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막: 아이러니의 대관식, 혹은 조롱의 제의(祭儀)
2025년 10월, 역사의 무대는 가장 잔혹하고 기괴한 부조리극을 상연했다. 한편에서는 공화국의 심장부 워싱턴 D.C.를 비롯한 2,600여 도시의 아스팔트가 700만 주권자의 발자국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들의 목청은 "왕은 없다(No Kings)!"는 단호한 외침으로 대기를 찢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각, 역사의 반대편에서는 한 사내가 금빛 왕관을 선물 받고 있었다. 신라의 옛 수도 경주에서,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천마총 금관의 복제품이 도널드 트럼프의 손에 들리는 순간, 시간은 잠시 멎고 역사는 숨죽여 그 희대의 아이러니를 관망했다.
그것은 대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정교하게 연출된 조롱의 제의(祭儀)에 가까웠다. 미국 시민들이 그의 제왕적 통치를 규탄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왕권의 상징물을 받아 들고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보디랭귀지 전문가는 그의 표정을 "억눌린 흥분의 발현"이라 분석했지만, 그것은 프로이트적 욕망의 무의식적 표출을 넘어, 스스로를 역사의 중심에 놓고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재편하려는 유아론적(Solipsistic) 세계관의 비극적 발현이었다. 이 기묘한 불일치, 즉 광장의 거대한 함성과 밀실의 조용한 탐욕이 빚어낸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야말로, 트럼프 시대의 본질과 그 종언을 예고하는 가장 압축적인 알레고리다.
해외 네티즌들은 인공지능을 이용해 금관을 쓴 트럼프가 춤을 추고 전투기를 조종하는 '밈(Meme)'을 만들어 퍼뜨렸다. 이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전복적 실천이다. 권력의 실체보다 이미지를 숭배하는 시대에, 대중은 권력자가 스스로 빚어낸 신성한 이미지를 조롱과 풍자의 이미지로 대체함으로써 그 권위의 허상을 폭로한다. 금관을 쓴 허수아비는 그렇게 디지털의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그의 어리석은 욕망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증명했다.
제1장: 병든 리바이어던, 저항의 항체를 깨우다
토머스 홉스가 상상한 국가라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은 인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그들의 자연권을 양도받은 절대적 주권자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괴물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인민을 위협하기 시작할 때, 국가는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닌 포식자가 된다. 'No Kings' 시위를 촉발한 직접적 계기는 트럼프 행정부가 '내란법(Insurrection Act)' 발동을 검토하며 민주당이 장악한 도시에 군대를 투입하려 했다는 보도였다. 이는 국가가 지녀야 할 폭력의 독점적 권한을 정적(政敵)을 향한 칼날로 사용하겠다는, 공화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발상이었다. 로마의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정으로 넘어갔던 카이사르의 루비콘강 도하가 역사적 유비(analogy)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시민들의 분노는 단일한 층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위기에 대한 총체적 저항이었다. 영장 없이 이민자를 체포하고 구금하는 이민세관단속국(ICE)의 폭압적 행태는, 한나 아렌트가 경고했던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 어떻게 국가 시스템을 통해 자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메릴랜드의 한 시민이 "시위 참여 사실이 추적될까 두려워 현금을 썼다"고 고백한 대목은, 이미 미국 사회에 스며든 공포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는 더 이상 정책에 대한 이견의 차원이 아닌,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기제의 발현이다.
또한, 정부 셧다운과 공무원 해고, 교육과 의료 예산 삭감, 언론과 대학에 대한 탄압은 사회의 결속을 유지하는 모세혈관을 끊어내고, 비판적 이성을 마비시키려는 체계적인 시도였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묘사된 철인(哲人) 정치의 이상과 정반대로, 이는 대중을 동굴 속 그림자에 얽매이게 하여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우민화(愚民化) 정치의 전형이다. 시위대가 들고나온 "우리가 침묵할 때 민주주의는 죽는다(Democracy Dies in Silence)"는 피켓은, 이러한 지적 암흑기를 향한 필사적인 저항의 외침이었다.
나아가 한국에 3,500억 달러의 선불 투자를 강요하는 행태는 그의 통치 철학이 얼마나 조악한 거래주의에 기반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동맹을 상호 존중의 파트너가 아닌, 금전적 이익을 착취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시각은 국제 질서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로 퇴행시킨다. 이는 칸트가 꿈꿨던 '영구 평화'의 이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야만적 현실주의의 극치다. 'No Kings' 시위는 바로 이러한 총체적 퇴행, 즉 공화주의의 원칙과 계몽주의의 가치, 그리고 인류 보편의 양심을 파괴하려는 시도에 맞선 문명의 자기 방어였다.
제2장: 역사의 회랑에 울리는 메아리, 저항의 언어는 국경을 넘는다
"왕은 없다"는 구호는 2025년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1776년, 영국의 조지 3세에 맞서 독립을 선언했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외쳤던 바로 그 정신의 재림이다. 이번 시위는 단순한 정책 비판을 넘어,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아메리칸 드림'이 이민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다원주의의 신화였다면,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는 그 신화를 부정하고 배타적인 성벽을 쌓아 올리는 반동(反動)에 다름 아니다.
시위 현장에 등장한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시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는 그래서 더욱 섬뜩한 현실성을 띤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침묵이 결국 자신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이 경고는, 이민자와 소수자를 향한 공격을 남의 일처럼 여기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파시즘의 늪에 빠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이는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식을 정치적 실천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언어가 국경을 넘어섰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전국시국회의가 미국 시민들에게 보낸 "한국인처럼 저항하라!"는 연대 메시지는 이 투쟁이 고립된 사건이 아님을 웅변한다. 윤석열 정권의 계엄령 시도를 촛불의 힘으로 막아낸 '빛의 혁명'의 경험은, 이제 억압받는 세계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는 보편적 서사로 자리 잡았다. MSNBC의 앵커 레이첼 매도우가 한국의 평화적 저항을 언급하며 "시민들이 일어나 자발적인 비폭력 시위로 계엄령을 끝내고, 그것을 시도한 대통령을 탄핵시켰다"고 말한 것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어떻게 상호 참조하며 진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워싱턴에서 울린 'No Kings!'의 함성은 한국 광장의 '이게 나라냐'와 다르지 않다"는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것을 함축한다. 각국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터져 나온 저항의 목소리들이, 국경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을 이루며 독재와 폭정에 맞서는 인류의 보편적 열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세계정신(Weltgeist)'이 특정한 영웅이나 국가가 아닌, 국경을 초월한 시민 연대의 형태로 발현되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고 있음을 시사한다.
제3장: 카니발의 전복, 혹은 광대의 웃음
트럼프가 시위대를 '폭력 좌파'로 규정하려 했을 때, 시민들은 유니콘과 공룡, 다람쥐 같은 동물 복장으로 화답했다. 이는 러시아의 문예 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이 말한 '카니발(Carnival)' 이론의 완벽한 구현이다. 카니발의 웃음은 기존의 엄숙하고 위계적인 질서를 일시적으로 전복시키고 조롱함으로써 해방감을 선사한다. 심각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낙인찍으려는 권력의 시도에 대해, 시위대는 스스로를 비정치적이고 희극적인 존재로 탈바꿈시킴으로써 권력의 언어를 무력화시킨다. 이는 폭력에 비폭력으로, 진지에 유머로 맞서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저항이다.
이러한 카니발적 저항은 온라인 공간에서 '밈'의 형태로 증폭된다. 금관을 쓰고 춤추는 트럼프의 AI 생성 이미지는 그의 제왕적 욕망을 가장 희화화된 방식으로 폭로한다. 그는 스스로를 강력하고 위엄 있는 지도자로 포장하려 하지만, 대중은 그를 조롱과 웃음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이는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가 대중의 조롱이라는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는 순간이다. 그의 권력이 실체가 아닌 허상, 즉 대중의 인정과 복종에 기반하고 있음을 간파한 시민들은, 그 인정을 거두고 복종 대신 웃음을 보냄으로써 권력의 기반 자체를 허물어 버린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연단에 올라 "평화 시위야말로 진정한 애국 행위"라고 외친 것은 이러한 저항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이 '미움'과 '분열'의 언어로 애국을 독점하려 할 때, 시민들은 '연대'와 '평화', 그리고 '웃음'의 방식으로 국가에 대한 사랑을 재정의한다. 그것은 성조기를 흔들며 맹목적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의 가치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원칙을 바로 세우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능동적 시민성(citizenship)의 발현이다.
결론: 텅 빈 왕관, 주권자의 귀환
역사는 종종 어리석은 욕망을 가진 한 개인에 의해 퇴보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더 긴 호흡으로 보면, 역사는 그러한 퇴행에 맞서 스스로를 교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2025년 가을, 미국 전역을 뒤흔든 'No Kings'의 함성은 바로 그 역사의 자정(自淨) 작용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여준 숭고한 드라마였다.
트럼프가 경주에서 받은 금관은 결국 텅 비어 있었다. 그 안에는 천 년 왕조의 권위도, 신의 신성한 축복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한낱 금속의 복제품일 뿐이었고, 그의 어리석은 욕망을 비추는 거울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한 주권의 왕관은 한 사람의 머리 위에 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링컨이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했듯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시민의 가슴속에 깃들어 있다.
한국의 '빛의 혁명'이 그랬듯, 미국의 'No Kings' 시위 또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증명할 것이다. 시위대가 들었던 수많은 피켓과 그들이 외쳤던 함성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된다. '우리, 인민(We, the People)'. 헌법의 첫 단어이자, 모든 권력의 근원인 주권자들이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장엄한 선언. 금관을 쓴 허수아비는 결국 광장에 모인 수백만 주권자의 함성 속에 스러져 갈 운명이다. 그것이 역사의 법칙이자, 민주주의의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