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아침은 옅은 안개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햇살은 좀 더 선명하고 투명해졌다. 장막이 걷힌 무대는, 어제는 미처 깨닫지 못한 다른 사물과 공간, 배경을 남겼다. 낯섦 속으로 나는 발걸음을 뗐다.
세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한, 유럽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을 표현했다. 낡은 카페와 허름한 빵집.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가 빙 둘러쓴 성당. 아담한 광장. 그곳에 어울리는 조그마한 분수대. 구불구불한 좁은 돌길과 계단. 바싹 마르고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걷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들뜬 새소리. 느긋한 자동차 소리. 마치 실재하는 갈등을 모두 흡수한 판타지 세상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모든 현실의 일들은 아무 의미도 없고, 나의 과거가 외롭고 비련 하거나 혹은 절망적일지라도, 이곳에 발을 딛는 순간, 초기화라도 한 듯 텅 빈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아무 거치적거릴 것 없는 투명한 물속을 부유하는 듯 가벼워졌다.
생각해보니 집을 떠난 지 3주쯤 되었다. 특별한 줄거리도 없이 북부 이탈리아를 쉴 새 없이 헤매고 있다. 얼마나 많은 마을과 광장, 묘지, 다리 그리고 길을 돌아다녔는지, 아는 것은 나의 휴대폰 내비게이션에 저장된 히스토리 뿐이다.
목적을 두지 않은 여행은, 우연이 뱉어낸 즉흥적인 감정의 쏠림에 따라, 햇살이 가늘어지거나 문득 어디서 본 듯한 친숙함이 들거나 혹은 판단이 작용하지 않는 멍한 상태에서도 주저 없이 머물곤 하였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런 사치도 이제 끝을 내딛고 있다.
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면 바닥이 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많은 벽과 가로등, 광고판과 자동차, 사람 그리고 짙은 색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강을 품은 도시로 말이다. 직장도 다시 구해야 한다. 톱니바퀴 속으로 나를 맞추어야 한다. 알람 소리에 깨고 지짐거리는 눈으로 전동차에 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만 할 것이다.
다시 결승선이 얼마 남았는지를 헤아리며 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의욕이 부침하는 과정에서 손쉽게 늙어 갈 것이다. 결코, 발버둥 쳐도 헐어버릴 수는 없을 거다.
이런 생각에 약간 겁이 났지만, 나의 발걸음은, 부정적인 사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본능대로 거리를 지나, 점점 좁고 가팔라지는 계단 길을 오르고 있다.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등이 축축하다. 눈에도 짠 물이 맺혔다.
아주 가끔 눈에 띄는 주민들과 눈인사가 이어졌다. 표정은 심통 하지만 미소가 배어있다. 도시의 판매상에게서 느끼는 서글픈 억지 미소는 아니다.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직조한, 살아 있는 것을 위한 스웨터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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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의 통증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쯤, 나는 낡고 좁은 유리문이 여러 개 성기게 박힌 문 앞에 멈췄다. 맥이 다 빠진 듯 몸이 휘청거렸다. 문은 활짝 열려있다. 결코, 닫혀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땀이 들어간 눈이 시렸다. 로마네스크식 성당의 둥근 천장이나 입구를 이루는 아치처럼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바닥에 앉아 더워진 몸을 식히며 이곳을 감상했다. 지금껏 마주한 유럽의 신전이나 사원 대부분은 어둡고 썰렁하였다. 그리고 전례 음악은 엄숙하고 비장하였다. 사제는 순교자들의 수난을 기리기 위하여 검은 옷을 입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모로 보나 지극히 종교적인 마음가짐으로 들어서게 만드는 숙연함이 느껴졌다. 가벼운 차림의 여행객이라도 선뜻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약간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수도사가 발소리를 잊은 채 지나갔다. 정적이 한결 더 깊어졌다. 조금 안쪽에 짙은 색의 우단이 덮인 기도대 같은 게 보였다. 햇살이 살짝 비켜 머물렀다. 그리고 덧보태지 않은 단순한 장식들이, 어둠에 익숙하게 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순식간에 중세 시대로 돌아갔다.
사실, 멀리서 쳐다본 수도원은, 기하학적인 모양의 화강암이 제멋대로 솟은 암산에 덧댄 조형물처럼 거북살스러웠다. 하지만 눈앞에 맞이한 내부는, 서늘하고 신비한 공기가 속을 채운, 정돈된 차분함을 나타내는 묘한 끌림을 선사했다.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천천히 속으로 들어갔다.
크고 둥근 홀이 나타났다. 홀을 중심으로 열주가 좌우로 뻗어있다. 어느 곳을 보던 똑같은 모습이지만, 한 걸음만 더 열주에 가까이 가면 장식된 문양이 제각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열주 양쪽에는 측량이 붙어 있다. 열주가 끝난 곳에는 작지만 둥근 홀처럼 생긴 익랑이 나타났다. 나는 익랑의 중심에 서서 천천히 사방을 둘러봤다.
가장 환하고 눈에 띄는 성가대와 제단은 유럽 어디를 가던 볼 수 있는 특색 없는 모습이었지만, 가로보다 세로가 지나치게 긴 십자가와 지극히 단순한 모습의 예수상은, 종교에 심드렁한 방문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푸근했다. 신이라는 관념 말이다. 이 관념은 어느 날 생겨난 뒤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전파되어 왔으며, 복음과 경전, 음악과 미술 등을 통해서 중계되고 확대됐다. 또, 이 관념은 사제들을 통하여 재생산됐고 사제들이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에 맞도록 재해석되어 왔다.
밝은 빛을 따라 나온 곳은, 딱딱한 바닥 돌이 엉성하게 박힌 열린 공간이었다. 몇 군데 뜰을 지나자 광장으로 보기에는 작았고, 뒷마당으로 보기에는 다소 넓은 곳이 나왔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못함>은 거북하였다.
정면과 양옆으로 비슷한 모양과 크기의 건물이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육중하고 낡은, 각각의 외짝으로 된 문에는 다른 색의 배경에 다른 모습의 성인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좌측은, 푸른색 하늘에 갈색 수도 복장의 성인이 눈동자와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정면은, 짙은 노란색으로 물든 대지를 화려한 복장의 성인이 지긋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우측은 붉은색의 태양을 등진 채, 두 팔을 양옆으로 쭉 편, 흰색 복장의 성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등장인물이 모두 성인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둥근 후광이 모두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광장 중앙에 마련된 돌의자에 앉아, 신발을 벗고, 가련한 나의 발에 휴식을 잠시 부여했다. 후눅한 바람에 고린내가 살살 올라왔다. 축축하게 젖어 살에 찰싹 달라붙은 셔츠에서도 땀에 찌든 냄새가 났다. 조금 기진맥진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잠시, 지극히 청아한 하늘을 쳐다봤다. 무엇과도 견주기 어려울 만큼 순수했다. 어디선가 눈을 찌르는 듯한 그을음 냄새가 훅하고 들어왔다.
나는 바닥의 돌을 유심히 쳐다봤다. 산에서 경험한 것을 응용하기로 생각했다. 길은 사람이나 동물이 가장 많이 다닌 곳으로 나기 마련이다. 딱딱한 돌이지만 좀 더 닳아서 윤기가 나는 곳을 살펴봤다. 정면이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문에 난 쇠로 된 손잡이를 잡고 힘있게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