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해서, 혹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곳이라고 해서, 그곳의 가치를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다. 과거의 화려한 영광이 서린 곳일 수도 있고, 숨을 멎게 만드는 비경이 모습을 감춘 채, 우연한 방문자를 놀라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파른 언덕 꼭대기를 온통 덮고 있는, 회색의 수도원이 중앙을 차지한 마을은, 나의 변덕스러운 차량 내비게이션이 우연히 안내해준 곳 치고는, 꽤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풍경이었다.
트리에스테에서 보낸 사흘을 뒤로하고, 나는 이탈리아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시간째 달려 그나마 평지가 남아 있는 한적한 시골에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투명한 하늘 아래, 건물은 오래된 듯 낡지 않았고 지저분한 듯 정돈되어 있다.
우선, 방문객은 눈을 씻고 봐도 띄지 않았다. 좁은 골목은 막힌 듯 구부정하게 경사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였고, 돌길이 끝난 자리에는 여지없이 포도밭이 펼쳐졌다. 밭은 언덕 전체를 휘어 감고 그 끝의 경계를 감히 재 볼 수 없을 정도로 이어졌다.
마을이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드물게 눈에 띈, 농부든, 수도사든 그들의 걸음걸이는 아주 느렸다. 마치 달 표면을 걷는 듯하다. 시간이 지나치게 느리게 가는 곳. 분명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르다.
나의 도시는, 비정형, 불규칙, 가속, 오락가락, 드러남에 대한 과도한 관심, 확 트인 길과 잡동사니가 쌓인 골목, 작은 혼돈들이 뭉쳐 거대하게 뒹구는 탐닉들이 혼재하여 뿜어져 나오는 도가니 같았다. 그런 곳에 태어나서 30년 넘게 나의 습관이 길들여졌다.
나는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제공하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보려고 애썼다. 동시에, 뜻하지 않은 공간에서 맞이하는 생소함에 신선한 자극을 즐겼다. 인간은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한다. 호기심은 보호본능 보다 더 충동적이다. 조금 전 무언가가 내 안에서 자극처럼 튀어나왔다. 나는 이곳을 좀 더 훑어보기로 작정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호텔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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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두꺼운 슬레이트 지붕이 낮게 내려선 곳. 호텔을 표시하는 간판은 눈에 띄지 않게 작다. 반질거리는 조약돌을 쌓아 놓은 공터를 지나자 입구가 비로소 나타났다. 경쾌한 클라브생 음악이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나온다. 안내대는 허름한 칸막이벽 하나로 구분되었다.
텅 빈 곳. 아무도 없다. 손님도 주인도. 마호가니 서랍장 만이 외로이 남아 있다. 벽지는 모서리마다 얼룩지고 부풀어있다. 벨벳 커튼이 묶인 채, 창을 암울하게 살짝 가렸다. 오랫동안 펼쳐지지 않은 윤곽이 고스란히 회색빛 먼지로 포장되었고 창틀 언저리에는 좀나방이 죽어있다. 그리고 창문 유리에 비친 나의 얼굴은 일그러져있다.
호젓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서 언제나 인간은 혼자다. 나는 발길을 돌리려다 멈췄다. 다른 호텔을 근처에서 찾을 가능성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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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이 나타났을 때, 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고 있었다. 한 달째 읽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절반도 못 읽었다. 나는 유난히 책 읽는 속도가 느리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 나오면 무한 반복 테이프처럼 지칠 때까지 곱씹는다.
이 책은 참 고통스럽다. 마치 낱장 한 장 한 장이 한 권의 책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멍하니 그냥 기다리는 게 쉬울 거다. 아무튼, 한 장 반을 더 읽었다.
어느새 햇살이 붉다. 수수한 마실꾼 행색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게 히드로멜리 한 잔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내게 묻지도 않고 보드에 걸려 있는 방 열쇠 하나를 내어준다.
“301호에요. 깨면 연락해요. 아침을 준비할 테니.” 이탈리아 억양이 심하게 섞인 영어를 겨우 알아들었다.
“실례지만 방값은?” 나는 눈을 끔벅거렸다.
“알아서 줘요. 당신이 유일한 손님이니까.” 주인은 넌지시 해쭉 웃으며 나가버렸다. 나는 술잔을 들이켰다. 시큼한 향이 목을 막으며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