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와의 조우
공간은 넓었다. 그리고 갈색 조명 아래 무수하게 많은 책이 꽂혀있었다. 오래된 냄새가 났다. 흩날린 적이 없는, 무겁고도 탁하며 지식을 내포한 공기가 폭넓게 깔려있었다. 나는 그 육중한 무게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내부에 깃든 어지러움이 만져졌다. 순간 달음박질치고 싶다고도 느꼈다. 하지만 잿빛의 긴장된 얼굴을 한 수도사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만 모든 충동이 분해되어 버렸다.
그는 푹 파인 관자놀이 위로 편안한 미소를 띠며 낯선 방문자를 끌어당겼다. 나는 무겁고 맥없는 표정으로, 산만한 미소를 남발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테이블을 점령한 수도사들 곁을 조용히 지나갔다. 창문은 널찍한 격벽으로 되어 일정한 간격으로 열려있었다. 자연 채광이 질서정연하게 보였다. 모든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갖추어져 있는 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보였다. 에테르 냄새가 났다.
같은 공간의 두 번째 실에 들어서자 일반인이 눈에 띄었다. 얼룩덜룩하였다. 마치 흑백 화면이 컬러로 바뀐 느낌이다. 다양한 모습의 인간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하지만 하나같이 모두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텅 비어 있고, 아무런 감정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덧정이 뚝 떨어지는 광경이지만, 그런 모습이 묘하게 안정감을 심어준다. 양 벽에는 유화가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 있다. 그 속에 슬픔을 담은 성녀가 눈에 띄었다. 보라색 실루엣이 거친 질료와 어우러져, 기묘한 그림자로 여인의 봉긋한 가슴을 가렸다. 모든 것은 규칙적이었다. 희미하게 비추는 램프는 일정한 간격의 책상에 중앙을 차지하고 달빛처럼 고아하다.
나는 몽롱한 자태로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모서리가 잔뜩 닳은 고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친숙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한국인, 멀어도 중국인 정도로 보였다. 흐리멍덩하게 슬픈 듯한 옆 모습. 단색의 옅은 머플러가 옷깃 주위에 헐렁하게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한쪽 발을 들들 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끌림처럼 그녀 맞은 편에 앉았다. 해면처럼 부드러운 먼지가 부유했다. 그녀의 이마가 조명에 반짝였다. 뜨뜻하고 푸르뎅뎅한 여드름이 잔뜩 붙었다. 타닥거리는 옅은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얽히고설킨 사이처럼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몰아의 표정. 아무런 변화가 없는 얼굴은 마치 정지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 위쪽 여닫이 창문 틈으로 번지르르하게 빗은 붉은 햇살이 넘어왔다.
마침내 그녀가 눈을 들었다. 잠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에게 영어로 쓴 쪽지를 건넸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모르겠다.
“Are you korean?” 그러자 한글로 된 답장이 돌아왔다.
“국적, 태생, 혈통에 따라 다 달라요.”
“그럼 혈통이겠군요?” 나는 나직이 그녀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네. 그렇죠. 참고로 미국 태생에 프랑스 국적이죠. 그쪽은요?” 여자가 속삭였다.
“모두 한국입니다.”
“적어도 헷갈리지는 않겠네요. 혹시 데이트 신청할 생각이라면 하세요. 참고로, 입맛은 이탈리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