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음식은 정말 맛있다. 많은 사람들이 멕시코 음식 하면 흔히 '타코'를 떠올리겠지만 한국사람들이 김치만 먹는 것이 아닌 것처럼 멕시코에는 타코 말고도 정말 다양한 음식이 많이 있다.
초콜릿과 고추를 갈아 만든 소스를 고기와 함께 먹는 '몰레 로호 Mole Rojo', 호박씨를 이용해 소스를 만드는 '몰레 베르데 Mole Verde', 아주 큰 크기의 고추를 구워서 껍질을 벗겨내고 치즈와 사워크림을 버무려 만드는 '칠레 레예노 Chile relleno', 우리나라의 해물 찌개를 떠올리게 하는 '칼도 씨에테 마레스 Caldo siete mares'등 멕시코 남편을 둔 덕분에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멕시코 음식을 맘껏 먹어보며 사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정말 다양한 멕시코 요리를 먹어 본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한 가지만 꼽으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포솔레 Pozole'라고 말할 것이다. 포솔레는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양파, 마늘, 오레가노 잎과 함께 넣고 오래도록 끓인 다음에 불린 옥수수를 넣어 다시 한번 한소끔 끓어낸 스푸이다. 포솔레는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나는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아 약간 우리나라의 닭백숙과 맛이 비슷한 '포솔레 블란코 Pozole blanco'를 가장 좋아한다.
사위가 오면 장모가 닭 한 마리를 끓이듯, 포솔레도 멕시코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먹는 잔치 요리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포솔레를 떠올리면 언제나 즐거운 기억들도 함께 따라온다. 남편의 가족들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아라의 돌잔치에서도, 시아버님의 생신날도 사람들과 웃으며 즐겁게 포솔레를 먹었다. 그리고 남편의 생일날 내가 처음으로 만든 멕시코 요리도 포솔레였다.
나에게 포솔레 만드는 법을 처음 알려준 건 시아버님이었다. 한국에서 '시아버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사람에 따라서는 어색함의 대표인물로 분류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 시아버님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장난기 가득하고 친근한 산신령을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아버님을 모시고 수족관을 간 적이 있다. 가는 길이 생소하고 복잡했는지 운전을 하는 남편이 계속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에서 시키는 대로 가면 되는데 남편은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며 계속 고집을 부렸고 긴 여행에 지친 나는 남편에게 화를 내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거워하시며 시종일관 농담을 던지셨다. '내비게이션도 계속 같은 길을 알려주느라 화가 나서 딴 길을 알려주나 보다' '오늘은 물고기 헤엄치는 걸 보는 날이 아니라 차들 헤엄치는 걸 보는 날인가 보다'라고 말해 끊임없이 우리를 웃게 만드셨다. 그리고 아버님은 농담을 던지시는 와중에도 남편에게 자상하게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말 또한 아끼지 않으셨다.
포솔레를 생각하면 항상 자상하고 농담이 많으신 아버님을 떠올리게 된다. 요리를 알려주시면서 별로 한 게 없는 나에게 너는 굉장히 똑똑하고 요리를 잘한다고 한국인이 아니라 사실은 멕시코 사람이 아니냐고 장난을 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포솔레는 마치 인생과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셨는데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냈지만 포솔레를 여러 번 끓여보다 보니 아버님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특별한 양념이나 향신료를 많이 쓰는 걸로 유명한 멕시코 요리 중에서도 '포솔레 블란코'만큼은 소금 말고는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오래도록 국물을 우려내는 것 말고는 딱히 조리할 필요가 없어 그냥 기다리면 맛있어지는 요리가 포솔레이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다 보면 풍미가 깊어지는 인생처럼 말이다. 강렬한 양념이나 특별한 드라마가 삶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지금 처한 상황을 잘 견뎌내다 보면 내가 갖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 삶을 깊이 있게 만든다. 나는 때가 알아서 오고 가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천천히 가도 괜찮고 돌아가더라도 어딘가에는 도착하기 마련이다.
오늘 나는 오랜만에 포솔레를 만들었다. 닭을 끓이는 동안 잠시 눈을 감고 내 인생을 돌아봤다. 언제나 자극적이고 특별한 인생을 갈망하던 나였다. 하지만 진짜 인생은 포솔레를 먹기 시작한 지금부터라고 다짐했다. 장거리 마라톤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넌 할 수 있어. 천천히 가도 괜찮아.
물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요리라면 곰탕만 한 것이 없겠지. 역시 한국인들은 곰탕을 먹고 자라서 힘겨운 시간을 잘 견뎌내나 보다. 언젠가 아버님께 곰탕을 끓여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