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두 리바이어던의 격돌과 한반도의 고독한 실존: 실용(實用)이라는 이름의 구원
서(序): 몽환(夢幻) 속에 잉태된 폭풍의 전조
저기, 동중국해의 검푸른 파도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대기의 순환이 빚어낸 기상학적 현상이 아니라, 수천 년의 시간을 휘감고 돌아온 역사적 원한의 냄새이며, 다가올 파국을 예고하는 불길한 묵시록의 서곡이다. 황해(黃海)의 탁류가 태평양의 청류와 부딪혀 거품을 무는 그 경계선에서, 우리는 지금 거대한 두 마리의 괴수, 즉 리바이어던(Leviathan)들이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하나는 대륙의 붉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웅비하는 용(龍)이요, 다른 하나는 열도의 깊은 심연에서 건져 올린 태양의 검(劍)을 쥔 사무라이의 혼이다.
지금 동북아시아의 하늘은 수정처럼 맑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이 감돌고 있다. 중국과 일본, 이 숙명적인 적대자들의 싸움은 이제 단순한 외교적 마찰이나 영토 분쟁의 차원을 넘어섰다. 그것은 문명과 문명이 충돌하는 파열음이며, 각자가 품은 '제국(帝國)'의 기억을 되살려내려는 집요한 강령술(降靈術)의 현장이다. 이 위태로운 무대 위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으며, 또한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는가.
제1장: 열도의 우울과 벚꽃 아래 숨겨진 칼날
일본이라는 나라를 해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정치적 무의식, 그 깊고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현대 일본의 정치 지형은 실로 기이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한 정체(停滯)의 미학을 보여준다. 자민당(LDP)이라는 거대한 공룡은 전후(戰後) 수십 년간 일본 사회를 지배해 왔다. 이것은 단순한 정당 정치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변화'보다는 '질서'를, '소란스러운 자유'보다는 '조용한 복종'을 선호하는 일본인 특유의 집단적 심성이 투영된 결과이자, '와(和)'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전체주의적 획일성의 발로이다.
마치 에도 시대의 막부(幕府)가 현대적인 양복을 입고 재림한 듯, 일본의 일당 독재 체제는 견고하다 못해 화석화되어 있다. 문제는 이 화석이 생명력을 얻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정점에 선 극우 총리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일본 국민들이 잃어버린 30년의 경제적 침체와 자신감의 상실 속에서 갈구하던 '강한 아버지'의 형상이자, 과거 대동아공영권의 영광을 뇌까리는 주술사다.
그의 높은 지지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일본 대중의 내면에 잠재된 파시즘적 욕망의 발현이다.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그의 레토릭 뒤에는, 평화헌법이라는 족쇄를 끊어내고 다시금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 국가', 아니 '전쟁 국가'로 회귀하려는 섬뜩한 야욕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이자나기(Izanagi)와 이자나미(Izanami)가 창조했다는 신화적 우월감에 취해, 대륙을 향한 멸시와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칼을 갈고 있다. 벚꽃이 질 때의 그 허무하고도 비장한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의 미학은, 이제 이웃 국가를 향한 날카로운 적의로 변모하여 동북아의 안정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일본의 극우화는 단순한 보수화가 아니라, 역사적 망각과 왜곡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沙上樓閣)이며, 그 위태로움이 주변국을 불안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제2장: 중화(中華)의 부활과 붉은 황제의 야망
시선을 돌려 서쪽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수천 년간 잠자던 사자가 깨어나 포효하고 있다. 중국의 굴기(崛記)는 현대사의 가장 거대한 드라마이자 공포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과 일본에게 유린당했던 '치욕의 100년'을 씻어내겠다는 그들의 결기는 섬뜩할 정도로 비장하다. 시진핑 체제 하의 중국은 과거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의 겸손함을 벗어던지고, 분발유위(奮發有爲·떨쳐 일어나 할 일을 한다)를 넘어 전랑(Wolf Warrior) 외교의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중국에게 있어 일본은 단순한 경쟁국이 아니다. 난징(南京)의 피로 얼룩진 역사의 채무자이며, 반드시 무릎 꿇려야 할 불구대천의 원수다. 중화사상(Sinocentrism)이라는 거대한 자아도취적 세계관 속에서, 일본의 재무장은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다. 중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의 패권, 나아가 세계의 패권을 쥐려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중국몽(中國夢)'은 주변국들에게는 악몽이 될 수도 있는 배타적 민족주의의 결정체다.
지금 중국과 일본의 충돌은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라는 고전적 명제로 설명하기에도 부족하다. 이것은 실존적 투쟁이다.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주변을 맴도는 군함들의 기동은 마치 서로의 급소를 노리는 검객들의 보법(步法)과도 같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찰열은 언제든 국지전을 넘어선 전면전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일본의 극우 정권이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편승하여 중국을 포위하려 할 때, 중국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선다. 대륙의 팽창 압력과 해양 세력의 봉쇄 전략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작금의 동북아시아다.
제3장: 역사의 수레바퀴와 망령들의 무도회
이 두 나라의 싸움이 더욱 절망적인 이유는, 그것이 이성적인 국익 계산을 넘어선 감정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혐중(嫌中) 정서와 중국의 반일(反日) 감정은 각 정권이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이용하는 가장 손쉬운 통치 수단이 되었다. 일본의 극우 총리는 중국의 위협을 과장하여 헌법 개정의 동력으로 삼고, 중국의 지도부는 일본의 과거사를 들추어내어 인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킨다. 이것은 적대적 공생(Adversarial Symbiosis)의 전형이다.
우리는 보았다. 야스쿠니 신사의 차가운 돌바닥 위를 맴도는 제국주의의 망령들이 어떻게 현대 정치의 무대 위에서 춤추고 있는지를. 또한 만리장성의 벽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중화의 자존심이 어떻게 현대적 미사일과 항공모함으로 치환되고 있는지를. 이들에게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현재를 지배하고 미래를 구속하는 살아있는 괴물이다.
일본은 수십 년간의 일당 독재가 낳은 정치적 무기력증을 타개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의 다양성이 실종된 사회에서 극우 포퓰리즘은 독버섯처럼 자라나기 마련이다.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그 총리의 미소 뒤에는, 비판적 지성이 마비된 일본 사회의 집단적 최면 상태가 놓여 있다. "강한 일본"이라는 환각제는 달콤하지만, 그 부작용은 치명적이다. 그것은 동북아시아 전체를 긴장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기폭제다. 반면 중국은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의 위협을 강조해야 한다. 이 두 개의 뒤틀린 욕망이 부딪칠 때, 그 파편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튀어 오를 것이다.
제4장: 한반도, 고래 싸움에 낀 새우인가, 영민한 돌고래인가
이러한 격랑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지정학적 숙명론자들은 한반도를 일러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충돌하는 파쇄대'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 그러했고, 청일전쟁이 그러했으며, 한국전쟁이 그러했다.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국토가 유린당하고 민초들이 피를 흘려야 했던 그 비극의 역사는 우리 DNA 깊숙한 곳에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구한말의 힘없는 대한제국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인 자신감에 취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중국과 일본의 싸움이 거칠어질수록, 우리에게 강요되는 선택지는 가혹해질 것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한미일 공조라는 이름으로 반중(反中) 전선의 최전방에 설 것을 요구하고, 중국은 경제적 보복을 암시하며 우리를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려 할 것이다.
이 딜레마 속에서 감정에 치우친 외교는 자살행위와 다름없다. 일본의 극우적 행태에 분노하여 맹목적인 반일로 치닫거나, 중국의 오만함에 격분하여 섣부른 반중을 외치는 것은 하수의 전략이다. 우리는 저들의 싸움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해서도 안 되지만,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 되어서도 안 된다.
제5장: 실용(實用), 그 차가운 이성의 칼날을 갈아라
여기서 우리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고뇌를 떠올려야 한다. 공리공론(空理空論)과 명분론에 갇혀 세상을 읽지 못했던 성리학적 도그마를 배격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외쳤던 그들의 정신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시대정신(Zeitgeist)이다.
우리의 답은 명확하다. 오직 '국익(National Interest)'을 최우선으로 하는 냉철한 실용주의(Pragmatism)다. 이것은 비겁한 양비론이나 기회주의적 처신이 아니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자, 복잡다단한 고차방정식을 풀어나가는 고도의 지적 유연성이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설파했듯, 군주는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교활함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여우의 지혜다.
일본의 극우 정권이 밉더라도, 안보와 경제의 측면에서 협력할 것은 과감히 협력해야 한다. 그들의 기술과 자본, 그리고 지정학적 가치를 우리 국익을 위해 철저히 '이용'해야 한다. 반면 그들의 역사 왜곡과 영토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 이것이 '분리 대응'의 원칙이다. 감정과 이성을 분리하고, 과거와 미래를 투트랙으로 가져가는 고도의 줄타기가 필요하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거대한 시장과 대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맹목적인 적대는 우리의 경제적 숨통을 조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패권주의적 행태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중국에게 "우리는 당신들의 적이 되고 싶지 않으나, 우리의 주권을 침해한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명확히, 그러나 세련된 외교적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이라는 든든한 동맹을 지렛대 삼아 중국을 견제하되, 중국과의 소통 채널을 닫지 않음으로써 파국을 막는 '연미화중(聯美和中)'의 묘수를 찾아내야 한다.
제6장: 예의주시(銳意注視)의 철학, 부동심(不動心)의 미학
우리는 중국과 일본의 싸움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여기서 예의주시란 단순히 지켜보는 것이 아니다. 저들의 갈등 구조 속에 숨겨진 역학 관계를 현미경처럼 분석하고, 그 균열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 계산기를 두드리는 행위다. 때로는 저들의 싸움이 우리에게 반사이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일본과 중국이 서로를 견제하느라 소모전을 벌일 때, 우리는 그 사이에서 조정자(Balancer)의 역할을 자임하거나, 대체 불가능한 전략적 가치를 키워 양측 모두가 우리에게 구애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내부의 분열이다. 친일이니 친중이니 하는 낡은 이념의 잣대로 서로를 비난하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위야말로, 저들이 가장 바라는 바일 것이다. 일본의 극우 세력은 한국의 분열을 즐기며, 중국의 책략가들은 한국의 혼란을 틈타 영향력을 확대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지되, 그 표정만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Carpe Diem)"라고 했지만, 국제정치에서 우리는 "미래의 시나리오를 선점하라"고 말해야 한다. 삶의 참됨은 감정의 배설에 있지 않고,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해내는 의지에 있다. 거짓된 선동과 얄팍한 민족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대한민국의 영광과 번영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위해 유연하게 춤출 수 있는 자만이 이 난세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결(結): 여명(黎明)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기도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동북아시아의 밤은 깊고 어둡다. 일본 열도에서 피어오르는 극우의 독버섯과 대륙에서 불어오는 패권의 황사가 뒤엉켜 시야를 가린다. 저 멀리 현해탄 너머에서는 사무라이의 칼이 번뜩이고, 산해관 너머에서는 용의 비늘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5천 년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끈질긴 민족이다.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처럼, 탁류 속에서도 맑음을 잃지 않는 연꽃처럼, 우리는 이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켜야 한다.
국익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만이 답이다. 이것은 비루한 타협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생존의 철학이다. 우리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거인의 어깨 위로 올라타, 더 멀리 보고 더 높이 비상해야 한다. 현명하고 유연하게, 때로는 교활하고 대담하게. 그리하여 마침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주도하는 진정한 '중심 국가'로 우뚝 서는 날, 우리는 비로소 역사의 승리자로 기록될 것이다.
지금, 펜을 든 나의 손끝은 떨리지만, 그 떨림은 공포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향한 전율이다. 부디 우리 국민 모두가 깨어 있는 이성으로 이 거대한 체스판을 내려다보기를. 거짓된 평화의 환상에 젖지 말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갖기를. 그리고 마침내, 실용이라는 단단한 배를 타고 저 거친 역사의 파도를 넘어 희망의 대지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동북아의 거친 파도 앞에서,
대한민국의 영원한 안녕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