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안이 쓴 두꺼운 책, 호모 사피엔스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나온다.
내가 본 세상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뚜렷하였다.
풍요로움과 궁핍도 선명하고 사랑과 절망도 뚜렷이 구분되었다.
키에르의 집무실에는 푸른 하늘에 빛나는 태양 사진이 걸려있다.
그는 아직까지 실제로 저런 하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본 하늘은 회색 혹은 어둠이었다.
더우기 투명에 가까운 대기속에 맨 살을 드러내고 선탠을 하는 예전 사람들의 모습은 그에게는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한 이질감을 주곤 하였다.
헬케크와 보호복 없이 땅 위에 선다는 것은, 아마겟돈 이후 출생인들에게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오전 10시를 알리는 홀로그램 시계 영상이 나타나자마자 노크소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왔다.
“주간 안보 회의가 곧 있을 예정입니다.
지상, 지하, 해양 및 우주 국방 장관님과 화상 회의 연결되었습니다. 의장님.”
곧이어 그의 책상에서 1m 쯤 떨어진 곳에 6개의 홀로그램 TV가 병렬로 나란히 나타났다.
그 속에는 각각 4명의 국방장관과 부의장, 비서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키에르는 TV속 인물들에게 돌아가면서 인사를 주고 받았다.
“오늘의 특별 안제는 2가지입니다. 의장님.”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길쭉한 얼굴을 한 비서실장이 뻣뻣하게 풀기를 먹인 정장이 어색한 듯 한번 쓱 펴면서 회의 안건을 내 놓았다.
“하나는, 지난 주 우주 방위 사령관의 안보 브리핑에서 주목하였던 태양계 7개 식민 국가의 세력 다툼이, 화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파더스 연합의 승리로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30년 가까운 우주 전쟁으로 인하여 대다수의 식민지 서클이 균열되고 세력은 약화된것으로 판명되지만, 문제는 그동안 구축한 비대한 군사 장비와 군인들을 소진하기 위한 탈출구로 지구 권역대의 지상과 지하로 눈을 돌릴 가능성이 무척 높아졌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임진왜란과 흡사합니다.
7개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일본은 지나치게 비대해진 군사력을 소진하기 위하여 이웃 나라인 조선을 침공하였습니다.
언제든지 반란의 소지가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소진함과 동시에 추가로 얻을 수 있는 지배지의 확장은 여러 모로 보나 통일 제국을 이룬 정치세력이 취할 수 있는 좋은 복안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비서실장의 말을 받아 우주 국방장관인 웨이즈가 반론을 이어갔다.
“하지만 통일은 되었지만 여전히 국지적인 저항세력이 태양계 전체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이라 쉽사리 지구 영토로 침공할 우려는 많지 않은 것으로 생각이됩니다.
좀 더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파더스 연합의 지도자는 어떤 유형의 인간인가요?” 부의장인 마요라나가 불쑥 끼어들며 질문을 던졌다.
“우선, 아마겟돈 이전에 지구의 거의 대부분의 금융 권력을 지배하던 파더스 가문의 맏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 출신이고 페르낭데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파더스 가문의 특징이 철저한 비밀주의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로 추정하건데···”
“그의 나이?” 키에르는 호기심을 꿀꺽 삼키며 웨이즈를 쳐다봤다.
“그는 아마겟돈 이전에 이미 113살이었습니다.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인조인간?” 비서실장인 다케시마가 물었다.
“오히려 AI에 가깝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 까 봅니다.
왜냐하면 아직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으며 그 어떤 형태로든 그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영상이 전혀 없습니다.
고골 소속의 쉐임 암스 박사의 7세대 인공지능이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웨이즈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페르낭데가 고골의 최대 주주인 것은 이미 세상에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직접 AI 최고 권위자인 쉐임 박사를 끌어들인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럼 페르낭데를 마인드 업로딩 한 AI라고 봐야 하는 건가?” 의장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즉, 초강력 양자 컴퓨터로 구축한 AI에 페르낭데의 의식을 주입한 경우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갑자기 회의장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들이 앞으로 마주해야 할 상대가 초강력 지능으로 무장한, 죽지 않는 인간인 셈이었다.
“하지만 AI라면, 우주에 산재해 있는 인간에 대한 공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부의장이 침묵을 깨고 질문을 던졌다.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패러독스가 작용합니다.
다수의 인간을 지키기 위한 소수의 살해를 용인할 것인지 말것인지에 대한 사항 말입니다.
오래전부터 있어온 논란입니다.
문제는 쉐임 박사를 대표하는 고골 사의 지나친 낙관론에 있다고 봅니다.
초기부터 AI를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인기몰이에 이용하면서 창조주에 대한 절대 권한을 경시한 결과입니다.” 웨이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지금은 지하세계를 대표하는 국가로서, 우리가 내릴 결정을 좀 더 뒷받침할 수 있는 정보가 추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잠시 정보 보안부 실장님을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최신 정보를 보고 받고 결정을 내리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키에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동의를 구했다.
“네, 연결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로 부터 답변이 왔다.
곧 7번째 TV가 추가되었다.
“안녕하세요? 쉘튼 실장님.”
“아, 네 안녕하세요. 의장님. 안그래도 안보 회의 후 연락을 드릴려고 대기중이었습니다.”
“네, 무슨 일이 있나요?”
“뭐, 그다지 중요한 사항은 아닙니다.
우선, 의장님의 질문을 받고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뭐, 저의 질문은 늘 아시다시피 하늘과 땅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안보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지 않습니까?” 의장은 미소를 띄며 그를 쳐다 봤다.
“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다지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우선 잘 아시다시피, 태양계를 휩쓸던 30년 전쟁은 거의 마무리되었고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듯합니다.
저희 요원들이 알아 본 봐로는, 분쟁 종식에 원칙적인 합의를 한 것으로 판명이됩니다.
물론 승자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일방적이고 요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만...대비를 하셔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보 요원 및 군비 증강에 대폭적인 확충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땅의 상황도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
프라이스 다즈로 대표되는 극지방 세력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동남아 일대를 거의 장악한 상황입니다.
그들이 확보한 어마무시한 식품과 첨단 기술로 인하여 명맥만 유지하던 소국들은 자발적인 통합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의 7개국 소 연합 공동체 발동은 그 대표적인 향방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프라이스의 노령에 있습니다.
거의 아흔이 다 되어 가는 나이 말입니다.
후계자 부분이 다소 미정인 상태이다 보니, 좀 더 뚜렷한 활동은 펴고 있지 않으나, 만약 급진적 세력 확장에 기반한 조르테 국방장관 쪽으로 기울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분쟁의 소용돌이로 말려들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최근의 정세는 중도파인 라파스 국회의장쪽으로 무게가 실리고는 있습니다.
워낙 환경이 모진 곳이다 보니 주민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영토 확장이 최우선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극지방을 기반으로 눌러 앉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잘 알겠습니다. 실장님. 그런데 내게 보고 할 것이 있다고 하였는데···” 의장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아, 네 보안사고 입니다. 지방 보안국에서 충분히 처리 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몇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뭔가요?”
“우선 20대 혹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 2명이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악어 입 홀을 통하여 저희 영토를 무단 침입하였습니다.
무기는 소지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그다지 위급한 상황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부의장이 성마르게 끼어들었다.
“정보창에 뜬 나이는 두 사람다, 60이 훌쩍 넘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한 사람은 가우타의 형제입니다.”
“가우타 형제? 몇번째인가요?” 키에르는 성마르게 물었다.
“8의 형제 라후라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분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나머지 한 분요?” 모두의 시선이 안보실장에게로 모아졌다.
“네, 이름이 아케론 포프입니다.”
“의장님의 돌아가신 아버지 성함과 철자까지 똑 같습니다. 물론 생일도 동일하고요···.”
“그럼?” 의장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실장을 응시했다.
“네, DNA도 의장님과 일치합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오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키에르 포프는 길게 한 숨을 쉬며 푹신한 소파에 몸을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