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업의 서막
조선 부평도호부 석천면 구지리, '서도사'라 불리는 사내가 있었다. 조부의 도사 벼슬을 빌린 공허한 존칭 아래, 그는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을 기반 삼아 마을의 패자로 군림했다. 허나 그 부는 심성을 황폐하게 만들 뿐, 그의 본성은 짐승처럼 포악했다.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하루, 흑단 장죽을 빗겨 차고 마을을 어슬렁거리면 공기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의 음담패설과 무자비한 폭력에 신음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소작농 신세인 백성들은 숨 막히는 공포와 체념 속에 그의 횡포를 견딜 뿐이었다. 서도사의 말은 법이요, 심기는 하늘의 뜻이었다.
가혹한 소작료는 생지옥이었고, 기한을 어기면 공개적인 치욕과 고통이 뒤따랐다. 농부를 묶어놓고 침을 뱉고 따귀를 갈기며, 구정물을 붓고 장죽으로 살갗을 터뜨리는 것은 그의 잔인한 유희였다.
어느 가을날, 뉘엿한 오후, 서도사의 기와 저택 앞에 누더기를 걸친 기괴한 몰골의 노인이 당도했다. 귀는 먹고 허리는 굽었으며, 손에는 푸른 기운 감도는 나무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무료하던 서도사는 이 불청객을 심심풀이 삼아 하인들에게 매질을 명했다. 노인은 비명 없이 신음만 흘렸고, 그의 굽은 등은 고통 속에서도 꼿꼿했다. 서도사는 술잔을 기울이며 그 참혹한 광경을 즐겼다.
매질 끝에 노인이 축 늘어지자, 서도사는 가래침을 뱉으려 다가섰다. 그 순간, 노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핏발 선 동공에는 심연의 증오와 저주가 이글거렸다. "이 천인공노할 악귀야! 네 죄업은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으리라! 살아서, 숨 쉬는 매 순간이 고통인 채,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구천의 미로를 떠돌며 네 악업이 만든 지옥불 속에서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친 노인은 숨을 거두었고, 몸에서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스러졌다.
서도사는 섬뜩한 한기를 느꼈으나 오만함으로 억누르며 노인의 행장을 뒤지게 했다. 봇짐 속 비단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용 무늬 오동나무 패, 국무당(國巫堂)의 신표였다. 국가 제례를 주관하는 신성한 존재를 해한 것. 삼족멸문지화가 불 보듯 뻔했다.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 그는 함구령을 내리고, 밤 깊어 노인의 시신을 폐 우물 근처에서 태웠다.
불길이 사그라든 잿더미 속, 하인의 비명에 다가간 서도사는 경악했다. 타다 남은 뼈는 흑요석처럼 칠흑같이 검고 단단했으며, 새까만 왼손 새끼손가락 뼈마디에는 어둠 속에서도 영롱한 빛을 발하는 검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그의 탐욕을 자극했다. 그는 홀린 듯 반지를 집어 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과 함께 미지의 힘이 차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자, 반지는 제 살처럼 완벽히 맞았다. 그의 입가에 탐욕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살인과 불경의 뒷수습을 일임하고, 기생집을 향했다. 그의 손가락 위에서, 검은 반지는 새로운 숙주와의 계약을 불길하게 속삭였다.
2. 악몽의 현현
기생집의 밤, 서도사는 검은 반지를 과시하며 거나하게 취했다. 그러나 반지는 차가운 존재감으로 불길한 예감을 흘려보냈다. 만취 후 호사스러운 금침에 들었으나, 깊은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마침내 잠이 들자, 끔찍하고 생생한 악몽이 그를 덮쳤다.
꿈속, 그는 빛 한 점 없는 동굴에서 아홉 머리 거대 뱀에게 휘감겼다. 숨 막히는 공포 속, 첫 번째 뱀 머리가 그를 삼키려 할 때, 그는 미친 듯이 혓바닥을 물어뜯었다. 뱀이 물러서자 결박이 미세하게 풀렸다. 그는 주변의 뾰족한 종유석을 부러뜨려 무기 삼아, 달려드는 뱀들의 눈알을 차례로 찔러 터뜨렸다. 아홉 눈을 잃은 뱀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그는 피범벅이 되어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녘, 방 안은 난장판이었고, 벽과 천장엔 검붉은 핏자국이 광란의 춤사위처럼 찍혀 있었다. 코를 찌르는 피 냄새. 새하얗던 금침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방 한구석, 어젯밤 그를 수청 들던 기녀가 싸늘한 시신으로 쓰러져 있었다. 두 눈은 뽑히고, 입은 벌어져 있었으며, 목에는 교살 흔적이 선명했다. 악몽 속 뱀에게 유린당한 모습 그대로였다.
극심한 공포 속에서도 그의 교활한 생존 본능은 빠르게 작동했다. 이 일이 발각되면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터. 그는 소리 없이 별실을 빠져나와 말을 타고 집으로 도망쳤다. 그의 손가락 위, 검은 반지는 새벽빛에도 불길하게 빛났다.
3. 저주의 그림자
집에 도착한 서도사는 몸을 씻고 가장 값나가는 재물을 챙겨 아들의 집으로 향했다. 아들에게 재산과 집안일을 맡기고, 그는 강화도 첩의 집으로 달아났다. 첩에게 금덩이를 안기며 청나라 밀항을 준비하라 명하고, 자신은 마니산 참성단 근처 깊은 숲 속에 남은 재물을 숨겼다.
첩이 데려온 뱃사람은 음흉한 인상이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날 밤 삼경, 외딴 해안 동굴에서 만나기로 약조했다. 첩의 집에 돌아온 그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첩이 차려준 저녁을 허겁지겁 먹고, 그는 깊은 잠에 빠졌다.
이번 악몽은 칠흑 같은 방, 수만 마리의 흉측한 검은 새 떼가 온몸에 달라붙어 살을 쪼고 피를 빠는 것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새들의 목을 졸라 죽였다. 잠에서 깨자, 코를 찌르는 피 냄새. 옆자리의 첩은 온데간데없었다. 호롱불을 켜자, 방 한가운데 대들보 아래, 그의 피 묻은 저고리 고름에 목이 졸린 채 허공에 매달린 첩의 시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악몽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잠든 자신은 저주받은 살인 기계였다. 그는 첩의 품에서 보석과 금덩이를 찾아, 약속 장소인 포구를 향해 도망쳤다.
4. 불멸의 형벌
삼경 무렵 포구, 약속한 뱃사람과 일행이 나타났다. 서도사는 비좁고 악취 나는 선창에 갇혔다. 배가 망망대해로 나아가자, 그는 반지를 빼려 했으나 꿈쩍도 않았다. 햇빛 아래, 반지에서 나온 검은 뿌리들이 살갗 아래 혈관과 신경을 휘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살아있는 기생충처럼.
그때, 갑판 위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덮개가 열리고 어부 대여섯이 그를 끌어내 옷을 찢고 보석을 빼앗았다. 한 어부가 그의 검은 반지를 발견하고 빼려 했으나 실패하자, 칼로 손가락을 자르려 했다.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으나, 칼날은 뼈에 닿자 튕겨 나갔다. 손도끼로 손목을 내리쳐도 뼈는 멀쩡했다. 어부들은 경악했다.
두목이 그의 팔뚝 살점을 도려내자, 드러난 것은 칠흑같이 검은 뼈였다. 노어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주받은 놈이다! 바다에 던져 버려야 해!" 어부들은 그를 닻돌과 함께 가마니에 넣어 수장시키려 했다. "살려주시오! 마니산에… 엄청난 재산을 묻어두었소!" 그의 절규에 어부들은 탐욕으로 눈이 멀어 그를 살려두고 강화도로 배를 돌렸다.
그러나 그날 밤, 서도사가 다시 깊은 잠에 빠지자, 선실 아래서 형체 없는 검은 그림자가 피어올라 갑판 위 뱃사람들을 잔혹하게 살육했다. 두목은 "저놈이 잠들면 재앙이 닥친다! 저놈을 죽여야 해!" 외쳤지만, 살아남은 선원들마저 그림자에게 찢겨 죽었다.
서도사가 깨어났을 때, 배 위는 인간 도살장이었다. 사방에 토막 난 시체와 피웅덩이. 그는 넋 나간 채 시체들을 바다에 던지고 갑판을 씻었으나, 죽음의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썩어가는 손가락의 고통과 갈증, 굶주림 속에 그는 의식을 잃어갔다.
5. 영겁의 자각
죽음 직전, 그의 시야에 작은 어선 한 척이 다가왔다. 백발노인과 앳된 처자는 그를 구조해 정성껏 보살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순수한 호의에 그는 눈물 흘렸다. 그러나 밤이 되자, 또다시 잠들면 이들에게 닥칠 참극에 대한 공포와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는 금덩이를 노인의 베갯머리에 두고, 과도 하나를 품은 채 새벽녘 집을 나섰다.
산속에서 그는 자결을 결심했다. 과도로 가슴을 찔렀으나, 칼날은 강철에 부딪힌 듯 튕겨 나왔다. 그는 미친 듯이 가슴팍 살을 갈라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칠흑같이 검고 단단한 돌덩이 같은 심장이 뛰고 있었다! 국무당의 저주, "살아서 구천을 떠돌며 불멸의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는 죽을 수 없는 몸, 살아있는 악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에게 남은 소원은 진정한 죽음뿐. 그러기 위해 검은 반지의 근원을 찾아야 했다. 그는 늙은 걸인의 행색으로 수백 년을 떠돌았다. 선량한 이에겐 죄책감을, 악한 자에겐 밤의 악몽을 선사하며. 마침내 깊은 산골, 늙은 국무당이 속했던 듯한 오래된 신당을 발견했다.
신당 문 앞에서 인기척을 내자, 냉담한 눈빛의 젊은 무당이 나왔다. 서도사가 썩어가는 왼손을 내밀자, 무당은 공포에 질려 주저앉았다. "오지 마라! 이 검고 추악한 악귀야!" 서도사는 애원했다. "이 반지, 이 저주를 어찌 아시오? 벗어날 길을 알려주시오."
무당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태초에 떨어진 별의 잔해에서 깨어난 어둠의 존재에 대해 힘겹게 토해냈다. 그것은 인간의 악의를 양식 삼아 더 강한 숙주를 찾아 옮겨 다니는 존재라고. "내 스승님의 악의보다 당신의 악의가 비교할 수 없이 깊고 강했기에, 그놈이 당신에게 옮겨간 것이오. 그놈은 언제나… 더 강력하고 사악한 숙주를 갈망하오."
"나보다… 더 악한 놈…?" 서도사의 뇌리에서 수백 년의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크아아아아아아악!" 그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절규를 토해내며 신당을 뛰쳐나왔다. 그의 마음속엔 단 하나의 뒤틀린 목표만이 남았다. '반드시 찾아내리라! 나보다 더 악한 놈을! 그놈의 손에 죽으리라!'
6. 새로운 숙주
2044년 부천. 첨단 문화 허브의 눈부신 번영 이면에는 뒤틀린 욕망과 어둠이 깊숙이 자리했다. 신흥 조폭 '범도끼파'는 신종 마약 '크로노스'를 유통하며 도시를 좀먹고 있었다.
어느 비 내리는 늦여름 오후, 춘의산 둘레길에서 여대생 둘이 범도끼파 조직원 서동수를 포함한 세 명에게 납치되어 버려진 유격장 소각터로 끌려갔다. 서동수가 여학생을 겁탈하려던 순간, 수풀 속에서 앙상한 몰골의 노인, 서도사가 나타났다. 조롱하던 서동수가 칼을 들고 다가서자, 노인의 녹슨 과도가 번개처럼 날아와 그의 왼쪽 안구를 찔렀다. 남은 두 조폭이 달려들어 노인의 가슴과 허벅지를 찔렀으나, 칼날은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왔다. 노인은 순식간에 그들의 허벅지 동맥을 그었다.
피를 쏟으며 죽어가던 조폭들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노인은, 이들도 자신이 찾는 존재가 아님에 실망하며 돌아서려 했다. 그때, 눈알 터진 서동수가 마지막 악의로 석유통을 노인에게 퍼붓고 불을 던졌다. 노인은 거대한 인간 횃불이 되어 쓰러졌고, 이내 잿더미만 남았다.
그때, 서동수의 피로 흐린 시야에 잿더미 속 검게 반짝이는 것이 들어왔다. 새까맣게 탄 손가락뼈, 그리고 그 뼈마디에 단단히 끼워진… 검은 반지. 그는 홀린 듯 반지를 집어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웠다. 놀랍도록 완벽하게 맞았다. 짜릿한 전율과 함께 터진 눈과 베인 다리의 고통이 사라지고, 강력한 힘과 전능감이 차올랐다. 서동수는 고통도 잊은 채, 자신의 손가락에 새로이 자리 잡은 검은 반지를 보며 기괴하고 탐욕스럽게 웃었다. 영겁회귀의 저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