 배달된 건강보험 회원카드를 지갑에 넣고 다녔지만, 3개월 간 병원에 갈 일이 생기지 않아 남편의 인턴쉽도 끝나고 건강보험도 같이 사라졌다.


인턴쉽이 끝나고 학교가 있는 애틀랜타로 돌아올 시기에 첫 번째 임신을 하게 되면서 남편이 다니는 학교의 건강보험에 부양가족(dependent)으로 가입했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건강보험이라 학기 시작 직전 정해진 시기에만 가입이 가능했고, 다음 학기 전체 기간에 대한 보험을 한 번에 구입해야 했다. 당시 학교는 박사과정 학생에게 Blue Cross Blue Shield GA라는 건강보험회사의 Open Access POS(Point-Of-Service)라는 한 종류의 보험 만을 제공했다(POS는 주치의를 지정해야 하지만 의료 서비스 이용 시 인네트워크in-network와 아웃오브네트워크out-of-network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건강보험 형태). 박사과정을 하며 연구실에서 건강보험 가입을 지원해주는 남편과 달리, 나에게는 그해 8월~12월의 5개월의 보험료로 $2,274가 일시에 청구되었다. 그다음 학기에는 1월~7월의 7개월 간 보험료로 $3,184가 청구되었다. 1년 간 $5,458, 한화로 630만 원 정도(1USD 당 1150원 계산)를 부담한 셈이다. 보험료는 해당 기간 동안 건강보험 자격을 얻기 위한 비용이고, 그 기간 동안 병원과 약국을 이용하려면 매번 그에 따르는 추가 비용이 필요했다.


애틀랜타의 집으로 새로운 건강보험 회원카드가 배달됐다. 내가 가입한 건강보험에서 네트워크 병원(in-network)으로 인정하는 산부인과들 중 주위 사람들의 평가와 온라인 리뷰를 참고해 초진을 예약했다. 임신 5주 차에 클리닉에 전화를 했는데 내가 원하는 의사는 8주 차에나 예약이 가능했다. 건강보험이 있고 병원에서 나를 새로운 환자로 받아줘도 바로 의사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답답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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