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엄마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이야기
훌쩍 반년이 지났다. 매일 비가 쏟아졌다 그쳤다 하는 우기의 중간이지만, 날씨가 많이 선선하다. 처음 도착했을 때의 숨 막히는 더위는 간간히 오는 비와 바람에 무뎌졌다. 우리 가족도 이제는 여기서 생활하는 것에 많이 적응되었고, 안 익숙해질 것 같던 것들도 함께 무뎌졌다. 하루에 어려움이 이제는 남아있지 않다.
처음 나 스스로가 힘들게 느꼈던 것은 바로 이웃과의 관계다. 한국에서는 공동육아라는 콘셉트로 회사 동료나 친구들을 만나는 것보다 동네 가족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아빠들끼리 아이들을 데리고 수영장에 가고, 박물관에 가고, 놀이터로 갔다. 이어 돌아가며 저녁 식사와 반주를 하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부모로서 같은 고민과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의 온도를 유지해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아내가 일을 하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아빠로서 이전의 이웃들을 내심 여기에서 찾고 있었다. 일종의 향수였으리라.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 아파트에서 첫째 둘째 아이와 동갑인 아이들을 만났고 부모들을 만났다. 주로 아빠가 일을 하고, 엄마는 아이들을 돌보는 주재원 가정이나 사업, 현지 회사에서 일을 하는 가정이다. 아내가 출근 후 퇴근하기까지 아이를 돌보는 나는 주로 이웃 엄마들과 마주치고 인사하고 말을 나눈다.
한국에서는 아빠들 간의 유대가 있어 회사 이야기나 육퇴 후 맥주 한 잔으로 이어지는 재미가 있었다. 술을 못하는 막내였지만, 형님들과 회사 일과 아이들과 있었던 일들의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엄마들도 모두 맞벌이였기에 모두들 잘 어울렸다.
이곳은 좀 다르다. 나이가 더 들어가면서 이성과의 만남이 반갑지가 않다. 각자 아이들의 아빠와 엄마로서 만나지만 서로의 배우자가 없는 상태에서 넘지 못할 벽이 존재한다. 가령 서로 집에 초대해서 아이들끼리 저녁을 먹이고 엄마나 아빠들끼리 맥주 한 캔 씩 열어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일 말이다. 젠더라는 벽은 아직까지도 견고하고, 나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아쉬운 부분이다. 가끔씩 놀이터에서 놀던 친구들이 자기는 누구 집에 가서 밥을 같이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는 첫째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도 두 아이와 나이대가 꼭 맞은 이웃이 있어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그 집과는 가끔씩 아이들을 불러 저녁을 먹이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해 주시는 게 감사하다.
아이 보는 아빠로서 장점도 있다. 잘 살펴보면 엄마들끼리는 친한 무리들이 있다. 아침에 모닝커피를 한다거나 골프를 친다거나 서로의 집에 초대하여 시간을 보낸다.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놀이터나 스포츠 등 그런 모습들이 보인다. 나는 여기에서 떨어져 있는 제 3자다. 누구도 모닝커피에 초대도 하지 않고, 스포츠 권유도 없다. 의리와도 같은 것이 끼어있는 네트워크가 없다. 나는 이에 만족한다. 언어공부, 스포츠 레슨, 휴식 등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니... 그냥 친구가 없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