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조추첨을 바라보며

by 남킹

심연(Abyss) 위에 핀 꽃과 무너지는 바벨탑: 대한축구협회의 '창조적 파괴'를 위한 레퀴엠

서문: 주사위는 던져졌으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가 거대한 회전판을 돌리던 그 순간,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월드컵 조 추첨식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전율과 함께 서늘한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국가와 한 조에 속했느냐는 대진운(對陣運)에 관한 일차원적인 불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 화려한 연회장 밖에서 들려오는 야만족의 북소리를 듣는 귀족의 심정처럼, 우리 축구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실존적 위기감이었다.

화면 너머로 비친 일본 축구 대표팀 관계자들의 표정에서 나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이성(Reason)'과 치밀하게 계산된 '설계(Design)'의 아우라를 읽었다. 그들은 이미 조 추첨이라는 우연의 영역조차 자신들이 쌓아 올린 견고한 시스템 안으로 포섭해 버린 듯했다. 반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요행을 바라는 기복 신앙적인 간절함,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자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불안이 동공 깊은 곳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이 숙명적인 라이벌의 격차는 이제 감정적인 '한일전'의 승패 따위로 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사적인 격차이며, 철학의 부재와 비전의 과잉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간극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척박한 황무지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네 영웅들에게 찬사를 보냄과 동시에, 그들의 피와 땀을 기만하는 협회의 무능과 부패한 구조를 해부하고, 나아가 포스트 손흥민 시대를 위한 혁명적 대안을 촉구하고자 한다.

제1장: 거울 속의 타자(他者), 일본의 '백년전쟁'과 우리의 '임기응변'

역사적으로 일본은 메이지 유신(Meiji Restoration)을 통해 서구의 '테크네(Techne, 기술적 지식)'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것으로 체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현대 축구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행보는 가히 무서울 정도다. 1990년대 초, 'J리그 백년 구상'이라는 기치 아래 그들은 축구를 단순한 공놀이가 아닌 사회적 자본이자 문화적 인프라로 격상시켰다. 그들의 축구는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스위스 시계의 태엽처럼, 혹은 오랜 시간 공들여 가꾼 분재(Bonsai)의 미학처럼, 유소년 시스템부터 성인 대표팀까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패스 워크에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서려 있고, 그들의 전술적 움직임에는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사무라이의 규율과 현대적 합리주의가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일본 축구의 발전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헤겔(Hegel)이 말한 '정반합(Thes-Antithesis-Synthesis)'의 변증법적 과정을 충실히 이행한 결과물이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시스템을 수정하며, 끊임없이 진화해 온 그들의 궤적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중심을 향하고 있다.

반면, 우리의 축구사는 어떠한가. 우리는 언제나 '투혼(Fighting Spirit)'이라는 낭만적이지만 추상적인 가치에 기대어 왔다. 물론 투혼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자산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보여준 숭고한 희생정신이나,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한강의 기적'은 모두 불가능을 가능케 한 정신력의 승리였다. 그러나 21세기의 초고도화된 현대 축구 전쟁에서, 시스템 없는 정신력은 총알 앞에 선 죽창과 다름없다.

대한축구협회의 행정은 근시안적(Myopic)이다 못해 맹목적이다. 그들은 백 년을 내다보는 비전 대신, 당장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으로 일관해 왔다. 감독 선임 과정에서 보여준 그들의 난맥상은 흡사 카프카(Kafka)의 소설 《성(The Castle)》에 나오는, 도무지 실체에 접근할 수 없는 부조리한 관료주의의 전형이다. 일본이 토대를 다지며 성을 쌓을 때, 우리는 모래 위에 화려한 천막을 치고 폭풍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장: 썩어가는 리바이어던, 축구협회의 죄와 벌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국가를 거대한 괴물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비유했다. 한국 축구의 리바이어던인 대한축구협회는 지금 병들어 있다. 그들의 혈관에는 혁신의 피가 아닌, 보신주의와 파벌 싸움이라는 썩은 물이 흐르고 있다. 협회의 수뇌부는 축구라는 순수한 스포츠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켰다.

그들이 임명한 국가대표 감독의 면면을 보라. 그에게서 현대 축구의 흐름을 읽어내는 전술적 통찰이나, 선수들의 심리를 아우르는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의 전술은 낡았고, 그의 언어는 공허하다. 그는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나침반도 없이 항해를 고집하는 눈먼 선장과 같다. 문제는 이 선장이 스스로 배에 오른 것이 아니라, 선주(협회)가 그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는 '인사 참사'라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한국 축구의 운명을 담보로 한 거대한 도박이자 직무 유기다.

협회는 '전문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대중의 비판을 '비전문가들의 아우성'으로 치부한다. 이것은 플라톤이 경계했던 '철인 정치'의 타락한 버전이다. 지혜 없는 자들이 권위만을 내세울 때, 조직은 필연적으로 부패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 안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화자찬에 빠져 있지만, 성 밖의 팬들은 분노를 넘어 절망하고 있다. 그들의 무능은 단순히 경기 패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축구의 유전자를 퇴행시키고, 미래 세대의 꿈을 갉아먹는 반역사적인 범죄 행위다.

제3장: 아틀라스의 고독, 혹은 척박한 대지의 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축구가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이 기적의 실체는 무엇인가. 바로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과 같은 걸출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존재다. 그들은 척박한 한국 축구의 토양에서 피어난 돌연변이적인 아름다움이자, 신이 우리에게 내린 마지막 동아줄이다.

손흥민을 보라. 그는 마치 그리스 신화 속의 아틀라스(Atlas)처럼, 무너져 내리는 한국 축구의 하늘을 홀로 떠받치고 있다. 런던의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그가 보여주는 폭발적인 스프린트와 환상적인 감아차기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자, 조국의 명예를 지키려는 숭고한 사투다. 그의 어깨에 지워진 '주장'이라는 완장의 무게는 실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는 웃고 있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시시포스(Sisyphus)의 바위를 굴려야 하는 자의 슬픔과 고독이 서려 있다.

김민재는 어떠한가. 그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거친 전장을 누비며 철벽과 같은 수비로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의 육체는 강인하지만, 협회의 엉성한 행정 지원과 혹사 속에서 그의 정신은 마모되고 있다. 이강인의 왼발에서 터져 나오는 마법 같은 패스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만, 동시에 그 재능이 시스템에 의해 극대화되지 못하고 개인기에 의존해야만 하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협회가 키워낸 결실이라기보다는, 협회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야생화들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지만 영웅주의 서사에는 한계가 있다. 나폴레옹도 워털루에서 패배했고, 항우도 해하에서 쓰러졌다. 개인의 영웅적 서사가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영원히 덮을 수는 없다. 스타 플레이어 한두 명에게 의존하는 축구는 모래성이다. 파도가 밀려오면 순식간에 사라질 허상이다.

제4장: 황혼의 시간, 포스트 손흥민 시대의 묵시록

"모든 것은 흘러간다(Panta Rhei)."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았던 손흥민의 시대도 언젠가는 저물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포스트 손흥민' 시대의 한국 축구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지금처럼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에서 슈퍼스타마저 사라진다면, 한국 축구는 걷잡을 수 없는 암흑기로 추락할 것이다. 일본이 수십 년간 다져온 시스템의 힘으로 선수가 바뀌어도 일정한 경기력을 유지하는 동안, 우리는 '제2의 손흥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기우제를 지낼 것인가? 이것은 비극을 넘어선 희극이다.

우리가 마주할 미래는 냉혹하다. 세계 축구의 전술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데이터와 과학이 지배하는 그라운드에서 '투지'만으로는 공을 만져볼 수조차 없을 것이다. 유소년 인구는 감소하고, 엘리트 체육의 기반은 흔들리고 있다. 손흥민이라는 거대한 우산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쏟아지는 폭우를 맨몸으로 맞아야 한다. 그때 가서야 후회한들, 이미 배는 침몰한 뒤일 것이다.

제5장: 혁명(Revolution)을 위한 제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의 타파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대한축구협회의 전면적인 쇄신, 아니 혁명을 촉구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혁(Reform)이 아니다. 기존의 낡은 틀을 완전히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여야 한다.

첫째, 협회의 의사결정 구조를 민주화하고 투명화하라. 밀실 야합과 라인 문화로 점철된 인적 구성을 청산하고, 축구 행정, 경영, 데이터 분석, 스포츠 심리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싱크탱크를 구축해야 한다. 파벌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실력과 비전으로 평가받는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한다.

둘째, '한국형 축구 모델'의 철학적 정립이 시급하다. 일본의 패스 축구, 스페인의 티키타카, 독일의 게겐프레싱과 같이 우리만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단순히 유행하는 전술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 선수의 신체적 특성과 정신적 기질에 맞는 독창적인 전술 철학을 수립하고, 이를 유소년부터 성인 대표팀까지 일관되게 적용하는 '수직적 통합 시스템'을 완성해야 한다.

셋째, 지도자 양성 시스템의 현대화다. 감독은 단순히 선수 시절 공을 잘 찼던 사람이 하는 자리가 아니다. 현대 축구의 감독은 전술가이자, 매니저이며, 심리학자여야 한다. 선진적인 코칭 라이선스 교육 과정을 도입하고, 해외 유학을 적극 지원하여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지도자들을 육성해야 한다.

넷째, 팬들과의 소통(Communication)을 회복하라. 축구의 주인은 협회장이 아니라 팬들이다. 팬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며, 모든 행정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신뢰 자본(Social Capital)이 없는 조직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결문: 다시 쓰는 신화, 불사조의 비상을 꿈꾸며

축구는 90분의 드라마이자, 인생의 축소판이며, 한 국가의 총체적 역량이 투영되는 거울이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이대로 서서히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승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낡은 껍질을 깨고 비상하는 불사조(Phoenix)가 될 것인가.

손흥민과 우리 선수들이 흘리는 땀방울이 헛되지 않게 하라.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더 이상 짓밟지 마라. 협회의 고위직 인사들이여, 당신들이 앉아 있는 그 의자는 권력의 왕좌가 아니라, 봉사의 제단임을 명심하라.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당신들이 한국 축구를 부흥시킨 주역이었는지, 아니면 몰락을 재촉한 역적이었는지를.

월드컵 조 추첨의 결과가 주는 공포를 직시하라. 일본이 저만치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며 느끼는 열등감을 분노로 승화시켜라. 그리고 그 분노를 동력 삼아 혁명을 시작하라. 우리는 더 이상 '졌지만 잘 싸웠다'는 패배자의 위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승리하는 습관, 치밀한 준비, 그리고 백 년을 내다보는 혜안(慧眼)이 필요하다.

겨울이 깊으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다(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봄은 오지 않는다. 지금 당장 썩은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포스트 손흥민 시대라는 미지의 땅에서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 축구 팬의 절규이자, 시대가 요구하는 엄중한 명령이다.

대한축구협회여, 응답하라. 그리고 변하라. 그렇지 않으면 남은 것은 팬들의 외면과 역사의 심판뿐일 것이다. 혁명은 지금, 여기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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