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저녁

by 남킹

여자

퇴근 시간을 알리는 시계의 분침이 절망적인 속도로 마지막 한 칸을 향해 기어가던 무렵, 현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것은 아주 드문,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우리 사무실의 모든 전화는, 마치 보이지 않는 서열의 증거라도 되는 양, 벨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막내인 내가 가장 먼저 받는 것이 불문율처럼 굳어져 있었다. 나의 손은 언제나 수화기 위, 혹은 키보드의 통화 버튼 위에 그림자처럼 머물렀고, 기계적인 반사 작용으로 전화를 받는 행위는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내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수는 내게 전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니, 그 표현은 부정확하다. 그는 잘 하지 못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의 전화는 언제나 침묵으로 시작되었다. 수화기를 들면, 그 너머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어떤 용건도 들려오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세상의 모든 망설임과 어색함을 한데 모아 압축시켜 놓은 듯한 미세한 숨소리의 파편뿐이었다. 몇 초간 이어지는 그 고요한 주저함의 순간. 그 짧은 침묵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나는 그것이 바로 그라는 것을, 마치 오래된 상처가 날씨를 예감하듯,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곤 했다. 그러면 나는 마치 준비된 배우처럼, 내 안의 가장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를 꺼내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 평소 사무적인 용무로 사용하던 건조하고 기계적인 톤과는 완벽하게 분리된, 오직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음색이었다. 한 톤 높게 조율되고, 상냥함이라는 인공 감미료를 듬뿍 뿌린, 느리고 다정한 어조로.

“여보세요? 현수 씨?”

나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그의 고막에 가닿는 순간, 그는 비로소 안심이 된다는 듯, 혹은 굳게 닫혔던 용기의 빗장을 이제야 열었다는 듯,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지독하리만치 간결하고 건조하게 용건만을 전달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전보를 치는 사람처럼 딱딱한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미처 무언가 되물을 틈도 없이, 혹은 다정한 인사를 건넬 겨를도 없이,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에게 전화 통화라는 행위는, 마치 낯선 외국어로 연설을 해야 하는 사람처럼,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부담스러운 과업처럼 보였다.

오늘 그의 용건 역시 지극히 간결했다. 저녁 식사를 하지 말고, 퇴근 후 곧장 시내에 새로 생긴 볼링장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여진 짧은 한마디. 이번 달 과외비를 받았으니 저녁을 사겠다는, 그의 방식대로라면 꽤나 친절한 설명과 함께.

그와 내가 처음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기 시작한 후, 꽤 오랫동안, 거의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의 데이트 비용은 거의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다. 그는 당시 사실상 무직 상태였고, 그의 주머니는 가을날의 텅 빈 들판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나 절박한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집에서 매일 조금씩, 마치 약을 타 먹듯 받아오는 빠듯한 용돈으로는 고작 하루에 필요한 담배 몇 개비와, 허기를 겨우 면할 정도의 라면이나 김밥 한 줄을 해결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나 역시 풍족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이라는 정글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말단 여직원이 받는 월급이란, 그야말로 쥐꼬리라는 표현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보잘것없었다. 통장에 잠시 머물렀다가 카드값과 공과금, 그리고 월세라는 이름의 무자비한 약탈자들에게 순식간에 찢겨 나가는 월급 명세서를 볼 때마다, 나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의 처절함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런 우리였기에, 우리의 데이트는 대부분 편의점에서 파는 가장 값싼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사 들고, 담배 연기와 퀴퀴한 냄새가 뒤섞인 허름한 여관방에서 주말을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과 잠시 단절된 채,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위태로운 현실을 잠시 잊으려 애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최소한의 데이트 비용마저도 점점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어깨를 짓누르는 생활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졌고,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고 단단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마도 내가 일방적으로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그의 내면에 무겁게 쌓여 있었던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알 수 없는 계기가 있었는지, 불쑥 학생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내게 고백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하고 무심한 말투였다. 그리고는 그달에 받은 과외비 전부를,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내게 건네는 것이었다. 구겨진 봉투 안에 담긴, 그의 노동의 대가인 지폐들을. 단 한 푼도 그 자신을 위해 빼놓지 않고 전부를.

나는 그 순간, 그가 건넨 돈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어떤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단순한 고마움이나 안도감과는 다른, 조금 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었다. 그의 서투른 배려와 무심한 듯 깊은 속내를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그는 마치 성실한 세입자가 월세를 내듯, 약속이나 한 듯 꼬박꼬박 자신이 번 돈 전부를 내게 가져다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더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는지, 혹은 더 높은 과외비를 받게 되었는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은 금액을 내게 주기 시작했다. 어느새 현수가 과외로 버는 돈은, 내가 매일 아침 지옥철에 시달리며, 온갖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고, 야근을 밥 먹듯 하며 버는 월급보다 더 많아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돈을 관리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지식도 없는 사람처럼, 모든 돈을 내게 맡겼고, 정작 자신이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타 가는 방식을 고수했다. 마치 내가 그의 유일한 은행 창구라도 되는 것처럼. 가끔은 그가 맡겨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찾아갈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에 대해 단 한마디도 묻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현수는 돈 그 자체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했고,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의 그러한 무관심 속에서 어떤 종류의 깊은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돈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돈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고, 돈 때문에 평생을 함께한 부부조차 등을 돌리는 이 잔혹한 세상에서, 그의 그런 태도는 마치 오염되지 않은 청정 구역처럼 느껴졌다. 그의 무심함은 나에게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고, 나는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충실한 관리인이자, 그의 삶의 일부를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에 은밀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대부분의 경우, 묘한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 기품은 값비싼 옷이나 세련된 매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세상의 통념과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향기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고 지내는, 혹은 나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분명히 그랬다. 그는 이 넓고 복잡한 세상의 주변부에서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며 허우적거리기보다는, 비록 작고 초라할지라도 자기 자신만의 확고한 세상의 중심에 고요히 서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삶의 아주 작은 한 가닥조차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경쟁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의 치열한 세상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 발짝 떨어져 낮은 눈높이로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는 방관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입으로는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면서도 실상 우리의 삶 전체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돈’이라는 거대한 괴물, 그 괴물의 과도한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신기할 정도로 가볍게 살짝 비켜나 있는 듯 홀가분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있으면 쓰고, 없으면 말고’ 식의, 마치 선문답 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그런 그의 태도는 때로는 지독하게 무책임하게 보일지언정, 참으로 편리하고 자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그에 반하여, 나는 언제나 ‘현재’라는 위태롭고 좁은 발판 위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돈에 대한 갈증과 안개처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곡예사 같았다. 단 한 번도 경제적으로 풍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과거의 기억과, 앞으로도 딱히 풍족해질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예감. 그것이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나를 늘 짓누르는 거대한 무게였다. 나는 그의 초연함이 부러웠고, 동시에 그의 무책임함이 불안했다. 우리는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너무도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볼링장 입구가 있는 빌딩 앞, 작고 초라한 인공 분수대에서, 참새 한 마리가 물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신나게 목욕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작은 날갯짓 하나하나에 햇살이 부서져 은빛 가루처럼 흩날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평화로워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나의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녀석은 쏜살같이 푸른 하늘 속으로 날아올랐다. 이렇게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 찬 탁한 도시의 한복판에, 아직도 저런 작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고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저 작은 새에게는 이 삭막한 도시가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는 그저 생존을 위한 전쟁터일 뿐인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렸다. 육중한 방음문이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관문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문을 열자,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소음의 파도가 나를 덮쳤다. 레인 위를 둔탁하게 굴러가는 볼링공 소리, 핀들이 경쾌하게 부딪히며 쓰러지는 파열음, 사람들의 환호와 탄식이 뒤섞인 웅성거림이 한꺼번에 귀청을 때리며 몰려왔다. 동시에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에어컨 바람이, 퇴근길의 열기와 스트레스로 후끈 달아오른 내 얼굴을 거칠게 헤집고 지나갔다. 그 차가운 공기에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저만치 안쪽 레인에 현수가 보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예의 그 ‘고급반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 있었다. 그가 무슨 공부를 하는 스터디인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그가 가끔씩 들고 다니는 책들이 대부분 두꺼운 철학 서적이나 원서로 된 시집이라는 것, 그리고 그 멤버들이 어딘지 모르게 세상 물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라는 것 정도만 짐작할 뿐이었다. 현수가 나를 발견하고는, 볼링공을 든 채로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볼링공을 굴리던 사람, 전광판의 점수를 확인하던 사람, 음료수를 마시던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얼굴들이었다. 현수에겐 이상하게도 친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수가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었고, 그들과의 관계가 아주 깊고 친밀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어떤 시기에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줄곧 혼자였고, 또 어떤 시기에는 사교계의 중심인물이라도 되는 양 줄곧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다녔다. 그는 나에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느껴지는, 소원함과 친밀함, 혹은 융합과 개별성 사이의 미묘하고도 어려운 줄다리기의 문제를,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너무도 쉽고 자연스럽게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누구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지만, 또한 누구에게도 배척당하지 않았다. 그 기묘한 균형 감각은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만의 특별한 재능이었다.

오늘 스터디 멤버들 중에는 여자들도 몇 명 섞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유독 그중 한 명만이 나의 시야에 강렬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몸의 모든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딱 붙는 검은색 스트레이트 팬츠에, 선명한 붉은색 하트와 함께 <I Love NY>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흰색 티셔츠를 맵시 있게 걸치고 있었다. 그 단순한 조합이 그녀의 몸 위에서는 마치 명품 디자이너의 작품처럼 보였다. 깡마르다 싶을 정도로 마른 체형에, 화장기 없는 얼굴 위로 반짝이는 작고 동그란 이마와, 날카롭게 좁아지는 턱선이, 어딘지 모르게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으로 목이 긴 여인의 초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의 존재는 이 소란스러운 볼링장 안에서 유독 고요하고 이질적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여자가 무거워 보이는 볼링공을 다소 힘겹게, 그러나 우아한 폼으로 던지고는, 돌아서서 애써 가쁜 숨을 고르며 이쪽을 쳐다봤다. 격렬한 움직임 때문인지, 아니면 실내의 뜨거운 열기 때문인지, 그녀는 중동의 사막 지방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한껏 받고 온 사람처럼, 유난히 하얀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붉은 홍조가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대조를 이루며 묘한 색기를 자아냈다. 여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며, 마치 볼링장의 화려한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사람처럼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는 척했다. 심장이 이유 없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내 감정에 좀 더 솔직해지자면, 싫어한다. 그녀 때문에 현수와 아주 심하게, 거의 이별의 문턱까지 갈 뻔할 정도로 다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지난달이었던가. 스터디 회원들끼리 단체로 근교의 야외 수영장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며칠 뒤 누군가 찍어온 사진들을 현수의 자취방에서 함께 보다가, 나는 그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반복되는 어떤 불길한 공통점을 발견하고 말았다. 수십 장의 사진 속에서, 유독 현수의 바로 옆자리에, 이 여자가 마치 그림자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사진이 지나치게 많았던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수영복 차림이 아닌, 웬만한 패션 잡지의 화보에서나 볼 법한, 아주 야하고 노출이 심한 디자인의 검은색 비키니를 입은 채로. 사진 속 그녀는 현수의 어깨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두르거나,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수는, 나의 현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기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이 눈에 거슬리는 불편한 사실을,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지적하자, 현수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기만 했다. 그 순간, 그의 그 가볍고 무심한 웃음이 내게는 ‘속 좁고 유치한 인간은 어쩔 수 없구나’ 하고 비웃는 듯한, 차가운 빈정거림으로 비쳤다. 적어도 그 혼란과 분노에 휩싸인 순간, 내게는 분명히 그렇게 느껴졌다. 나의 불안과 질투를, 그는 그저 가치 없는 감정의 낭비로 치부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화를 냈다. 댐이 무너지듯, 내 안에 억눌려 있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속 좁은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특권이라도 되는 양, 그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아주 사소하고 유치한 불만들까지 모조리 끄집어내어 덤터기로, 그가 숨 쉴 틈도 없이 쏘아붙였다. 그의 무심함에 대하여, 그의 경제관념 없는 태도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하여. 내 목소리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를 향했지만, 사실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자해와도 같았다.

그리고는 길고 숨 막히는, 참을 수 없는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현수는 그 후로 거의 한 달 동안 나를 찾지 않았다. 그 어떤 연락조차 없었다. 그 침묵의 시간 동안 나는 지옥을 경험했다. 그의 부재는 내 일상의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내가 먼저 그에게 연락해서,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고, 내가 너무 예민했다고,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우리의 싸움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나 혼자 격렬하게 상처받고 화를 내고, 결국 나 혼자 먼저 꼬리를 내리고 사과를 했다. 그는 절대로 먼저 나를 어르거나 달래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내가 스스로의 감정의 폭풍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지쳐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가만히 그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때때로, 차라리 그가 나를 비난하거나 핍박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의 그 무심한 침묵과 방관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외로운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묵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의 감정은 너의 것이고, 나는 거기에 관여할 책임이 없다’고.

현수와 단둘이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우리는 잠시 스터디 멤버들과 헤어져 소란스러운 볼링장을 빠져나와 빌딩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하늘은 먹물을 풀어놓은 듯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두꺼운 구름 사이로 상처 입은 조각배 같은 반달만이 희미한 빛을 간신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왁자지껄한 대로변을 벗어나 어둡고 좁은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인적이 끊긴 길 위에는, 밤바람만이 형체 없는 손님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길바닥에 버려진 잡동사니들을 흩뿌리고 다녔다. 낮 동안 손님들로 북적였을 골목 안의 수많은 식당들은 이미 대부분 문을 닫았거나, 마지막 남은 설거지를 하며 하루의 고단함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낮 동안 나를 짓눌렀던 빡빡한 인심과 조급한 안달로 가득했던 도시의 번잡함이 홀연히 사라지고, 세상이 깊은 물속처럼 고요한 적막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리는 입구의 낡은 간판에서 아직 희미하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은 순댓국집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낡은 메뉴판을 볼 것도 없이, 가장 빨리 나온다는 순댓국 두 그릇을 주문했다.

과연 식당 아주머니의 말대로,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뜨거운 김을 맹렬히 뿜어내는 순댓국 두 그릇이 번개처럼 우리 앞에 차려져 나왔다. 볼링을 치며 에너지를 소모한 탓인지, 아니면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탓인지, 극심한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와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나는, 염치고 체면이고 따질 겨를도 없이 숟가락을 들고 정신없이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뜨거운 국물에 입천장이 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밥 한 공기를 통째로 말아 허겁지겁 퍼먹었다.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음식을 갈구하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동물적인 본능에 충실하여 미친 듯이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맞은편에 앉은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처럼 허겁지겁 먹고 있었지만, 그 모습 속에서 나는 순간 다른 것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바로 이 남자를, 나는 지금 마주 보고 있다. 그의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 국물에 집중하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숟가락을 쥔 가늘고 긴 손가락. 그 모든 것이 사무치게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깨닫고 있었다. 어쩌면 언젠가는 아침 안개처럼, 혹은 덧없는 꿈처럼,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이 위태로운 관계를, 이 불안정한 행복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온전히 감싸 안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도 힘겨운 일인지를. 그리고 그 서늘한 깨달음 속에서 나는 지금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현수의 그 평온하고 초연해 보이는 세상 앞에서, 나 자신이 너무 속되고 세속적인 존재는 아닐까 하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돈에 울고 웃고, 사소한 질투심에 밤잠을 설치고,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나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온통 속물적인 욕망으로 들끓는 이 세상 속에서, 나 역시 그저 이 세상의 법칙에 너무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혼란스러움이 나를 덮쳤다. 어쩌면 잘못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를 제외한 이 세상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다른 주파수를 가진, 결코 온전히 하나로 섞일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 뿐일까? 그는 별이고 나는 땅인 것처럼,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바라볼 수만 있을 뿐, 결코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는 없는 운명일까?

수많은 질문들이 뜨거운 순댓국 김처럼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흩어졌다. 나는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애초에 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숟가락을 들어 다시 뜨거운 국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맵고 짠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것이 뜨거운 김 때문인지, 아니면 내 안의 슬픔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저 맞은편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여전히 순댓국을 먹고 있는, 내가 사랑하는 이 남자의 얼굴을,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남자

그날 밤, 우리의 저녁 식사는 유난히 길고 더뎠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일부러 외면하려는 듯, 우리는 식어가는 음식과 비워진 술잔을 앞에 두고 부질없는 이야기들을 안개처럼 피워 올렸다. 늦은 저녁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모인 자리였지만, 식사가 끝날 무렵 우리를 감싸고 있던 것은 포만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에 가까웠다. 창밖은 이미 완연한 밤의 품에 안겨 있었고, 도시의 불빛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채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선 우리는, 스터디의 나머지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2차 장소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선택한 곳은 우리가 막 빠져나온 낡은 식당과는 대조적으로, 이 지역의 스카이라인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거대한 복합 빌딩이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는 매캐한 누룩 냄새와 함께 도시의 역사를 증언하던 오래된 소주 공장이 잿빛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 공장은 한때 이 지역의 명물이자 랜드마크였으나,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의 무자비한 손길은 낡고 초라한 과거의 기억을 남김없이 지워버렸고, 그 폐허 위로 번쩍이는 유리와 차가운 철골 구조의 20층짜리 현대식 빌딩을 오만하게 세워 올렸다. 그것은 마치 과거의 주검을 딛고 선 거인의 모습과도 같았다.

빌딩의 내부는 욕망의 거대한 용광로를 방불케 했다.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는 현란한 네온사인을 번뜩이는 식당과 카페, 볼링장, 노래방 같은 위락 시설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각종 상점과 병원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인간의 모든 욕구와 필요를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 위층부터 꼭대기까지는 격자무늬 창문들이 빼곡하게 박힌 오피스텔로, 도시의 익명성에 기대어 잠시 쉬어가고픈 영혼들을 위한 벌집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빌딩의 오만한 그림자 바로 옆에는, 폭은 좁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더러운 강이 도시의 썩은 핏줄처럼 힘없이 흐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강 중에서 가장 참혹하게 오염된 강일 것이다.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진 강물은 마치 고여 있는 폐수처럼 보였고, 특히 무더운 여름철이면 코를 찌르는 심한 악취가 진동하며 올라와 행인들의 얼굴을 찡그리게 했다. 강물은 흐른다는 감각조차 상실한 채, 그저 죽어있는 거대한 검은 물웅덩이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그 표면 위로는 정체불명의 기름 막이 무지갯빛으로 얇게 떠다녔고, 간혹 인간이 버린 쓰레기들이 섬처럼 부유하며 강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弔旗)처럼 나부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낯설고도 추한 풍경의 중심에는 나의 과거와 현재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이곳은 나의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까지 반평생을 보냈던 오래된 마을이었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심지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바로 이 마을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의 회상에 따르면, 당신이 젊었을 적에는 이 강이 수정처럼 맑아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함께 빨래를 하고,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이 발가벗은 채 멱을 감으며 더위를 식히던 생명의 공간이었다고 했다. 강변에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서 그늘을 만들었고, 저녁이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녔다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그때의 풍경을 이야기할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련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풍경에 대한 깊은 상실감이 배어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 강은 생명의 젖줄에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오염된 강으로 전락해버린 걸까? 이 근처를 지나는 버스를 타고 창밖을 무심히 내다볼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한 번씩 던져보곤 하던 질문이었다. 어릴 적 동네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흉흉한 소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칠흑 같은 밤, 승객들을 가득 태운 버스가 빗길에 미끄러지며 운전 부주의로 이 강으로 굴러떨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수심이 얕아 큰 사고는 아니었고, 대부분의 승객들은 가벼운 타박상만 입고 자력으로 탈출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사고로 다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공포에 질려 이 더러운 강물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결국 쇼크로 죽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강물의 오염이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앗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공포의 대상임을 내 어린 마음에 깊이 각인시켰다.

최근에는, 이 화려한 오피스텔 빌딩과 강 건너편의 낡고 오래된 마을을 이어주는, 제법 넓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큰 다리가 좀 더 바다와 가까운 쪽 하류에 새로 놓였다. 사실 이곳은 강의 가장 끄트머리, 즉 바닷물과 민물이 서로 만나 뒤섞이는 기수역(汽水域)에 해당했다. 새로 놓인 다리가 생기기 전의 옛날 다리는, 내 기억으로는 삭은 나무와 시멘트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난간조차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위태로운 구조물이었다. 폭도 아주 좁아서 자전거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고등학생 시절, 등하굣길에 가끔 지름길로 이 다리를 건너야만 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발밑의 시커먼 강물을 내려다보며 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저 죽음의 물속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원초적인 공포감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바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강의 하구에는, 녹슨 어선부터 집채만 한 컨테이너를 실은 거대한 화물선까지 온갖 종류의 배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며 정박해 있었고, 그곳부터 내가 사는 동네 어귀까지는 길고 거대한 현대식 접안 시설을 갖춘 부두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부두 바로 옆으로는 붉게 녹슨 철로가 놓인 좁은 기찻길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왕복 2차선의 좁은 해안 도로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이 도로 위에는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를 실은 육중한 트레일러들이, 마치 지축을 울리는 듯한 쿵쾅거리는 굉음을 내며 밤낮없이 오고 갔다. 아주 가끔씩, 이 낡은 기찻길 위로 길게 이어진 화물 기차가 지나갈 때도 있었는데, 그 속도가 워낙 느려서 마치 거대한 강철 뱀이 땅 위를 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주 어릴 적 나는 동네 형들과 함께 어른들 몰래 이 기차의 뒤꽁무니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몇 정거장을 따라가곤 했던, 위험천만했지만 달콤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의 파편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희미한 조각 하나는, 바로 이 기찻길을 따라 어린 남동생의 손을 꼭 잡고, 당시 봉제 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계셨던 어머니를 찾아갔던 어느 나른한 오후의 풍경이다. 그 좁고 낡았던 공장의 위치를 어린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갔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는 부분은 이것이다. 눈처럼 하얀 솜털 같은 먼지들이 무수하게 떠다니는 뿌연 공기 속 천장 위로, 알록달록한 실뭉치들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고, 그 뭉치들에서 길게 뻗어 나온 각양각색의 실들이, 털털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낡은 재봉틀 속으로 쉴 새 없이 빨려 들어가던 바로 그 마법 같은 장면. 그 실들은 마치 운명의 실타래처럼 보였고, 어머니는 그 운명을 엮어 우리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던 여신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처녀 시절부터 봉제 일을 하셨다고 했다. 결혼 후 잠시 일을 그만두셨다가, 아버지가 불미스러운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수감되는 바람에, 어린 우리 형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재봉틀 앞에 앉게 되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수많은 옷들이 만들어졌지만, 정작 어머니 자신은 늘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이후 어머니는 교도소에서 나온 아버지와 함께 독립하여 조그마한 옷 수선 가게를 차렸지만, 기성복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것마저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양길에 접어들자, 결국 이모님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작은 채소 가게를 열게 된 것이었다. 그 기찻길과 봉제 공장, 그리고 더러운 강물은 나의 유년 시절과 우리 가족의 고단했던 역사가 뒤섞인, 복잡하고도 아련한 기억의 배경이었다.

우리는 목적지인 빌딩 지하 1층 노래방으로 향했다. 두껍고 육중해 보이는 방음문을 슬그머니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멱을 따는 듯한 온갖 종류의 고성과 괴성이 하나의 거대한 뭉치처럼 뒤엉켜 사방에서 몰려와 우리의 귀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계산대 카운터에 팔을 괴고 앉아 졸고 있던 듯한 주인아줌마가 우리의 기척을 알아채고는, 이미 단골손님인 우리를 향해 친숙하고 넉살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비어있는 방 번호를 알려주었다. 7번 방. 그곳은 우리만의 작은 해방구이자 도피처였다.

7번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술과 노래에 취해 흥이 한껏 달아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잠시 쏠리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유흥 속으로 삽시간에 흩어져 버렸다. 두 사람은 마이크를 번갈아 잡고 목청껏 사랑과 이별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옆에서 저마다의 독특하고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몸을 흔들어대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탬버린을 격렬하게 흔드는 친구, 테이블 위로 올라가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이는 친구, 모두가 잠시나마 현실의 무게를 잊고 순간의 쾌락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방 안의 낮은 탁자 위에는 마시다 만 맥주 맛 음료수 캔들이 찌그러진 채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었고, 서비스로 나온 듯한 어묵 국그릇에는 멀건 국물 위에 대파 쪼가리 몇 개만이 둥둥 외롭게 떠다니며 처량한 풍경을 연출했다. 천장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울긋불긋한 사이키 조명 빛 사이로, 담배 연기와 사람들의 뜨거운 호흡이 뒤섞인 부유 먼지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그 혼란스럽고 뿌연 시공간 속으로, 젊음의 생기로 발랄하게 빛나는 청춘들이, 내일의 걱정일랑 잠시 잊은 채 폴짝거리며 헤매고 다녔다. 나는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 서서, 잠시 그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한 발짝 떨어져, 그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의 열정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슬프게 느껴졌다. 그것은 곧 꺼져버릴 불꽃의 마지막 절정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없이 시끄러웠던 노래방을 나오자,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세찬 비가 굵은 바람과 함께 세상을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지하의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 바깥세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제법 굵은 빗방울은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듯 머리 위로 떨어지기보다는, 강한 바람에 휩쓸려 얼굴을 정면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미자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새롱거리며 중얼거리더니, 황급히 자신의 핸드백을 열고는 손바닥만 한 작은 양산을 꺼내 펼쳐 내 머리 위로 씌워주었다. 세찬 비바람 앞에서는 거의 아무런 소용이 없는 작은 몸짓이었지만, 그 연약한 천 조각이 만들어주는 작은 공간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앞을 가리는 빗줄기를 피할 수 있었고,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밤의 상쾌하면서도 서늘한 공기가 비와 함께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하게 훑어 내리며, 노래방의 탁한 공기와 알코올 기운으로 무거워졌던 머리를 맑게 씻어주었다.

비를 맞으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저 멀리 검은색 실루엣을 띤 나지막한 구릉 지대가 먹구름 속에 흐릿하게 잠겨 있는 것이 보였다. 만약 오늘처럼 비가 오는 궂은 날씨가 아니었다면, 저 굽이치는 능선의 부드러운 곡선 위로 하얀색 페인트로 깔끔하게 칠해진, 내가 3년 동안 다녔던 고등학교 건물이 선명하게 보였을 테지만, 지금은 온통 짙은 어둠에 휩싸여 깊고 음산한 숲처럼 불길하게만 보였다. 그곳에서 보냈던 나의 청춘, 꿈과 좌절, 우정과 사랑의 기억들이 빗물과 함께 뒤섞여 아련한 통증처럼 가슴을 저미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이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작별 인사를 하려는 순간, 흠뻑 젖은 미자의 얼굴 위로 나는 어떤 까닭인지 모를 깊은 슬픔과 애잔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빗물인지 아니면 정말 그녀의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그녀의 왼쪽 눈꼬리에서 또르르 하고 흘러내리더니, 볼 위에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그 작은 물방울이 마치 영롱한 수정처럼 찰나의 빛을 발하며 반짝거렸다. 그 찰나의 빛을, 미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손등으로 훔쳐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 무심한 손길 속에 감춰진 미세한 떨림을.

그러자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나는 저 더러운 강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언제나 외면하고, 저주하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그 죽음의 강이,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 순간 나를 강렬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산을 든 채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미자를 정류장에 남겨 둔 채, 그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곁눈질로 흘끗거리면서, 나의 유년 시절 공포의 근원이었던 오래된 다리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는 여전히 내 얼굴을 사정없이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나는 차가운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휘청거리는 밤바람에 몸을 맡긴 채 비틀거리며, 나의 유년 시절부터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난간 없는 좁은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나의 얇은 플란넬 바지가 빗물에 흠뻑 젖어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는 불쾌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침내 다리 입구에 도착하여,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언제나 죽음처럼 고요하게 침묵하며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 시커먼 썩은 강물이, 오늘 밤에는 그동안 숨겨왔던 생명의 에너지를 분출하듯, 거친 비바람에 맞춰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덩실덩실 춤사위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수면은 성난 짐승의 등가죽처럼 울렁거렸고, 빗방울들은 그 위에서 수천수만의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 잠시 숨을 멈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용기에 휩싸여, 호기롭게 난간조차 없는 그 좁고 위태로운 다리 위로 첫발을 내디뎠다.

강풍은 내 몸을 금방이라도 날려버릴 듯 심하게 흔들어댔고, 빗줄기는 채찍처럼 내 뺨을 거칠게 후려갈겼다. 발아래의 검은 강물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처럼 시커먼 입을 쩍쩍 벌린 채 나를 삼키려 드는 듯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마치 외줄 타기를 하는 곡예사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위태로운 다리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동안,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두려워했던 이 다리가, 어린 시절의 기억보다 훨씬 넓고 견고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세찬 바람에 몸이 심하게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결코 쉽게 넘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의 두려움이 현실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부풀려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다리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두 팔을 벌렸다. 비바람과 춤추는 강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무사히 다리를 끝까지 건넌 후, 나는 벅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어느새 나를 뒤따라와 다리 건너편 입구에, 흠뻑 젖은 생쥐처럼 웅크리고 서 있는 미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둠과 빗줄기 속에서 그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나를 향해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라고 애타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그 작은 실루엣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연민이었고, 미안함이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었다. 나는 빗소리와 바람 소리를 뚫고 그녀에게 들릴 수 있도록,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 외쳤다.

“미자야! 사랑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그 외침은 강물 위를 떠돌던 바람을 타고, 춤추는 검은 강물의 표면을 스치고, 빗줄기 속을 가르며, 저 건너편에 서 있는 그녀에게 가닿았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내 목소리는 거대한 자연의 포효 속에 흡수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해방되고,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춤추는 강물처럼, 내 안의 억눌려 있던 무언가도 마침내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의 유년과, 가족의 역사와, 이 도시의 상처와, 그리고 미자를 향한 나의 사랑이 모두 하나로 뒤섞여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나를 휘감았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갇힌 소년이 아니었다. 나는 춤추는 강 위에서, 비로소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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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최종 병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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