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by 남킹

남자

갓난아이가 청춘을 지나 중년의 문턱에 이르는 시간,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 제 흔적을 지우고 다시 비가 되어 산으로 돌아가기를 세 번 거듭하는 장구한 세월.

그 묵직한 시간의 퇴적물을 등껍질처럼 이고, 나는 마침내 다시 이곳, 지독한 그리움의 발원지이자 내 존재의 뿌리가 내린 땅에 섰다.

시간이라는 절대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이곳 골목과 바람 앞에서는 그 위엄찬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인 듯했다. 언덕배기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각인된 그 빛깔, 바로 그 색조를 조금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었다.

잿빛 하늘을 지붕 삼아, 헤아릴 수 없는 깊고 검푸른 속내를 감춘 채, 낮은 신음처럼 느릿하게 울렁이는 바다. 그 바다를 향해, 운명의 불가해한 경로처럼 뱀처럼 구불거리며 이어지던 좁디좁은 골목길은, 오랜 세월 주름 하나하나에 이야기를 새겨 넣은 노인의 얼굴처럼 아프도록 익숙했다.

길섶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지난 삼십 년의 햇살과 비바람을 양분 삼아 훌쩍 키가 자라 있었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은 옛 친구의 변치 않은 우정처럼 반가웠다.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이고 선 채 더욱 깊은 빛깔로 낡아버린 담벼락들은 허물어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 위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는 희미한 속삭임처럼 그 시절의 정취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바람이 담벼락의 거친 표면을 스칠 때마다, 오래된 기억의 편린들이 먼지처럼 피어오르는 듯했다.

이것은 평생을 사무치게 그리워했고, 메마른 사막의 여행자가 물을 갈망하듯 목마르게 갈망했던 귀향이었다.

꿈결에서도 수없이 반복했던 풍경, 내 젊음의 한 조각이 영원히 박제된 듯한 이곳. 그러나 막상 추억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자, 재회의 뜨거운 감격보다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느껴지는 처연한 회한의 무게가 납덩이처럼 심장을 짓눌렀다.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미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불안한 나그네처럼, 내 가슴은 이유 모를 슬픔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기억들이, 예고 없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마음의 표면 위로 흘러내려 발밑에 위태롭게 쌓여갔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신경을 찌르는 듯한 감각. 저 멀리, 바다 너머 수평선 위로 노을이 핏빛처럼 붉게 번져가는 풍경은 눈물이 날 만큼 처연하게 아름다운데, 어찌하여 내 가슴속 풍경은 끝없는 가뭄에 시달리는 메마른 사막처럼 이토록 황량하기만 한가.

나는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한 번의 비겁한 도피, 그 치명적인 결정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내 삶의 모든 뒤틀림과 공허는, 바로 그 순간, 그 지점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돌이킬 수 없다는 자각은 쓰디쓴 담즙처럼 목구멍으로 역류했다.

무거운 상념과는 별개로, 발길은 길들여진 짐승처럼 의지를 앞질러, 오래전부터 정해진 길을 따르듯 익숙한 동선을 그리고 있었다. 골목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담벼락의 얼룩 하나하나까지도 어제 본 것처럼 생생했다. 그날처럼 바람은 살을 에는 듯 매섭게 불고, 해 질 녘 인적 드문 거리는 고요함 속에 깊은 적막감을 품고 있었다. 삼십 년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강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어느 특정한 지점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는 듯한 기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오래되어 빛바랜 필름의 한 장면이, 현실이라는 스크린 위에 아무런 변형 없이 고스란히 복제되어 영사되고 있는 것처럼. 그 아득하도록 먼, 그러나 바로 어제처럼 느껴지는 토요일 오후, 나는 분명 저 육교 위, 차가운 철제 난간에 기대어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의 형상, 희미하게 떨리던 어깨와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을 가진 젊은 날의 내가, 아직도 그림자처럼 저 난간에 기대어 끊임없이 서성이고 있을 것만 같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아찔한 착각.

그리고 나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 시간 속에 갇혀 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토요일 오후의 지독한 기다림 속에.

운명이란 얼마나 무심하고도 집요한 존재인가. 그것은 때로 무표정한 가면을 쓴 채 미련스러울 만큼 담담한 현실의 표면 아래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가, 어느 순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삶의 물길을 틀어버린다. 거대한 강물이 숙명처럼 드넓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듯,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흐름이 존재한다지만, 그 유장한 여정 위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예기치 못한 굽이와 예측 불가능한 암초, 소용돌이치는 급류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웅덩이를 만나게 되는가.

내 인생의 가장 깊고 어두웠던 소용돌이, 나를 희망의 정점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던 거대한 회오리는, 뜻밖에도 한 통의 전화, 그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차갑고 건조한 기계음 같은 음성에서 시작되었다.

오래도록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 놓고 잊고 지냈던, 아니, 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던 대학 행정실이었다.

한 치의 감정 동요도 없이, 그저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듯한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망치처럼 귓전을 파고들었다. 한때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으나 결국 내 삶의 항로를 무참히 뒤틀어버렸던 지도교수가, 마침내 파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수년간에 걸쳐 은밀하고 교묘하게 자행되어 온 부정 입학의 추악한 실체가, 곪아 터진 종기처럼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던 불법과 부조리의 거대한 굴레, 그 추악한 거래와 은폐의 역사가 낱낱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 부당함에 희생된 수십 명의 이름 속에, 흐릿하게 지워져 가던 나의 이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특별 입학 허가. 학교 측은 오만하게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며 내게 다시 돌아올 기회를 부여하겠다는, 너무 늦어버린 통보를 전해왔다.

거짓된 권력의 오만함과 정당한 자격을 갖춘 이를 향한 부당한 거절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참히 짓밟히고 조각나 버렸던 내 오랜 꿈. 젊음의 모든 열정과 시간을 바쳤던 그 순수한 갈망이, 뒤늦게나마 다시 숨 쉴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의 정원에서 그 ‘꿈’이라는 이름의 꽃은 이미 오래전에 검게 시들어 재가 되어 버린 뒤였다.

썩어 문드러진 뿌리만이 차가운 땅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죽은 꽃에, 이제 와 뒤늦게 성수(聖水)라도 부어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잃어버린 생기를 되찾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고, 가슴에는 너무나 깊고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실로 오랜만에 뜨거운 눈물을 보이셨다. 세월의 고랑처럼 깊게 팬 주름진 얼굴 위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길을 내며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한 방울 한 방울의 눈물 속에는, 아들의 오랜 좌절이 마침내 해소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쁨과 안도, 그리고 그동안 아들의 꺾인 꿈을 지켜보며 가슴속 깊이 쌓아 올린 어머니의 오랜 한(恨)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와 가슴에 품었던 세상에 대한 쓰디쓴 원망과 침묵의 분노를, 당신의 그 뜨거운 눈물로 남김없이 씻어내려는 듯,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내 거칠고 투박한 손을 말없이 꼭 쥐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셨다.

"이제… 이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내 아들아.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을꼬."

어머니의 그 간절한 말씀이, 그 희망으로 가득 찬 위로의 언어가, 오히려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텅 빈 가슴을 더욱 깊숙이 후벼팠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잔인한 고통의 확인 사살과 같았다.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돌아갈 수 없다. 무너진 성벽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다시 쌓아 올릴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폐허 더미 아래 겹겹이 묻혀버린 시간의 파편들과 영혼의 조각들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성을 짓는다 한들, 그것은 결코 예전의 그 성일 수 없으리라.

'어머니,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돌아갈 자격도, 의지도 없습니다. 제 꿈은 이미 죽었습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그 차가운 말들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목구멍에 걸려 숨을 막히게 했다. 어쩌면 애초에 나의 꿈이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지만 결코 붙잡을 수 없는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허위와 위선, 그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겉치레들은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차이는 돌멩이보다도 가볍고 무가치한 것이었다.

그 당연한 진실을 깨닫기 위해, 나는 얼마나 길고 어두운 시간을 절망 속에서 헤매었던가. 젊은 날,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무겁게 짊어졌던 이상과 순수한 열정은, 한순간의 충격적인 배신 앞에서 와르르,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나는 그 잔해의 무게에 짓눌려 실로 오랫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세상이 나를 더 이상 찾지 않기를. 잘못 걸려 온 전화처럼, 누군가 내게 말해주기를.

"아, 죄송합니다. 번호를 잘못 누른 모양입니다. 당신을 찾으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희미해지기를. 완벽한 투명인간이 되어, 그저 이름 없는 바람처럼 이 낯설고도 익숙한 도시의 거리를 정처 없이 스쳐 지나가고 싶었다. 누구의 기억 속에도 머물지 않고,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는 그런 무명의 삶. 그것이 폐허 위에 선 지금 이 순간, 내가 갈망하는 전부였다.

그녀, 미자는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퇴근을 했다. 그녀가 일하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낡은 사무실 건물이 늘어선 그 거리를, 아무런 목적 없이 무심히 지나치던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건물 입구에서 나서는 그녀를 보았다. 햇살 아래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도 묘한 생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첫 만남 이후로, 나는 매주 토요일이면 어떤 종교적 의식을 치르듯, 강박적으로 그 거리를 배회했다.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리는 것처럼,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걷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무성한 가로수 이파리들이 초여름의 싱그럽고 상쾌한 바람결에 파르르 몸을 떠는 이 도시의 한복판, 낡은 전당포 간판과 빛바랜 약국 건물이 마주 보이는 낡은 육교 위에서, 후드가 달린 낡고 빛바랜 카디건을 무심하게 걸친 그녀를 발견하고는, 오랜 지인을 만난 듯 희미하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처음 얼마간은, 그저 멀찍이서 그녀의 존재를 관망하기만 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거리를 재며 걷는 그녀의 보폭, 바람결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의 유려한 곡선, 때때로 무엇인가를 찾는 듯, 혹은 그저 허공을 응시하듯 무심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섬세한 옆얼굴.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 어떤 소리도 의미도 없는 무채색의 풍경처럼, 내 메마르고 공허한 시선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 역시 나의 존재를, 이 반복되는 우연 속에 숨겨진 희미한 의도를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을 가장한 우리의 치밀하게 연출된 만남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어느 흐린 토요일 오후, 그녀는 먼저 내게 수줍은 듯 옅은 미소를 건넸다. 얼어붙었던 강물이 봄 햇살에 녹아내리듯, 그 작은 미소 하나가 우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연인들처럼, 혹은 오래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친구들처럼, 아무런 구체적인 약속이나 언어적 합의 없이도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도시의 뒷골목,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후미진 곳들을 정처 없이 헤맸다.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둘씩 졸린 눈을 비비며 불을 밝히고, 저녁의 어둠이 짙은 벨벳처럼 도시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을 때까지.

우리의 발길은, 나침반의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듯, 늘 그곳으로 향했다. 도시의 번잡함에서 한 걸음 비켜선 외곽, 푸른 바다가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태롭게 자리한 낡고 허름한 모텔.

'바다장'이라는, 어딘가 촌스럽고 서글픈 이름의 모텔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늘 같은 방, 바다가 보이는 창이 있는 곳을 찾았다. 방에 들어서면, 우리는 오래전부터 정해진 연극의 대본을 따르듯,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말없이 샤워를 했고,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내 서로의 맨몸을 게걸스럽게 탐했다.

격렬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섹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몸은 희미한 달빛이나 창밖 네온사인 불빛을 받아 고대 조각상처럼 신비로운 윤곽을 드러냈다. 둥글게 솟아오른 비너스의 언덕, 땀과 체액으로 물기에 젖어 희미한 빛을 발하는 서혜부와 비밀스러운 음부, 그리고 회음부를 지나 항문에 이르는 은밀하고 관능적인 곡선이 어둠 속에서 흐릿하지만 강렬한 존재감으로 드러났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분홍과 연한 갈색, 그리고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짙은 회색의 미묘하고도 원초적인 색채의 향연.

그 태초의 풍경과도 같은 관능 앞에서,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내 안의 야생적인 욕망이 뜨거운 용암처럼 용솟음쳤다. 강렬한 몰입의 순간. 나는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놓고, 거칠고 우툴두툴한, 그러나 놀랍도록 부드러운 그곳에 입술을 묻었다. 희미하게 풍겨오는, 살갗과 체액이 뒤섞인 야릇하고 비릿한 지린내. 그러나 그 냄새마저도 도착적이라 할 만큼 강렬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길들여지지 않은 본능적인 욕망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지배하는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불안,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오직 이 순간의 감각에만 집중했다.

그녀의 피부 위를 땀과 함께 번들거리며 흘러내리는 체액의 미끄러운 감촉. 숨 막힐 듯 끈적하게 달라붙는 살갗과 살갗의 마찰음. 무언가를 갈망하듯, 혹은 고통스러워하듯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그녀 몸의 작은 구멍들. 모든 것이 지극히 경이로우면서도 동시에 지독하게 허무한, 이성이 배제된 순수한 본능만이 빚어낸 원초적인 행위의 반복.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처럼 꺽꺽거리는 신음과 함께 뜨거운 액체를 그녀의 몸 안에 뱉어냈다. 눈앞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듯한 찰나의 강렬한 쾌감. 그리고 그 뒤를 어김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오는, 약간의 자기혐오와 빈정거림마저 뒤섞인 듯한 길고 나른한 공허함.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처럼 이 깊고 서늘한 허무가 짙은 안개처럼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삶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슬픔과 피로감만이 무겁게 내려앉을 뿐이었다.

여자는 격렬했던 행위의 여운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녀가 곁에서 세상모르고 평온하게 숨 쉬는 동안, 나는 홀로 깨어 뜬눈으로 천장의 얼룩을 세거나,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불 꺼진 풍경과 짙은 어둠을 응시했다. 잠든 그녀의, 단단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등선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가슴 한구석이 이유 없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연민일까,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슬픔일까.

나는 소리 없이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가로 다가갔다. 밤새 꺼지지 않는 술집의 붉은 네온사인 불빛이 물감처럼 번져 스며든 낡고 차가운 창턱에 팔꿈치를 기댔다. 양 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창밖을 세차게 때리는 빗줄기와 울부짖는 듯한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는 예리한 사선으로 맹렬하게 내리꽂히며 길가의 웅덩이를 무수히 두드렸고, 바람은 낡은 창틀을 붙잡고 흔들며 밤새도록 누군가의 흐느낌처럼 애절하게 울었다.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감정들을 대신 토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은 거칠고 격렬했다.

나는 그 끝없는 소란 속에서 아주 작은 한 줌의 고요와 평화를 갈망했지만, 정작 내 안의 고요해야 할 공간은 더 크고 깊은 내면의 소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두 귀를 틀어막아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과거의 목소리들. 후회와 자책,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거대한 파도가 되어 끊임없이 가슴 벽을 두드려대는 불안과 회한의 소리 같은 것. 그것들은 결코 나를 잠들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다시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깊은 잠에 빠진 그녀의 얼굴은 놀랍도록 평화로워 보였다. 세상의 모든 근심과 고통을 잊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무방비한 모습. 그녀가 깨어 있을 때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가면을 벗은 듯한 솔직한 표정이었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희미하게 맺혀 있는 듯도 했다. 그녀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 꿈속 풍경은 이곳처럼 황량할까, 아니면 따뜻하고 평화로울까. 혹시, 아주 만약에라도, 그 꿈속에는 내가 존재할까.

나는 아주 천천히,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녀의 온기를,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가운 내 손가락 끝이 그녀의 따뜻한 피부에 닿기 직전, 나는 불에 덴 듯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나의 서툰 손길에 그녀가 잠에서 깨어날까 봐 두려웠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두려움. 나의 손길이 닿는 순간,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이었던 것처럼, 그녀가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까 봐. 이 위태롭고 불안정한, 그러나 유일한 위안처였던 이 꿈같은 관계가 산산조각 나 버릴까 봐. 나는 지독히도 두려웠다. 이 공허함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고, 그것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여자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육교 위.

우리의 약속은 언제나 언어 이전의 암묵적인 것이었다. 철새가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동하듯, 우리는 정해진 요일, 거의 정해진 시간, 늘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고, 나란히 걷고, 익숙한 모텔로 향하는, 침묵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그 견고하면서도 위태로운 규칙. 그 무언의 약속이 깨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익숙한 육교 위, 차가운 철제 난간에 기대어, 그가 늘 나타나던 길목, 낡은 상점들이 늘어선 거리의 끝을 향해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서성였다. 쉴 새 없이 오가는 버스와 승용차들이 게걸스럽게 내뿜는 매캐한 매연 사이로, 저녁의 짙고 서늘한 바람이 훅훅거리며 맨살이 드러난 얼굴과 목덜미를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아침에 정성껏 매만졌던 내 머리카락을 그 거친 바람이 장난치듯 사정없이 흩트리고, 얇은 카디건 옷자락을 불안하게 파닥거리게 만들었다.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내 마음의 풍경을 그대로 비추는 잔인한 거울처럼.

10분, 20분, 그리고 마침내 30분… 시간은 비웃기라도 하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마른 모래알처럼 속절없이, 무심하게 흘러내렸다. 나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원을 그리는 붉은 초침의 냉정한 움직임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가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은 적은 간혹 있었지만, 이렇게 기약 없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오랫동안 나를 혼자 기다리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시간이 속절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흘렀을 때, 나는 마침내 그가 오늘 오지 않을 것임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차갑고 명징한 슬픔과 함께 어렴풋이 직감했다.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다리는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시멘트처럼 무겁게 굳어 있었고, 발걸음은 쉽사리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 행위 자체가 나에게 주어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의무인 것처럼, 혹은 아주 오랫동안 반복해 온 일종의 종교적 의례, 혹은 공허한 제스처인 것처럼. 어쩌면 나는 기다림 그 자체에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무거운 체념과 함께, 혼자서 터덜터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우리가 함께 가던 그 낡고 초라한 모텔, 늘 우리가 함께 밤을 보내던 그 방으로 무의식적으로 향했다. 바다가 희미하게 보이는 창문이 있는 405호실. 어둑하고 퀴퀴한 냄새가 감도는 로비의 낡은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늘 보던 그 젊은 남자 직원이 나를 보더니, 평소와 같은 그 익숙하고 어딘가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살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숨길 수 없는 의아함과 노골적인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 속에서, 나는 내가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의 눈에 비칠지를 상상하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 오늘은… 혼자세요? 그분은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심하게 툭 던져진 그의 질문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와 내 가슴 한복판에 깊숙이 박혔다. 그렇다, 나는 혼자였다. 어쩌면 나는 언제나, 늘 혼자였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엄연하고 잔인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그와의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만남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을 뿐. 그와의 만남은, 깊은 상처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강력하지만 일시적인 마취제와 같았을 뿐이다. 마취가 풀리면 고통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는 법이다.

"아… 네. 그 사람이… 갑자기 좀 바쁜 일이 생겨서…. 제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어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렇게 구차하고 서툰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고 있는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이 한심하고 비참했다. 대체 왜 이런 바보 같은 변명을 하고 있는 걸까. 이 낯선 젊은 청년에게 나의 구구절절한 사정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 순간, 그가 나를 동정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토요일 저녁, 화려한 도심의 불빛 속에서 혼자 싸구려 모텔 방을 찾아 헤매는 서른 넘은 여자라는 사실, 어쩌면 방금 이름 모를 남자에게 버림받았을지도 모르는 초라한 여자라는 그 명백한 사실이, 참을 수 없는 깊은 수치심으로 다가와 나를 짓눌렀다.

"아… 네, 그러시군요." 청년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서둘러 낡은 열쇠 꾸러미에서 405호실 열쇠를 찾아 건넸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노골적인 호기심과, 어쩌면 일말의 값싼 동정심 같은 것이, 억지로 지어 보이는 듯한 싱긋 웃는 표정 뒤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는 아마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본 듯, 내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뒷모습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훔쳐보고 있었으리라.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또 얼마나 처량하고 초라하게 보였을까.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런 서툴고 어설픈 변명 따위는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당당하게 혼자 왔다고 말했어야 했다. 삐걱거리는 낡은 엘리베이터 문이 육중하게 닫히는 그 순간, 뒤늦은 후회가 쓰나미처럼 거세게 밀려왔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내 안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직감이, 불길한 예언처럼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 만남에서 보았던 그의 공허하고 텅 빈 표정, 무언가 결심한 듯했던 의미심장한 말투, 그리고 그의 눈빛 깊은 곳에서 언뜻 비쳤던 떠나려는 자의 서늘한 그림자,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이 갑작스러운 이별을, 아니, 어쩌면 예정된 결말을 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건…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던 거잖아. 이 관계는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바보같이 뭘 기대했던 거야, 도대체.'

나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자책과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뒤섞여 속에서 용암처럼 뜨겁게 들끓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왜 하필 그를 만났고, 왜 그의 정체 모를 슬픔에 끌렸으며, 왜 과거도, 미래도 모르는 남자와 이런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인 관계를 시작했으며, 왜 이토록 허무하게 끝날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미련하고 어리석게 매달리고 있었던가. 내가 그에게서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육체적인 위안이었을까? 아니면 그 너머의 어떤… 깊은 연결, 이해, 혹은 구원? 내가 진정으로 갈망했던 것은… 어쩌면 나조차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지도.

익숙한 405호실의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늘 맡았던 희미한 곰팡이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그러면서도 그의 체취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듯한 냄새와 함께, 안방처럼 지독하게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풍경이 나를 맞이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무거운 발을 들여놓는 그 짧은 순간부터, 아주 오래전에 이곳 어딘가에 스며들었을 법한 누군가의 낯선 향기가, 혹은 잊혀진 슬픔의 잔향이 기억처럼 간헐적으로 피어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긴 삶과 시간의 끈이 존재해서, 이 비좁고 낡은 공간과 현재의 나, 그리고 이곳을 거쳐 갔을 무수한 과거의 누군가들이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한 기묘하고 서늘한 느낌. 나는 어쩌면 내가 속한 이곳, 이 거대하고 무심한 도시에 단단히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나약하고 무력한 포로인지도 몰랐다.

나의 지긋지긋한 직장,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이름 모를 그 남자, 우리가 위태로운 비밀을 공유하던 이 낡고 허름한 여관, 내가 돌아가야 할 작고 초라한 집, 그리고 나를 둘러싼 이 거대하고 소란스러운 회색빛 도시. 이 모든 것들은 겉보기에는 한없이 번잡하고, 지나치게 복잡하며, 끊임없이 무질서하게 꿈틀대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지만, 그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표면을 한 꺼풀만 살짝 벗겨내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언제나 사무치게 외롭고, 뼈 속까지 스며드는 서늘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텅 빈 공동처럼 썰렁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모든 젊음과 기억이 깃든 이 도시는, 단 한 번도 나를 따스하고 너그럽게 품어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거대한 회색빛 감옥의 벽처럼 나를 사방에서 에워싸고, 보이지 않는 사슬로 숨 막히게 옥죄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 익숙한 감옥 같은 도시를 떠날 용기가 없다. 마음은 늘 지구 반대편,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이국의 낯선 해변이나 고대의 유적이 잠든 신비로운 도시에 서 있는 나를 꿈꾸지만, 나의 현실은 지독히 무기력하고,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이 깊고 슬프며, 만성적인 통증처럼 늘 은근하게 아프고,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주 작은 외부의 자극에도 놀란 새처럼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과 실체 없는 정신적인 압박감에 늘 주눅이 든 채,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상처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의 상상 속에서 단 한 발짝도 자유롭게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와 미래라는 무거운 족쇄에 발목이 묶인 채.

서른. 나는 막연히 그 나이가 되면 내 인생에 뭔가 근사하고 극적인 변화가 찾아올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서른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좀 더 성숙하고 단단하며, 세상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내가 되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시간은 그런 나의 기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속절없이 흘러, 나는 여전히 과거와 똑같은 지긋지긋한 자리에 서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숨 막히는 중압감으로 다가오는 회사에서의 단조롭고 의미 없는 업무, 창밖으로 보이는 늘 똑같은 출퇴근길의 무표정한 풍경,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그 남자를 만나 텅 빈 위안과 찰나의 쾌락을 구걸하는 공허한 일상. 이것이 과연 내가 한때 그토록 간절히 꿈꾸고 소망했던 삶의 모습이란 말인가.

창밖은 어느새 마지막 남은 빛을 토해내듯 핏빛처럼 붉게 물들고 있었다. 노을은 슬프도록 장엄했다. 바닷바람은 더욱 거칠고 사납게 낡은 창문을 두드렸고, 그 너머로 보이는 저녁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투명하고 깊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먼지 쌓인 커튼을 힘겹게 젖히고 삐걱거리는 창문을 열어, 차갑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섞인 신선하지만 슬픈 공기를 폐부 깊숙이 길게 들이마셨다. 갑자기 숨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졌다. 광활한 대지를 가르며 아득하게 펼쳐진 높고 푸른 하늘. 사위는 불길하리만큼 고요했고, 적막만이 무겁게 내려앉은 방 안의 정적은 유난히 깊고 처연하게 슬펐다.

나는 미련 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았다. 희뿌연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뜨거운 물이 욕조 가장자리를 넘어 타일 바닥 위로 철철 흘러내렸다. 그 뜨거운 열기가, 오랫동안 밖에 서 있었던 탓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내 피부 속으로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의 뜨거웠던 체온처럼, 그의 격렬했던 숨결처럼. 하지만 그 온기는 한순간의 착각처럼 짧았고, 이내 욕조의 물이 서서히 식어가듯, 내 마음속에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던 그를 향한 감정의 잔여물들도, 미련과 집착의 찌꺼기들도 서서히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결국 식고, 잊히고, 사라질 운명이었다.

욕조의 따뜻한 물속에 지친 몸을 깊숙이 담그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흐릿한 영상처럼, 그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세찬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오후, 육교 위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으며 멍하니 서 있던 그. 그리고 나와 마주쳤던 그의 깊고 슬픔이 어려 있던, 알 수 없는 눈빛. 모든 것은 바로 그날, 그 불가해한 이끌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 말 없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나란히 걷던 도시의 뒷골목들, 가로등 불빛 아래 길게 늘어지던 우리의 그림자, 그리고 어둠 속에서 이 낡은 모텔로 향하던 우리의 망설임 없었던, 아니, 망설일 필요조차 없었던 발걸음.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운명의 힘에 의해 이끌리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제 와 차갑게 식어버린 욕조의 미지근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그것은 결코 운명이 아니라 그저 외로운 두 존재가 만들어낸 우연의 잔인한 장난이었을 뿐이었다. 그저 지독히 외롭고 고독했던 두 영혼이 서로의 차가운 체온을 찾아 잠시 기댔던 찰나의 시간, 위태로운 위안의 순간이었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날 것임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애써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위태롭고 불안한 현실. 이제 마침내 그 예고되었던 끝이 온 것이다. 예상보다 조금 더 빨리, 그리고 조금 더 아프게.

돌이켜보면, 참으로 한심하게도, 나는 그와의 불안정하고 비밀스러운 관계 속에서 단 한 번도 결혼이나 안정적인 미래, 평범한 연인들이 꿈꿀 법한 그런 종류의 지속적인 관계를 진지하게 염두에 두거나 기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명확하고 아프게 다가왔다. 어쩌면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필사적으로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이에는 그런 종류의 밝고 희망찬 미래를 함께 그려볼 만한 최소한의 약속이나 깊은 감정의 교류 자체가 철저히 부재했다. 서로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니까. 언제부턴가 그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서늘하고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눈앞의 절벽이나 위험이 마법처럼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그 불편하고 불안한 사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찰나의 육체적 쾌락과 일시적인 위안 속으로 도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정된 관계의 끝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뜻밖에도 홀가분함이나 해방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예정된 파국, 혹은 허무한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줄 어렴풋이 알면서도 미련하고 어리석게 발을 들여놓았던 나 자신에 대한 깊은 한심함과 자기혐오, 그리고 결국에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 지저분하고 불완전하며 공허했던 관계에 대한 깊은 회의감, 나아가서는 좀 더 인간적이고 진솔하며 따뜻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마저 애초에 철저히 차단당했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기만당한 듯한 배신감과 비슷한 희미하고 서글픈 분노 같은 것이, 차가운 욕조 물 위로 스멀스멀 독버섯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우리의 만남은 대부분 무거운 침묵으로 채워졌다. 서로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한 공기 속에서 나누는 의미 없는 몇 마디의 말들. 심지어 사소한 다툼조차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였다. 서로에게 진심을 숨긴 채 입을 굳게 다문다는 것. 그것은 곧 모든 오해와 갈등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동시에,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아주 작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이해의 기회마저 시간이라는 거대하고 무자비한 망각의 장막 뒤로 영원히 내던져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느 모로 보나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이며, 결국에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방식의 관계 맺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서로에게 자신의 가장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아니, 털어놓을 수 없었다. 서로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혹은 자신의 나약함을 들킬까 봐 두려워하며,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것이 우리의 위태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하고도 필수적인 규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침묵의 갑옷을 온몸에 견고하게 두르고 서로를 마주했다.

나는 무거운 물기를 머금은 몸을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고, 싸구려 가운을 걸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모텔 복도 끝에 있는 비상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늘 그랬듯이, 혼자만의 시간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안의 소용돌이를 잠재울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면 나는 이곳, 버려진 듯한 옥상을 찾았다. 푸른 바다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이 황량하고 버려진 옥상에서 나는 비로소 가슴을 옥죄던 답답함에서 벗어나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번잡함, 위선과 기만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나만의 작은 섬, 고독하지만 안전한 피난처에 와 있는 것처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센 바닷바람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세차게 불어와 온몸을 휘감았다. 하늘은 마지막 노을빛이 스러지며 짙푸른 남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여전히 깊고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는 검푸른 해안선이 선명하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거대한 만(灣)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발밑으로는 검은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한 도시의 불빛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박혀 반짝였고,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굴곡진 언덕과 가파른 경사들이 숨 가쁘게 늘었다 줄어드는 광경이 어지럽게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갑자기 격렬하고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거대한 파도가 내 속에서 세차게 휘몰아쳤다. 눈물이 뜨겁게 솟구쳤지만, 흐르지는 않았다. 저 깊고 아득한 도시의 어둠 속 어딘가에,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치고 벗어나려 애써도 결코 건너갈 수도, 메울 수도 없는 거대한 검은 구멍들, 절망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늪.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고통의 무게가, 쇠잔해진 나의 이마 위에 차갑고 무거운 서리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거센 바람이 정신없이 젖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얇은 가운 자락을 사정없이 휘날렸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슬픔의 손이 나를 힘껏 끌어안으려는 듯한 착각. 하지만 그 격렬한 포옹은 따뜻한 위로가 아닌, 뼈 속까지 시리게 스며드는 서늘한 냉기였다.

도무지 그 깊이나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이 불가해(不可知)하고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희망과 찰나의 기쁨에 기대어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런 우리의 모습이, 그리고 나의 모습이 문득 한없이 처연하도록 불쌍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속수무책으로 뒤틀리고 끝없이 어두운 심연 속으로 가라앉던 우울하고 고통스러웠던 지난날들의 기억, 애써 잊으려 했던 상처의 흔적들이, 아직도 내 몸속 어딘가에 무거운 납덩이처럼 차갑게 응어리져 남아 있었다. 그 보이지 않는 상처의 무게가 매 순간 나를 짓눌렀고, 숨 쉬는 것조차 버겁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 지친 눈을 억지로 뜰 때마다 어깨를 짓누르는 그 거대하고 불합리한 삶의 무게감. 삶이라는 이름의 이 무겁고 고단한 짐을, 나는 과연 언제까지, 어디까지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가. 끝이 있기는 한 걸까.

문득 우리의 마지막 만남, 바로 지난주 토요일의 그가 떠올랐다. 그날따라 유난히 낯설고 멀게 느껴졌던 그의 얼굴. 어떤 진짜 감정도 읽어낼 수 없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처럼 비정형적이고 공허했던 그의 얼굴 표정을 나는 물끄러미,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그랬다. 좀처럼 속내를 읽기 어려운 모호하고 흐릿한 표정, 모든 감정을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버린 듯한 텅 빈 눈빛.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고통스러운 자기 자신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방어하려는 듯한 필사적인 몸짓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락이 왔어." 그가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깼다. 그리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어색하고 희미하게 싱긋 웃었다. 나는 그의 그런 웃음 뒤에 더 큰 고통이나 불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즐겁거나 행복할 때는 오히려 무표정했고, 깊이 우울하거나 절망적일 때, 혹은 불안할 때면 오히려 피식거리며 실없는 웃음을 흘리곤 했다. 그의 얼굴이 감정을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유일한 순간은, 우리가 서로의 맨몸을 격렬하게 탐닉할 때뿐이었다. 그때만큼은 그는 잠시나마 가면을 벗고 비로소 한 명의 상처받고 나약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때만큼은 그의 눈빛 속에 진실된 고통과 갈망, 아주 희미한 슬픔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신문사에서 먼저 연락이 왔고, 며칠 뒤에 학교에서는 나중에 연락이 왔어." 남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늘이 깊게 드리워졌다. 그의 낮게 잠긴, 메마른 목소리에는 지독한 쓸쓸함과 세상에 대한 깊은 피로감, 그리고 체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혹은 억지로 봉합해 두었던 낡은 상처가 예고 없이 다시 벌어져 붉은 피를 흘리는 것처럼, 숨길 수 없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복학하라고 하더군…. 뭐…. 가끔 뉴스에서 봤을 그런 종류의 시시한 입시 비리 같은 거야. 아주 흔해 빠진 일이지. 이번에는 내가 그 하찮은 피해자 중 하나였다는 것만 빼고는… 특별할 것도 없어."

그의 마른 입술 사이로 힘겹게 흘러나오는 말 속에는, 당연히 느껴야 할 분노나 억울함보다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깊은 체념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이 나를 더욱 슬프고 아프게 했다. 분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조차 모두 소진해버린 듯한 그의 황량하고 메마른 모습.

"그래서… 돌아갈 거야? 다시 시작할 거야?"

나는 그의 흔들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즉답 대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잠시 입을 다물고 줄곧 창밖의 깊어가는 어둠만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무언가를, 그의 진짜 속마음을, 그의 결정을, 그의 확신을, 혹은 아주 만약에라도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아주 작은 단서라도 필사적으로 찾으려고 애썼다.

"아니…."

잠시 후,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정면으로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완전한 무(無)의 표정, 지독할 정도로 텅 빈 무미건조함만이 싸늘하게 떠돌고 있었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화내지도 않았다.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홀로 짊어지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 수도자처럼, 혹은 모든 감정이 마비된 사람처럼. 하지만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는 깊은 고독감과 측은함 같은 것은 숨길 수 없었다. 그 텅 비고 공허한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선명하게 이해했다. 그의 결정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내려졌고,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그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바로 그 순간, 그가 머지않아 내 곁을, 이 도시를 떠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본 적 없었던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의 욕망을, 그 처절한 갈망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 우리 사이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는 이내 다시 기운 빠지고 시무룩한, 늘 보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빛에는 다시 깊은 피로와 세상에 대한 지독한 따분함, 그리고 희미한 자기 연민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완전히 방전되어 버린 낡은 배터리처럼 의자 등받이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걸터앉아, 마른 세수를 하듯 지친 얼굴을 두 손으로 한번 거칠게 쓱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내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듯 괴롭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무언가를 물었다. 아주 중요한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뒤의 말은, 그의 마지막 질문은 더 이상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지워버린 것처럼.

모든 기억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영사기의 필름이 툭 끊어지듯, 기억은 무수한 조각조각으로 부서지고, 단편적인 이미지들은 더 이상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로 연결되지 않았다. 한때 내 황량했던 삶을 아주 희미한 온기와 덧없는 행복감으로 채워주었던 그와의 짧고 강렬했던 시간들마저 이제는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아득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붙잡으려 할수록 더 빨리 사라져가는 신기루처럼.

어리석게도, 나는 죽음이라는 서늘하고 거대한 그늘 아래서, 이 위태롭고 불안정한 삶의 희미한 온기를 지나치게 애틋하게, 필사적으로 보듬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돌이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하등의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공허하고 파괴적인 관계였건만, 나는 그 가느다랗고 위태로운 생명의 끈, 혹은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그토록 오랫동안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고통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죽음은 결코 고통이 아니라고, 오히려 고통의 완전하고 영원한 소멸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오래전부터, 어쩌면 아주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 그렇게 느껴왔다. 영화 속에서 악당이 비참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통쾌함이나 정의의 실현을 느끼고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크린 밖 안전한 곳에서 바라보는 당신의 마음일 뿐, 정작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 그 당사자에게는 어떤 느낌, 즉 고통이라는 감각 자체가 존재할 리 없다고. 고통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의 몫일 뿐이라고. 죽음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고.

차가운 밤바람이 다시 한번 세차게, 그리고 격렬하게 불어왔다. 멋을 내려고 일부러 골라 입었던, 계절에 맞지 않게 얇은 잠바 속으로, 매서운 냉기가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뼛속까지 시리고 아렸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귓전을 사납게 때리며 스쳐 지나가던 세찬 바람은 이제 굶주린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옥상 위를 거칠게 몰려다니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듯이 나에게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바람은 옥상 바닥에 힘없이 나뒹구는 지친 낙엽 조각들과 헤지고 찢어진 비닐 조각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기어이 그것들을 허공 높이 들어 올려 먼지 더미 속으로 내동댕이치듯 잔인하게 날려 보내며 더욱 성난 괴성을 내질렀다. 나는 비쩍 마르고 얼음처럼 차가워진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아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중력에 이끌리듯, 옥상 난간의 가장자리, 아찔한 허공을 향해 나아갔다.

나는 아주 천천히, 눈을 감고, 거센 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내 지치고 상처 입은 몸을 완전히 맡긴다. 바람 속에 떠다니는 아주 작은 입자처럼 분해되어 이 거대한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나의 몸뚱어리. 이제야 비로소 진짜 자유,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완전한 자유가 찾아오는 것만 같다. 나를 옭아매던 이 지긋지긋한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 기억과 미련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지는 순간.

‘그래, 고통은 아주 짧게,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날 거야. 곧.’

나는 마지막 순간,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가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토록 서글프고 허무했던 나의 사랑에게, 그리고 이 지독한 세상에게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작별을 고했다.

바람 소리가 나의 마지막 속삭임을 삼켜버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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