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더와 눈물

by 남킹


일기 단편

10월 10일. 여전히 맑음. 간단하게 장을 봤다. 물, 음료수, 우유, 휴지—일상의 흔적들. 오가는 길에 놓인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다. 겨울로 기우는 가을의 맑은 하늘은 흐릿한 기억보다 더 선명했다. 하늘빛은 때로 다른 세계로의 창이 되어 우리를 불러들인다. 저 푸르른 무한 위로 날아오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과연 언제까지 이런 멋진 하늘을 품을 수 있을까? 뉴스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 우크라이나의 전쟁터를 보여주었다. 인간의 욕망과 광기가 푸른 하늘마저 집어삼킬 듯했다. 저 무고한 하늘이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일찍 태어난 게 다행이네." 바다는 내게 속삭였다.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는 마치 지구의 오래된 숨결 같았다. 물결은 기억을 품고, 모든 것을 삼키고, 다시 토해내며 끊임없이 순환한다. 바다는 알고 있다. 우리의 미래를, 대지의 운명을.

어제 잠깐 본 영화에서 그려진 미래의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다. 붉은 노을도, 푸른 새벽도 없이—단지 회색의 그라데이션만이 펼쳐진 세상. 그곳에서 사람들은 색채의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잃어버릴 미래를 미리 보여주듯이.

내가 쓰고 있는 대하소설 <삶과 죽음의 노래>의 미래 세상도 회색뿐이다. 작가로서 그려내는 이 세계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어쩐지 이미 우리는 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태어나 기억하는 하늘은 회색이었다. 짙은 회색 혹은 옅은 회색. 그것뿐이었다. 파랑과 붉음. 혹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하늘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절대로 믿지 않았다. 심지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릴리안 나리>의 <호모 사피엔스 기록> <대멸종 편> 13장 66절)

내가 즐겨 듣는 음악도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가사를 담고 있다. 쿤(Kwoon)의 'Schizophrenic'은 아름다운 선율로 세상의 균열을 노래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어떻게 그토록 깊은 상처를 품을 수 있는지. 아름다움과 고통이 공존하는 모순—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소설 본문

현실의 가장자리와 몽환의 심연이 뒤섞인, 설명하기 힘든 감각의 소용돌이였다. 나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소리의 잔해들이 내 안으로 흘러들었다. 도시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웅성거림, 날카롭게 공간을 가르는 경적, 절망과 긴급함이 뒤섞인 사이렌 소리, 누군가의 다급한 발자국, 허공을 가르는 외침,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흐느낌, 그리고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의 속삭임까지. 이 모든 소리의 파편들은 부유하는 먼지처럼 나의 의식 주변을 하염없이 맴돌았다. 어떤 것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감각을 찔렀고, 어떤 것은 아득한 심해의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울렸다. 마치 머나먼 바다, 그 짙푸른 암흑 속에서 길 잃은 고래가 부르는 고독한 노래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롭게 진동하는 소리들이었다.

이것이 지나간 시간의 퇴적물인 기억인지, 잠결에 헤매는 꿈인지, 열에 들뜬 뇌가 만들어낸 환영인지, 아니면 냉엄한 현실 그 자체인지, 혹은 이 모든 것이 뒤엉킨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의식의 파편들은 깨진 거울 조각처럼 흩어져 있었고, 각각의 조각은 저마다의 빛을 희미하게 반사할 뿐, 온전한 상을 맺지 못했다. 생각과 생각 사이를 잇던 논리의 실타래는 무참히 끊어져 있었다. 마치 장난기 많은 신이 시간이라는 필름을 제멋대로 잘라내어 순서 없이 이어 붙인 듯, 순간들은 예고 없이 절단되고 다음 순간으로 건너뛰었다. 소음과 소음 사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정적이 늪처럼 괴어 있었고,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속절없이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러나 이 짙은 어둠 속에서도, 의식의 폐허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로서 존재했다. 조각나고 해체된 의식의 파편들, 그 한가운데서 자아라는 희미한 불꽃은 위태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꺼질 듯 가냘펐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 미약한 불꽃에 의지하여, 나는 시간을 인지하려 애썼고 공간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시간은 더 이상 강물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그것은 뱀처럼 구부러지고, 꽈배기처럼 뒤틀렸으며, 때로는 데칼코마니처럼 자기 자신 위에 겹쳐지기도 했다. 공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었다. 마치 밀랍처럼 녹아내리거나 물처럼 유동하며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었다. 눈앞의 벽은 거대한 생명체처럼 미세하게 숨을 쉬었고, 천장은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듯 부드럽게 일렁였다. 나의 지각은 현실의 법칙에서 벗어나 표류하고 있었다.

메마르고 뒤틀린 내 몸, 그 지층 깊숙한 곳에서부터 고통이 아우성치며 들려왔다. 고통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목소리를 가졌고, 인격을 지녔다. 때로는 날카로운 비명으로 고막을 찢을 듯 울부짖었고, 때로는 땅 밑에서 울려오는 낮은 신음처럼 끈질기게 나를 불렀다. 삐걱거리는 뼈마디마다, 경직된 근육 섬유마다,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 말단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음색과 리듬으로 아픔을 노래했다. 그것은 처절하고 서글픈 교향곡이었다. 나는 갈라지고 버석거리는 입술을 힘겹게 벌려, 폐부 깊은 곳의 공기를 끌어올려 희미한 숨을 뱉어냈다. 그 숨결에 음성을 실어 가꾸어 보려 애썼다.

"물…. 제발… 물…."

처음에는 그저 목구멍 안쪽에서 일어나는 미약한 공기의 진동에 불과했다. 의미 없는 소음, 혹은 단순한 생리적 반응에 가까웠다. 그러나 반복될수록 그 떨림은 점차 형체를 갖추어 갔다. 쉰 목소리는 조금씩 갈라진 틈을 메워가며 단어의 윤곽을 더듬었다. 마치 오랫동안 연주되지 않아 먼지가 쌓이고 줄이 녹슨 악기를 다시 조율하듯, 내 몸은 서서히 소리 내는 법을,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나의 의지가 희미한 빛처럼 신경계를 타고 흘러, 성대를 진동시키고 입술을 움직여 마침내 의미를 지닌 소리로 발화되었다. 그 한 마디는 메마른 사막에서 발견한 샘물처럼 간절했다.

나는 흩어진 의지를 그러모아 내 육체를 통제하려 필사적으로 애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의지'라는 개념이 마른 땅에 스며드는 물처럼 천천히 몸 안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를 까딱이는 것조차 태산을 옮기는 일처럼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신경의 명령이 근육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한 아득한 단절감.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마침내 손가락 하나를 폈다가 오므렸다. 그 지극히 작고 미미한 움직임, 그 작은 승리에서 나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기쁨의 파문을 느꼈다. 다음은 고개였다. 뻑뻑하고 무거운 머리를 아주 천천히 옆으로 돌렸다. 마치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석상이 마법처럼 생명을 얻어 처음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목뼈 마디마디에서 저항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한 움직임, 한 움직임마다 나의 의지는 조금씩 육체의 지배권을 되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온몸의 근육을 격렬하게 뒤틀며 몸을 뒤척였다. 그 움직임과 함께,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아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처음 마주한 것은 빛이었다.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시신경에게 그것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강렬함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타는 듯한 고통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시야는 뿌옇게 흐려져 있었고, 세상은 초점이 맞지 않는 수채화처럼 색채의 얼룩들로 번져 보였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통증과, 서서히 제 궤도를 찾아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곧추세웠다. 마치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혹은 깊고 어두운 물속에서 수면 위로 힘겹게 부상하는 잠수부처럼, 나의 의식은 아주 느리지만 꾸준히 선명도를 더해갔다.

흐릿한 시야의 가장자리, 곁눈으로 한 여자를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어렴풋한 윤곽에 불과했다. 하지만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려 애쓰자 점차 그녀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누구지? 기억의 거대한 도서관, 그 육중한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직은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망각의 먼지만 자욱할 뿐이었다. 공간의 틈새는 부유하는 먼지 입자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했다. 아마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일 터였다. 그 빛줄기 속에서 춤추는 먼지들 사이로, 여자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슬픔을 담은 작은 호수처럼, 창밖의 빛을 담아 위태롭게 반짝였다.

갑자기, 예고 없이 감정의 격랑이 나를 덮쳤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압도적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감정의 수문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처럼, 이름 모를 슬픔과 고통의 홍수가 내 안으로 세차게 쏟아져 들어왔다. 왜 이렇게 심장이 아려오는 걸까? 왜 그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깊은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걸까? 이 감정의 근원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조용히 손을 뻗어, 나의 차가운 이마와 꺼칠한 볼, 그리고 가슴팍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은 놀랍도록 따뜻했다. 그것은 단순한 체온 이상의 온기였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한, 영혼 깊은 곳에 각인된 기억처럼 깊고 익숙한 따스함이었다. 그녀는 나의 혼란스러운 상태나 명백히 불편해 보이는 내 모습에는 거의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오직 나의 존재 자체에, 내가 숨 쉬고 눈을 떴다는 사실에 온 마음을 쏟아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걱정과 안도, 기쁨과 슬픔이 복잡하게 뒤섞인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우리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고 깊은 연결의 끈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홉뜨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이야기가 응축되어 있었을까?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운 기다림, 얼마나 사무치는 두려움, 그리고 얼마나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었을까? 그녀의 눈가에서 관자놀이까지 희미하게 번져 있는 검은 마스카라 자국이 그녀의 하얀 얼굴 위에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마치 밤새 흘린 눈물의 흔적, 혹은 지독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새겨진 훈장처럼 보였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기묘한 감정들이 뒤죽박죽 엉켜 소용돌이쳤다. 지독한 낯섦과 동시에 사무치는 친밀함, 극도의 혼란과 찰나의 명료함, 이유 모를 공포와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이 한 공간 안에서 위태롭게 공존했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살아온 여러 삶의 기억들이 예고 없이 한꺼번에 내 안으로 밀려들어와 충돌하는 것 같았다. 문득, 창가에 놓인 작은 유리 화병에 꽂힌 보랏빛 라벤더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청초한 색과 은은한 향기는 희미하게나마 어떤 기억의 편린을 수면 위로 떠올렸다. 안개처럼 흐릿한 어떤 장소, 어떤 특별했던 순간, 어쩌면 누군가와 나누었던 중요한 약속 같은 것. 하지만 그것은 붙잡으려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신기루 같았다.

째깍, 째깍, 째깍…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정적을 깨고 공간을 규칙적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혼돈 속에서 멈춰버렸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 현실의 좌표를 알려주는 등대의 불빛 같았다. 틱, 톡, 틱, 톡. 그 단조로운 소리 하나하나가 흩어진 현실의 조각들을 끌어모아 제자리에 맞추는 망치 소리처럼 느껴졌다.

나의 잃어버린 기억들이, 혹은 기억을 가장한 환상들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꼼지락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형체 없는 희미한 그림자, 혹은 잡음 섞인 속삭임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윤곽을 드러내고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기억의 파편들은 마치 거대한 퍼즐 조각처럼, 아직은 전체 그림을 알 수 없지만,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 서로 맞물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단순한 영상이나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나의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고, 세포 하나하나에, 신경 말단 하나하나에 다시 깃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감촉, 냄새,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이 기묘한 환상들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에 색을 입히고, 나름의 논리로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은 마치 산산조각 난 나 자신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 다시 빚어내는 고통스럽고도 신성한 여정 같았다. 기억의 조각들은 때로는 눈부시게 선명하게 나타났다가도, 다음 순간 안개처럼 흐릿하게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은 여전히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침대 옆 의자에서 몸을 조금 움직여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나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치 그녀의 모든 몸짓, 모든 숨결 속에 내가 알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 혼돈 속에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실체처럼 느껴졌다.

나는 생각의 단편들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았다. 그렇게 조립된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닐 터였다. 어딘가 뒤틀리고, 어딘가 비어 있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재구성된, 그다지 습관적이지 못한 비정형의 인간. 마치 지진으로 무너진 오래된 성을 잔해 속에서 쓸만한 돌들을 골라내어 다시 쌓아 올리는 것과 같았다. 완성된 모습은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으리라. 어쩌면 더 강하고 완전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조차 알지 못하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그 모든 혼란스러운 환영과 기억의 파편들이, 어쩌면 내 삶을 새롭게 조형하고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의식의 표면에 새기고 또 새겼다. 각 기억의 조각, 각 감정의 파동, 각 생각의 흐름은 새로운 나를 정의하고 형성하는 데 기여할 터였다. 그것은 마치 깨진 유리 조각들을 모아 빛 속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모자이크 예술품을 만드는 과정과도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따금, 과거의 어떤 순간들에 만끽했던 지극한 행복감의 조용한 속삭임이 파문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아주 멀리, 시간의 강 저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 같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천진한 웃음소리, 가슴 떨렸던 첫사랑의 설렘,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의 벅찬 기쁨, 혹은 그저 평온한 일상 속에서 느꼈던 따스함 같은 것들. 그 기억들은 광활하고 어두운 내면의 밤하늘에 드문드문 떠 있는 작은 별들처럼, 희미하지만 영롱하게 빛나며 길을 비춰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익숙했다. 깊고 따뜻한 눈빛, 입가에 머무는 희미한 미소의 흔적, 내 살갗에 닿았던 부드러운 손길. 모든 것이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메아리처럼 울려왔다. 그러나 단 하나, 그녀를 부르는 이름만은 두꺼운 기억의 안개 속에 가려져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득, 차가운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토록 소중하고 익숙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의 문을 미친 듯이 두드려 보아도, 그녀의 이름은 깊은 침묵 속에,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 감춰져 있을 뿐이었다. 그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생긴 공백은 마치 내 영혼 한가운데에 뚫린 거대한 구멍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망각의 공포, 존재의 소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혼란 속에서, 나는 문득 그녀가 오래전 어느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림 속 집시 소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신비로운 미소를 지녔던 소녀. 그녀의 얼굴 어딘가에서 나는 그 그림 속 소녀의 아련한 흔적을 발견한 듯했다. 아니면, 이것 역시 혼돈에 빠진 내 마음이 만들어낸 덧없는 환상일 뿐일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시간은 여전히 제멋대로 흘렀다. 때로는 쏜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가 하면, 때로는 끈적한 꿀처럼 느리게 흘러 영원히 멈출 것 같기도 했다.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시시각각 그 각도와 색깔, 그리고 형태를 바꾸며 공간의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나와 그녀, 그리고 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공간. 우리는 마치 거센 시간의 흐름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고립된 작은 섬처럼, 그곳에 존재했다.

그때, 그녀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마치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음성 속에는 분명한 따뜻함과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폭풍우 속에서 길을 잃은 배가 발견한 등대의 불빛처럼, 나를 현실로, 바로 이 순간으로 단단히 붙잡아 매는 닻과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나는 안개 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금 더 선명해진 의식의 땅을 밟았다.

모든 것이 아주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흩어졌던 기억의 조각들, 혼란스러웠던 감각의 파편들, 희미했던 존재의 의미들이 마치 거대한 강물의 보이지 않는 조류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흘러, 어떤 예측할 수 없는 종착점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주 조금씩 '나' 자신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내 곁의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무한한 인내와 침묵의 사랑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 혼돈 속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비록 아직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내 삶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만큼은 내 온몸의 세포가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방 안에 흐르는 깊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갔지만, 그것은 소리가 아닌 눈빛과 숨결로 이루어진 대화였다. 깊은 이해와 연민, 그리고 변치 않는 애정이 그 침묵 속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이 모든 혼란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어떤 기이하고도 깊은 안정감을 느꼈다. 마치 아주 길고 험난했던 여행 끝에, 마침내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따뜻한 집에 돌아온 듯한, 그런 평온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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