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오늘도 서점에 도착했다. 넓은 곳이지만 조명은 밝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썰렁했다. 특히, 문학 코너는 늘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소외된 책들이 책장에 가득했다. 한쪽 구석에 놓인 간이용 의자도 마찬가지로 쓸쓸했다.
남자는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앉기 시작했다. 딱히 책을 좋아하지도 문학에 빠지지도 않았지만, 그는 습관처럼 그곳에 앉아 오늘 구매할 책을 훑어보곤 하였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깊이 있게 관찰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는 게 더 잦았다. 그는 비교적 저렴한 책을 좋아했다. 당연하게도 얇고 작은 시집을 주로 샀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오셨네요.” 여자는 환한 미소와 함께, 그가 내민 책의 결제가 끝나자마자 묻지도 않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아, 네….” 남자도 배시시 웃었다. 그는 여자의 손을 줄곧 쳐다봤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능숙하게 포장지를 씌우고 각을 잡아 투명 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고 골든 색 리본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 책에 꼬아서 묶더니 어느새 바람개비 리본을 완성하였다.
책을 받아 든 남자는 힘겹게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붉고 탁한 도시의 도로를 생경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도로의 끝에는, 여전히 푸른 바다가 흐리게 담겨 있다. 섬의 끝에는 언제나 바다가 있었다. 그는 3년 전 이곳에 왔고, 눈만 들면 늘 바다가 곁에 있으므로 외로움을 달래곤 하였다.
그리고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 바다에 그녀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생각은 짙어지고 느낌은 무게를 더하였다. 그는 그녀의 미소와 덧니가 좋았고, 능숙한 손놀림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언제나 여자의 밋밋한 손에 실반지라도 끼워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던진 말은 <이거 포장해주세요.>뿐이었다. 그마저도 이젠 하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섬에서 가장 큰 대형마트를 건설하는 현장에서 근무했다. 가난한 일곱 형제의 맏이였던 그는, 학자금 마련을 위해 내국인들이 꺼리는 건설직에 뛰어들었고, 타고난 성실성과 포용력을 인정받아 비교적 빠르게 관리자가 되었다. 하지만 <노가다>로 깎아내리는 우리 사회의 통념은 그를 외로운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건설 현장이 있는 전국을 돌아다녔다. 낯선 곳에 낯선 사람으로 쓸쓸한 삶을 살았다. 어느덧 그는 이제 마흔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자는 시간이 늘 천천히 간다고 생각했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그녀는 서점 계산대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늘 바삐 어딘가로 오고 갔다. 밖은 세상이고 안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바깥은 현재고 책방은 과거처럼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점점 꿈에, 과거에 머문 이가 줄었다.
서점 문을 삐죽 열고 들어오는 이례적인 행위의 낯선 인간. 그들이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책은 친숙한 참고서나 학습지였다. 혹은 잘 포장된 재테크, 우울한 현대인의 가벼운 이야기, 유명인의 얼굴이 새겨진 익숙한 책이었다. 적어도, 낯선 이들 사이, 검게 탄 모습의 그가, 투박한 손으로 내민 자그마한 시집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남자는 어느새 매일 서점에 머물렀다. 시간이 느린 곳. 과거 혹은 꿈의 세상. 적어도 느긋함 혹은 게으름이 용서되는 공간. 여자의 시선은 이제 그의 모든 곳에 닿았다. 호기심은 궁금점으로, 그리고 관심으로 마침내 끌림으로 변하였다. 어둡고 구석진 문학 코너를 서성거리는 낡은 작업복. 마침내, 그가 작고 가벼운 책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올 때면, 그녀는 무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고 흥분이 다가왔다.
사랑의 기쁨이 그녀를 물들였다. 여자는 내내 기다리고 남자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갔다. 마침내 대형마트가 완공되었다. 남자는 조급해졌다. 섬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그는 선물을 준비했다. 처음으로 고백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졌다. 낯선 청년이 어두운 서점을 지키고 있었다. 수소문하였지만 아무도 그녀의 행방을 몰랐다. 그가 섬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은 그렇게 가뭇없이 흘러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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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밝고 크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서점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낯선 이들만 가득했다. 그리움은 커지고, 그만큼 시간은 초조하게 흘렀다. 어둠이 투명한 유리를 물들이는 시간이 점점 고통으로 다가왔다.
“매니저님, 여기 한번 와보세요!” 손님이 사라진 텅 빈 대형 서점을 막 나서려는 순간, 미화 직원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계단 밑 간이 창고의 문이 열려있었다. 그곳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책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모두 바람개비 리본이 묶여 있었다.
그녀는 급히 책 한 권을 집어 포장을 뜯었다. 책갈피가 뚝 떨어졌다. 익숙한 글씨. 그녀가 정성을 다해 적어 놓은, 새 직장 주소와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책갈피에 눈물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