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ie Jones slams Ricky Gervais and Jimmy Carr over trans jokes - Attitude
자유주의(Liberalism)와 진보주의(Progressivism)가 항상 겹칠까?
아닌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자유주의자들은 완벽히 진보주의자일 수 있지만 어떤 자유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코미디언들이 ‘언어의 조심’을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느냐는 이슈에 관한 최근의 문제들을 보면 자유주의자들은 나뉠 수 있다.
소수자 혐오 범죄를 당한(이 경우 신체적 위해를 당하진 않았으나 미수도 범죄일 확률이 높다) 로지 존스가 리키 저베이스 등을 공격하며 낸 말들은 꽤 세다.
‘시스젠더(젠더=섹스인 사람. 다시 말해 자기는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남성 또는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남성 - 이성애자 – 백인들이 그들의 삶을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한다.’
또 농담을 발화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할 때 생각해야 할 원칙을 제시한다.
1. 당신은 누구인가? 생생한 경험을 지니고 있거나, 그러한 경험을 가진 이가 가까이에 있나?
2. 누구에 대해 농담을 하는가? 무엇이 의도인가 –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위를 공격하는가(Punching Up) 아니면 아래를 공격하는가(Punching Down)?
3. 왜 그 농담을 하는가? 사회적 차원의 대화를 열기 위해 또는 사람들로 하여금 달리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가, 아니면 그냥 단순히 논란거리가 되어 주목을 받으려고 질문을 하는가?
자신이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또다시 소수자에 대한 낙인을 확인해야 했던 좌절감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들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계층이라던가 다수-소수 관계로만 환원해서 사회생활을 하거나 문화를 형성해 나갈 수는 없다.
시스젠더 남성-이성애자-백인들이 모두 존스의 말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들은 훨씬 더 복잡한 내면을 가지고 있고, 저베이스는 기성세대이지만 매우 다르다.
정말 진보주의자들이 문제 삼는 이들은 자신이 기득권이 아니라거나 또는 기득권이어도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저베이스는 자기 쇼에서부터도 자기자신의 그런 점까지 농담거리로 삼았다.
‘인정한다. 그리고 그걸로 웃기겠다.’
이 비슷한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내용과 맥락 등을 보고 판단을 해야지 그 단적 표현만 가지고 단정하는 건 옳지 않다.
예컨대 몸의 특정한 상태를 놓고 살이 있는 것과 살이 없는 것 사이에 '차별'이 있는데, 살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몸에 대해 평가 받거나 낙인 찍지 않아야 하며 이러한 점도 '인권'이라고 하는 주장에 관하여 저베이스는 '웃기지도 않는다'라는 취지로 말한다.
표현만 보면 '비만인 게 무슨 벼슬이냐?'로만 들리지만, 그의 스탠드업을 자세히 들어보면 실제 지적하고 싶은 건 '비만자가 건강해지도록 운동이나 식단 관리 등 자기책임을 지게 하는 방향에 맞지 않다'라는 취지에 가깝다.
사실 원래 몸에 관한 차별은, 외모에 관한 차별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미(美)와 추(醜)라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해를 받는 경우, 아예 관리가 필요한 사람의 경우까지도 '괜찮아. 그걸 뭐라고 하는 건 차별이야.'라고만 하는 식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이 이론 내지 사상의 입장은 그런 게 아니지만, 실제로 사회문화에 퍼지다 보면 그런 오해도 불가능한 게 아니다.
더구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의 비만 문제는 심각한 축에 속하는데, 거기에 만약 이러한 오해가 전제된 프레임이 확산되는 경우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한편, 저베이스가 각본을 쓰고 제작을 주도한 드라마 <After Life>를 보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저베이스는 아내를 잃고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며 심리적으로 방황한다.
이러한 내용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은, 감정의 복합성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또 코미디는 기본적으로 일종의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에는 온갖 종류의 표현 기법이 등장하고 심지어 어떤 유의 작품들은 반어법도 일상적이다.
더구나 코미디는 그보다 훨씬 더 배배 꼬아서 표면적으로는 웃기지만 이면적으로는 어두운 진실을 폭로하는 농담들도 많다.
블랙코미디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더 나아가, 아예 목적이라는 게 처음부터 없고 순수하게 그저 웃긴다는 협의의 코미디의 본질에만 충실한 것들도 있다.
물론 예컨대 실제로 무대 밖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혐오 발언 등을 하고 다니면 문제가 될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리키 저베이스는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
인간적인(Humane) 면모, 자기에 대한 고뇌라던가 타인에 대한 이해 등을 충분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표현을 하든 항상은 아니지만 대체로 관용할 수 있다.
조지 칼린은 아주 전형적인 ‘인간적인 욕쟁이’였다.
코미디언이란 그런 것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코미디의 본질을 끝까지 밀어붙이기가 ‘근본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아졌다.
저베이스와 같은 코미디언들은 이러한 위축이나 심지어 위선을 비판한다.
인본주의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어떤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거나 했다는 이유로 특별히 더 선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악한 노동자도 있고, 선한 자본가도 있다.
그리고 코미디언은 그들을 포함한 세상 모두를 평등하게 풍자와 해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그러니 코미디는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둘 다일 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위를 때릴 수도, 아래를 때릴 수도, 옆을 때릴 수도, 자기 자신을 때릴 수도 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코미디는 연설이나 보도 같은 게 아니므로, 특별히 사회적 대화를 열기 위해서 농담을 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없다.
예술은 그냥 예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위해 바쳐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또 만약 자기가 경험한 바 안에서만 농담을 할 수 있다면,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다른 이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코미디언이라는 것을 방패 삼아 어떤 말이라도 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세상에 명확한 규제란 없다.
법적인 규제건 사회규범이나 문화 차원의 규제건, 언어의 규제를 하는 순간 모든 코미디는 자동적으로 자체 검열에 들어가야 하고 이는 코미디를 위축시킨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 무절제하게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굳이 택해야 한다면, 후자를 택하면서 코미디언이 공인으로서 사후적으로 자기 말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코미디의 1차적인 존재 의의는 ‘그냥 웃는 것’이다.
이렇게 피로한 현대사회에서, 가끔은 그냥 다 같이 앉아서 생각 없이 또는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웃을 자리나 시간도 필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아무리 옳은 흐름이라도 소수자 인권은 항상 백래시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가 소수자인 이유는 권력에서 열세에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서 열세인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여러 수준으로 ‘다르다’라는 점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냉정하게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심지어 소수자도 다른 소수자에게 다수자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규제하면 생활문화의 자율적 형성이 근본적으로 저해된다.
사람들은 온전히 선하지도 온전히 악하지도 않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놓아두되, 문제가 생기면 그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논의하고 명확히 지적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방안이 그 자체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이보다 나은 균형점 내지 최적해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꽤 큰 변화를 요구하는데, 거기에는 노력이 요구된다.
밀고 당기는 것을 적절히 유지해야지, 당기기만 하면 그 반동으로 결국 줄다리기 전체가 좌초될 수 있다.
줄다리기 전체가 중장기적으로 좌초되는 것보다는 어렵지만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