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상념
Leonard Cohen - Famous blue raincoat
바로 앞 출구 옆에, 여승무원 한 명이 벽에서 간이 의자를 빼더니 앉았다. 안전띠를 한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시선을 승객 쪽으로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눈웃음으로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 노란 경고등이 꺼졌다. 엔진 소리에 잠시 한눈을 팔았다. 작은 타원형 창으로 반짝이는 햇살이 건너와 실내를 밝히며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각자의 자리에 앉았던 승무원들은 안전띠를 풀고 익숙하고 빠른 몸놀림으로 기내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중저음의 엔진 소리 속에 아이 울음과 승무원의 대화 소리가 묻어났다. 간이 키친 영역을 표시하는 커튼이 들락거리는 승무원 사이에 춤을 춘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희 항공을 애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인 승무원 송안나입니다.” 갑자기 여승무원 한 명이 내게 성큼 다가오더니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조금 전 내게 미소를 띠던 그녀였다. 홍콩 항공기에 한국인 승무원이 있을 줄은. 그런데 사실 더 놀란 거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나의 의문은 금방 풀어졌다.
“고객님이 탑승하신 분 중 유일한 한국인이십니다.” 나는 적잖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내는 빈자리가 없이 꽉 들어찼다. ‘그럼, 여기 탄 승객들이 모두 중국인이란 말인가?’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린다는 소문을 이제 현실로 실감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기내식 메뉴를 보여주었다. 나는 딤섬을 포함한 메뉴를 선택했다. 돌아서는 모습을 시작으로, 나의 시선은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에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졌다. ‘동포라서 그런가?’ 하지만 외양에서 다가오는 느낌은 다른 승무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소와 행동, 표정과 걸음에서, 이성으로 분석할 수 없는, 묘한 끌림 같은 것을 감지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시선은 온통 그녀에게 쏠리고 말았다.
그녀가 기내식을 건넸다. 나는 그 순간, 묘하게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에 익숙함을 느꼈다. 소녀는 짜장면 두 그릇을 익숙하게 식탁에 놓았다.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어머니와 함께 처음 방문한 날. 나의 자취방을 알아보던 중, 학교 근처 중식당에 들렀다. 주방에선 떠들썩한 중국말이 들려왔다. 늦은 오후라,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나는 짜장면 곱빼기를 걸신들린 듯이 먹어 치웠다. 포만감이 즐겁게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 벽에 붙은 종이를 발견했다. <방 있음>. 나는 고등학교까지 6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중국 식당 옆 다세대 주택 지하 방. 소녀는 나와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었다. 아쉽게도 같은 반은 되지 못했지만, 6년을 알고 지냈다.
그녀는 로맨틱 요소가 강한 문학 서적들을 늘 끌어안고 다녔다. 그녀의 몸에는 항상 들척지근하고 달콤한 양파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암청색의 예쁘장한 블라우스를 즐겨 입었다. 그녀 위로 오빠가 세 명 있었다. 가족 모두 식당 일을 도왔다. 아니 종사했다. 그녀는 오빠들의 짓궂은 장난 속에, 방과 후면 언제나 식당 홀을 지키며, 줄곧 의미심장하면서 생경한 쾌활함 속에 사는 듯 보였다.
그녀는 가족 중 가장 말랐다. 그녀는 살이 좀 투실투실하면서도 세련된 끌림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집에서 받은 용돈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내려놓은 짜장면과 미소. 갈수록 그녀에게 끌렸다.
성산이 보이는 바닷가. 고향에서의 마지막 봄. 백일장. 나는 비로소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감상적인 상태로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놓인 원고지가 바람에 까닥거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세상은 온통 하늘과 바다, 바람과 햇빛뿐이었다.
“저기 사진 한 장…. 어때?” 그녀가 돌아섰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