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건 스펙트럼상에 있다고 생각하고, 대개 중요한 건 방법의 문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찾아보면 구체적으로 타당한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체벌하는 것이 가능한가? 舊 민법에서는 징계권(제915조)을 친권을 구성하는 권리의 하나로서 규정하였는데 이는 ‘사랑의 매’라는 명분으로 아동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법적 방어 전략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지적 때문에 2021년에 민법 일부개정을 통해 징계권은 폐지되었다.
보통 어떤 중요 입법이나 판결이 나오면 그것의 구체적 의미를 따지지 않고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함의만을 가지고 평가한다. 예컨대 이 징계권 폐지를 포괄적으로 ‘체벌 금지’라고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징계권의 폐지가 곧 자녀에 대한 훈육의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체벌’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따라서 정당화가 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주관으로 보면, 협의(狹義)의 체벌이란 신체에 직접적으로 상해를 입힐 수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훈육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엉덩이나 종아리에 맞는 매가 된다. 광의(廣義)의 체벌이란 그 외에도 포괄적으로 주관적인 고통을 느끼게 하는 행위들 예컨대 ‘깜지’라던가 ‘손 들고 서 있기’ 등이 있을 수 있다.
(법률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협의의 체벌은 이제 문화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체벌이 훈육 문화의 일부였을 때에도 가급적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 않고 훈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은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종이를 명심보감 등으로 까맣게 채우는 깜지라던가 손 들고 서 있기 정도는 통상적인 훈육의 차원에서 불가능하다고까지 볼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 통상적으로 아동기에는 기초적 사회화의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수단적 강제가 불가피하다.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교육이라는 것을 흔히들 방임과 혼동하면서 부모나 교사에게 일탈적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자율성 존중 교육 패러다임에 넘기는 경향도 은근히 보인다. 그러다 보니 일각에서는 ‘옛날처럼 그냥 때려서 가르쳐야 한다’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자율은 방종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자율(自律)이란 말 그대로 자기 스스로 ‘규율’한다는 의미이다. 자기통제 역량(책임)과 자유로운 판단(자유)을 균형적으로 길러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사회와 법률에서도 마찬가지로, 권리가 있으면 동전의 양면처럼 의무가 있고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수반된다.
이러한 이유로 자유주의에서의 자유란 어떤 면에서는 절대적 의미의 자유 즉 책임이나 의무 없이 모든 사회적 제약으로부터의 온전한 자유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고,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의 교육 역시 아동의 자율성을 보장하라는 것이지 방임이나 방종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방임이나 방종으로 아이를 결과적으로 망치고 해친 보호자들은 자율이나 자유주의의 개념 뒤로 숨을 수 없다.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아동이나 청소년의 자유로운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지도록 하되, 최소한의 기준선에 있어서 강제로 통제(예컨대 당연히 대중교통에서의 매너부터 시작해 친구나 어른에 대한 폭력 등은 절대적으로 규율되어야 하는 것이다)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본다.
여담으로 당연한 얘기지만, 학생인권조례나 학생인권운동에서는 학생들이 무엇이건 절대적으로 구속받지 않고 마음대로 해야 한다거나 그렇게 유도해도 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종래의 '미성숙하고 미완결된 아동과 청소년'과 '아이들은 계도해야 할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교육 패러다임은 그릇된 것이고, 궁극적으로 아이들은 만 19세가 되기 직전까지는 미성숙하다가 만 19세가 되는 순간 갑자기 모든 자유와 선택을 보장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과 같은 현재의 이상한 귀결은 문제가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두 가지 진실이 있다. 하나는 전체적인 발달 단계에서 아이들은 아직 사회화되고 성장하는 단계에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른이라 해서 항상 성숙한 게 아니고 아이들이라고 해서 항상 미숙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율성 중심 교육 패러다임은 이 두 가지 진실을 인정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되, 동시에 큰 틀에서는 아이들이 그른 길로는 가지 않게 막아주는 바리케이드 역할을 어른들은 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