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 #49

by 남킹


카페는 예상보다 훨씬 넓고, 고풍스러움과 모던함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천장이 높은 복층 구조는 시원한 개방감을 선사했지만, 2층으로 오르는 계단참 모서리에 뜬금없이 버티고 선 고딕 풍의 포효하는 사자 석상은 시선을 강탈하며 의아함을 자아냈다. 마치 한 개인의 강렬한 취향이 공간의 전체적인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불쑥 튀어나온 듯, 세련되게 정돈된 카페의 분위기와는 명백히 이질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 어색한 장식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구석진 자리를 찾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이내 거대한 통창 너머로 펼쳐진 눈부신 푸른빛에 사로잡혀, 홀린 듯 창가 가장 가까운 곳에 몸을 앉혔다. 소파의 짙은 갈색 가죽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으나, 주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은 듯 윤기를 잃지 않고 부드러운 감촉을 전했다. 테이블 위에는 작고 단정한 스테인리스 꽃병 하나, 그 안에 마치 수행자처럼 고독하게 서 있는 라벤더 한 송이가 옅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다, 이내 웨이터에게 차분히 냉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창밖의 전망은 가히 일품이었다. 아니, 일품이라는 진부한 형용사로는 이 압도적인 풍경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거대한 자연의 파노라마였다. 왕복 8차선 도로는 마치 현실과 비현실을 가르는 경계선처럼 아득하게 멀어 보였고, 그 너머에는 좁고 긴 몽돌해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누워 있었다. 해변 끝자락, 하얀 포말이 부서지며 만들어낸 선명한 경계선 너머로는 오직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뿐이었다. 그 둘은 서로의 푸르름을 비추며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거대한 청색 화폭을 이루고 있었다. 햇살은 수면 위에서 수백만 개의 보석 파편처럼 부서지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마치 신이 변덕스럽게 바다 위에 한 움큼의 다이아몬드를 흩뿌려 놓은 듯한, 황홀경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아직 대기 중에는 어제 온 세상을 뒤덮었던 황사의 미세한 잔재가 희미하게 남아 공기의 투명함을 조금 흐리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온 세상이 잿빛 필터에 갇힌 듯 답답했던 어제를 떠올리면, 오늘 다시 마주한 이 강렬한 푸른빛은 오랜 병석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들이마시는 새벽 공기처럼 신선하고 경이롭게 다가왔다. 그 회색빛 장막이 걷히고 드러난 생생한 색채는 망막을 넘어 가슴 깊숙한 곳까지 청량하게 적시는 듯했다.

해변에는 누군가 심어 놓은 듯한 삼색 깃발들이 바닷바람에 몸을 맡긴 채 간헐적으로 펄럭였다.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의 날렵한 삼각 깃발들이 불규칙하면서도 묘한 리듬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그 경쾌한 움직임에 나의 심장도 마치 보조를 맞추듯 미세하게 뛰기 시작했다. 소개팅이라는, 어쩌면 내 인생의 작은 변곡점이 될지도 모르는 사건을 앞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설렘. 그것은 순수한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실낱같은 희망과 익숙한 불안감이 위태롭게 뒤섞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였다. 긴장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탓인지, 나도 모르게 간헐적으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바스락. 몸을 뒤척일 때마다 정장 바지가 내는 마찰음이 유난히 거슬렸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옷이었다. 몇 년 만에 옷장 깊숙한 곳에서 꺼내 입은 네이비 수트는 어깨 부분이 미세하게 조이는 듯했고, 오늘 아침 새로 산 빳빳한 셔츠의 칼라는 마치 올가미처럼 목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격식을 갖추려 애쓴 노력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움과 불편함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겪는 어색함이라 그런 걸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넥타이 매듭을 살짝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입술 안쪽 점막은 사포처럼 거칠어졌고, 혀는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긴장이 이런 생리적 반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제멋대로 반응했다. 턱을 쓸어내리는 어색한 손짓이 반복되었다. 불안을 감추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일 터였다.

다행히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에어컨 바람의 서늘한 날카로움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따스한 금빛 햇살은 카페 내부를 온화하게 물들이며 테이블 위에 맺힌 물방울들마저 영롱하게 빛나게 했다. 나는 방금 도착한 냉커피 잔에 꽂힌 검은색 빨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힘껏 빨아들였다. 얼음과 함께 섞인 달콤하고 차가운 액체가 목젖을 타고 넘어가 텅 빈 속을 시원하게 훑어 내렸다. 평소 아메리카노에 설탕 시럽 한 방울 넣지 않는 고집스러운 내가 오늘따라 유독 달콤한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를 주문한 것은, 어쩌면 이 통제 불가능한 마음의 떨림을 잠재우고 싶은 무의식적인 갈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커피의 단맛이 혀끝에 감돌자, 주변을 낮게 부유하던 여성 재즈 싱어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귓가로 파고들었다. 마치 벨벳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닳아있는 듯한 그녀의 허스키한 음색은 오래된 LP판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자극하며 공간을 농밀하게 채웠다. 나는 나지막이 그녀의 노랫말을 따라 읊조렸다.

I'm a creep

I'm a weirdo

What the hell am I doin' here?

I don't belong here

라디오헤드의 명곡이 섬세하고 세련된 재즈 편곡으로 다시 태어나 카페 안을 유영하고 있었다. 원곡이 품고 있던 날카로운 우울함과 격렬한 소외감은 부드러운 스윙 리듬 속에서 한층 더 깊고 쓸쓸한 정서로 변모해 있었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라는 가사는, 어색한 정장을 입고 홀로 앉아 미지의 상대를 기다리는 오늘의 내 상황과 기묘하게 포개지며 예상치 못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공간은 재즈 선율과 은은한 커피 향, 그리고 사람들의 나지막한 수군거림으로 점성(粘性)있게 엉겨 붙어 있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덜컹거리며 포터필터를 체결하는 소리, 원두가 날카롭게 갈리는 소음, 스팀 밀크가 가열되며 내는 쉬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마치 정교하게 짜인 오케스트라의 배경음처럼 깔렸다. 시야 한쪽 구석에서는 바리스타가 고요하고 정갈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의 집중하는 표정과 절도 있는 움직임은 마치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듯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윽고 한 곡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다른 선율이 시작되었다. 음악이 바뀐 것을 인지하자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휴대전화 액정을 켰다. 시간을 확인하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화면에는 '오후 2시 30분'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그녀가 오기로 한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 하고도 삼십 분이나 남아 있었다. 그 긴 시간이 마치 나를 조롱하며 비웃는 듯 느껴졌다.

언제나 나는 이런 식이었다. 약속 시각보다 늘 한참, 때로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일찍 도착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기다림 그 자체를, 어쩌면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텅 빈 공간에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그 속에서 피어나는 특유의 한가로움과 여유로운 공기를 본능적으로 갈망했다. 그것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 유년 시절 할머니 댁 툇마루에 앉아 무료하게 여름 햇살을 쬐며 느꼈던, 세상과 분리된 듯한 평온함과 안온함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기차를 탈 때도, 버스를 기다릴 때도, 심지어 영화관에 갈 때조차, 나는 늘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먼저 도착해 텅 빈 대기실이나 로비에 앉아 시간의 느릿한 흐름을 온전히, 그리고 천천히 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 목적 없는 공백의 시간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밀도 높고 충만한 순간이었다.

오늘도 나는 그렇게, 안락하지만 낯선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에 외로이 앉아 오랫동안 변화무쌍한 하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사람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 노란 레몬과 갈색 코코아 그림이 그려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메뉴판의 가장자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에 닳아 헤져 있었고, 탐스러운 레몬 그림 옆에는 누군가 흘린 듯한 작은 커피 얼룩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목적 없이 걷는 사람과 어딘가 망설이는 듯한 사람들의 몸짓에 무심히 시선을 던지기도 하고, 주변 테이블 손님들의 대화에 의도치 않게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창가 쪽 테이블의 중년 부부는 자녀의 대학 입시 문제를 두고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었고, 그 옆자리의 발랄한 여대생들은 새로 데뷔한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와 안무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들의 평범하고 소란스러운 일상은 거대한 창밖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바다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였다.

문득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갈매기 한 마리가 바람을 능숙하게 타며 푸른 하늘 위를 우아하게 활공하고 있었다. 그 거침없고 자유로운 날갯짓에 나도 모르게 깊은 부러움이 일었다. 내 인생은 언제부터인가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궤도에 안착했지만, 저 갈매기처럼 예측 불가능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듯한 짜릿함과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흔이라는 나이의 문턱, 큰 변화 없이 반복되는 직장 생활, 그리고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은 단조로운 일상. 어쩌면 이번 소개팅은, 이 무채색의 삶에 작은 파문이라도 일으켜 줄 새로운 시작에 대한 막연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오늘 만나기로 한 여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주선자인 친구는 그녀가 도서관 사서라고 했다. 그 외에 덧붙인 설명은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에 책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 단출한 세 가지 특징만으로 머릿속에서 그녀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구축해보았다. 어깨에 살짝 닿는 단정한 단발머리, 지적인 인상을 더하는 검은색 뿔테 안경, 소란스럽지 않은 조용한 미소, 그리고 책 속의 깊은 이야기에 잠긴 듯한 사색적인 눈빛.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빈약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었다. 실제로 마주하게 될 그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떤 목소리로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는 어느새 손가락으로 테이블 표면을 가볍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초조함의 또 다른 발현이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레스토랑은 서서히 그 밀도를 잃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붉은 기운을 머금기 시작하면서, 공간을 채웠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고, 하루도 그렇게 덩달아 저물어가기 시작했다. 오고 가고, 앉아 마시고, 이야기하고, 서로를 바라보고, 창밖을 걷던 그 수많은 익명의 존재들이 모두 사라졌다. 오후의 소란스럽던 인파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 카페 안에는 간간이 창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인들 몇 쌍만이 남아 서로에게 집중하며 낮은 속삭임과 간헐적인 웃음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그들의 밀어(蜜語)조차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배경처럼 흐르던 재즈 음악마저 멈추자, 공간은 더욱 깊고 무거운 정적과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까 전까지 경건하게 커피를 내리던 바리스타는 이제 마감을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을 분주히 닦고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의 규칙적인 움직임은 마치 하루의 종료를 고하는 엄숙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창밖으로는 저녁노을이 바다와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거대한 불덩이 같던 태양은 이제 수평선 너머로 자신의 몸을 거의 다 숨기고 있었고, 그 붉고 장엄한 잔광 위로 수줍게 반짝이는 몇 개의 별들이 조심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6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이미 한참 전에,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다. 이쯤 되니, 나는 더 이상 무의미한 기다림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희망의 잔불마저 사그라드는 시간이었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건네받아 지갑에 넣은 나는, 묵직한 투명 유리문을 밀고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텅 빈 테이블들만이 밤의 정적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파리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밤하늘 아래로, 멀리 고기잡이배의 불빛들이 아스라이 일렁거렸다. 낮 동안 그토록 눈부시던 바다는 이제 깊고 검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고, 떠오른 달이 그 검은 벨벳 같은 수면 위에 은빛 물길을 길게 수놓고 있었다. 테라스 바닥에는 홀로 선 나의 그림자가 외롭게, 그리고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낮의 열기를 식혀 제법 시원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초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얇은 셔츠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를 꺼내, 오후 5시경, 약속 시간이 이미 훌쩍 지났을 무렵 도착했던 짧은 메시지를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담담하려고 애쓰는 듯한, 그러나 어딘가 서툰 망설임이 느껴지는 듯한 글자들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여러모로 많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저희는 조건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저 짧고 건조한 문장 앞에, 그녀는 과연 얼마나 많은 고민과 망설임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지우고, 또다시 쓰는 과정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아니면, 어쩌면,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혹은 일말의 미안함조차 없이 무심하게 전송 버튼을 눌렀을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녀의 인생이라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그저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혼자 밥 먹는 무수한 낯선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푸른 밤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려 쓴웃음을 지었다. 세 시간 하고도 삼십 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그 기다림의 시간. 그 끝에서 마주한 결과는 예상했던 실망감이나 배신감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오히려 기이한 종류의 해방감과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이제 이 어색한 기다림을 끝내고 다시 돌아가야 할 나의 익숙한 일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기다림과 또 다른 만남이 언젠가는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가슴 한켠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자각. 그것이 나를 아주 깊은 절망으로 빠뜨리지는 않았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다시 한번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팔을 뻗어 먼바다 위에서 외롭게, 그러나 꾸준히 깜빡이는 등대의 불빛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았다. 혼자인 것은 여전했지만, 이상하게도 외롭지만은 않았다. 이 순간, 이 밤바람과 밤하늘과 고요한 테라스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어떤 기대도 없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뜰 것이고, 나는 아마도 또 다른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기 시작할 것이다. 기다림은 나의 숙명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가장 나다울 수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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