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잠

by 남킹
사랑이란 자기 희생이다. 이것은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다.
- L.N.톨스토이


늘 푸른 대지였다.

하늘과 맞닿은 땅은 초록의 눈부신 잎들 천국이었다.

가도 가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들의 세상.

그는 구름 장막이 걷힌 산길을 따라 느긋하게 운전을 하였다.

바람이 창을 훑으며 지나갔다.

적막한 도로는 무성한 숲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였다.

이 길을 오래전 부터 알고 지낸 듯하였다.

그는 무척 오랫동안 달리고 또 달렸다.

햇빛이 도로를 비추었다.

그 빛은 순차적으로 그의 다리와 팔과 가슴과 얼굴을 감쌌다.

따스함이 오싹하도록 정겹다.

그는 차창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살랑이는 바람이 창을 넘어 팔을 스치며 사각거리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부풀어가는 자유의 유쾌하고도 향기로운 소음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문득, 무척 가벼워진 자신을 발견하였다.

마치 슬로우비디오 처럼 모든게 정지한 듯 꾸물거리며 둥둥 떠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를 감싼 자동차는 점점 빠른 속도로 밑으로 하염없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포가 그를 삽시간에 덮쳤다.

그는 바둥거렸다.

안간힘을 쓰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작처럼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알수 없는 심연으로 그는 끝없이 떨어졌다.

그는 심한 고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하지만 눈 앞은 지독한 먼지로 뒤덮힌 듯 까끌거리며 흐렸다.

그리고 온 몸은 납덩이에 눌린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다.

깨어 났어도 그를 사로잡은 것은 녹색의 땅과 푸른색의 하늘이 엮어낸 잔영과 뒤섞인 심연의 공포였다.

‘얼마를 이렇게 있었나?’

도저히 그는 알 수 없었다.

무척 긴것처럼 느껴졌으나 무엇하나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는 그렇게, 온 몸을 두드리는 고통과 자신으로 돌아오는 시간의 흐름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아케론 포프.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며 기억해 낸 그의 이름이었다.

안나. 아내의 이름.

그리고 곧 슬픔이 찾아왔다.

상실의 아픔.

그녀를 찾아 헤맨 혼란이 점점 또렷히 눈 앞에 펼쳐졌다.

아프로간 디간스의 구부정한 골목을 메우던 시체들.

사방을 에워사던 절망과 거친 폭음이 만든 검은 하늘.

새들이 벽에 박힌 채 말라 비틀어졌고 오래된 항구도시의 가로등은 뒤틀리고 휘어진채, 기이한 얼굴로 사람들의 종말을 지켜보고 있었다.

뒤죽박죽 엉켜버린 무수한 차량.

뜨거운 태풍이 휩쓸고 갈색 소나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땅이 흔들리고 빌딩 외벽을 둘러싼 유리창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수수 쏟아졌다.

공포와 사람들의 아우성, 기이한 굉음이 메아리쳤다.

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온, 거리를 도배한 것은, 낙엽처럼 뒹구는 시체였다.

모든 살아 숨쉬는 것은 고통과 절망이었다.

그의 도시가 생소했다.

그가 나고 자라고 사랑을 한 이 곳이 이제 딴 세상이 되었다.

“지금 진통제가 투여되었습니다. 조금만 참으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시야는 여전히 반투명의 세상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아케론은 몸을 일으켜 세우러 안감힘을 쓰면서 소리나는 쪽을 응시했다.

“저는 재론 오방카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라후라로 불립니다. 아케론 님.” 그는 높낮이가 거의 없는 목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하였다.

그리고 아케론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그리고 저는 왜 볼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가요?” 아케론은 쉰 목소리를 삼키듯 뱉으며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우선, 당신은 카펜타닐에 심각하게 오염되었습니다.

치사량의 서너곱절에 달하는···” 라후라는 아케론의 팔과 다리에 연결된 튜브로 전달되는 특수 용액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저는 아직 살아 있나요?”

“지금 당신이 느끼는 고통은 해독과정입니다.

망가진 모든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걸릴겁니다.” 라후라는 아케론의 이마에 손을 살짝 얹어 체온을 살폈다.

여전히 뜨거웠다.

“얼마나 걸릴까요?”

“자연에서는 인간이 새로운 세포로 바뀌는데 6,7년 정도 걸립니다.

하지만 저희가 적용하는 기술이라면 반나절이면 됩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어디 인가요? 그리고 왜 저를 살려주시나요?” 아케론을 무엇보다 가장 어리둥절하게 만든 의문이었다.

“아케론 님, 지금은 회복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신체 기능이 모두 정상이 되면 우리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씀드릴것입니다.

그럼, 약간의 수면제를 놔드리겠습니다.

내일 쯤이면, 당신이 나를 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만...”

라후라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몇 번 쓰다듬은 뒤, 천천히 몸을 움직여 그의 곁을 떠났다.

조명이 무겁게 내려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아케론의 의식도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아내와 아들이 돌아왔다.

거칠고 오염된 바다를 헤엄치며 안나는 먹을거리를 구하러 서서히 그의 곁에서 멀어졌다.

아들은 그의 곁에서 엄마를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지독한 바람이 불어온다.

눈을 떨 수 조차 없는 모래바람이 연약하기만 한 그들을 세차게 때린다.

한동안 부자는 웅크린채 서로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시간이 한동안 지나갔다.

황량한 바람이 잦아들자 선명한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스트 델타곤 지역.

오염물질 방지를 위한 거대한 방벽이 겹겹으로 쌓여진 곳.

버려진 땅의 난민들은 늘 이곳을 서성인다.

이곳을 지나면 거대한 돔이 나타난다.

모든 오염과 치명적인 자외선을 차단하는 곳.

극소수의 부자들이 거주하는 하베스트 프로텍터 돔.

소위 노아의 둠.


신분상승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들과 그 자손들은 영원히 주인이고 남은 이들은 영원히 하인이다.

하지만 그 하인조차 아무나 할 수 없다.

브로커에게 무척 가치있는 것을 주어야 만 가능하다.

모든 아름다움과 고상함이 떠나간 곳에는 망각의 늪을 지날 수 있는 고귀한 약물만이 남았다.

지옥의 세상에는 마약이 보석이었다.

아케론이 다시 잠에서 깼을 때, 그를 짓누르던 고통은 여운으로만 남아 있었다.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느낌이 그를 감쌌다.

하지만 흐린 시야는 여전했다.

“누군가 거기 있나요?” 그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제법 크게 외쳤다.

하지만 반향만 들릴 뿐이었다.

그는 한동안 귀를 쫑긋 세운 채,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하려고 애를 썼다.

낮은 기계음과 삐삐거리는 신호음들이 규칙적으로 방을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차츰차츰 눈앞이 맑아 왔다.

방은 따스했고 단순했다.

작은 침대와 투명한 물잔, 은색 물병과 흰 베개.

가벼운 이불과 덮개가 덮혀 밖을 알 수 없는 창, 겨자색의 문과 격자무늬로 이루어진 벽.

그리고 어디선가 흐릿하게 흘러나오는 Martin Roth 의 단순한 전자 음악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들어 왔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띄며 그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깨셨군요.” 아케론에게는 낯선 얼굴이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라후라 씨군요.” 아케론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네. 잘 견디셨습니다. 통증은 어떠한가요?” 라후라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눈도 좋아 졌고요.” 그의 말에 라후라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거렸다.

“빛에 망막이 적응하는 과정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빛을 모른채 지냈으니까요.”

“얼마나?” 아케론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음...아마...매우 놀라시겠지만, 지금은 2099년 입니다.” 라후라는 그의 손목시계를 살짝 텃치하여 홀로그램으로 된 영상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보라색의 형광 숫자가 2099로 나타났다.

“2099년?”

“네, 당신은 30년동안 잠들었습니다.”

“어떻게?” 아케론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Cryonics (인체냉동보존) 장치 속에 있었습니다.” 라후라는 다시 홀로그램으로 된 영상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저 또한, 얼마 전까지 이곳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라후라는 코믹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아케론은 마치 꿈에서 덜 깬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곳은 남극대륙입니다.

우리는 빙벽 속에 아주 중요한 여러가지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도 포함해서···”

“하지만 저는 가치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피난민에 불과한데···” 아케론은 겸연쩍은 모습으로 그를 쳐다봤다.

“음...그건...중요한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라후라는 잠시 망설인 끝에 사실을 털어 놓았다.

“...그럼 제 아들이? 키에르 포프가?” 아케론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뚫어질 듯 바라봤다.

“네, 아드님이 살아 계십니다.” 라후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아내는? 혹시 아내 소식은 알고 있나요?” 아케론은 황급히 질문을 다시 던졌다.

“네, 아쉽게도...십년전에 이미···”

그러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들은 만나 볼 수 있나요?” 이윽고 침묵을 깨고 아케론이 물었다.

“그래서 당신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미리 아셔야 할 부분은...” 라후라는 그의 눈에 비친 눈물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당신이 잠든 사이... 아드님의 연령이 이제 당신의 신체 연령과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그렇겠군요...하지만 여전히 한가지 의문은 남습니다.” 아케론은 자신을 다독이듯이 그에게 물었다.

“제가 죽을 당시 저의 아들은 어린 꼬마에 불과한데...어떻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의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미리 알고 당신을 살리기로 한건지?···” 라후라는 방안을 천천히 걸으며 말을 이어 갔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사실은, 이 모든 설비를 그 분이 만드셨다는 점입니다.

대멸종이 있기 수십년전부터 말입니다.

저도 그 분의 예지 능력에 한번씩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 분의 성함은?”

“가우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그 유명한 가우타 그룹의 회장?” 아케론은 성마른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네, 맞습니다. 그분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의 비밀 해커 조직인 사피엔티아의 일원입니다.

라후라는 그 분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리고 가우타님을 조만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못드린 답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라후라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Deep Sea Book Cover (53).png
파벨 예언서 떠오르는 위협 2 (4).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키에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