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사랑 4

by 남킹
섹스는 대화보다 낫다. 대화는 섹스하기 위해 참아내야 하는 고통이다. - 우디 앨런


‘아 오늘이 그 날이었어?’ 언제나 꼼꼼하게 수첩이든 휴대전화든 닥치는 대로 적어 재끼고, 틈만 나면 읽어 재끼는 그녀에게 절대 있을 수 없는 변명거리다.


‘아 미안, 정말 미안, 도로에 차들이 꽉 찬 거 있지.’ 이 대목에서 픽 웃음이 나온다. 이곳에서 단 한 시간을 보낸 여행객이라도 이 변명이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여긴 도대체 도로를 마련한 시 당국이 창피하게도 차들이 없다. 관광지도 아니고 공장도 없고 도시로 가는 길목도 아니고 무수하게 펼쳐진 목초지와 온갖 종류의 밭 그리고 그 한가운데 광장과 코딱지만 한 시청, 잡화점, 카페 두 개만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갖추어 진 게 다행이다.


그나마 방문객이 있다면, 틀림없이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순례자가, 이곳에서 2km 떨어진 매우 가파르고 거친 암벽 사이에 우뚝 솟은 수도원을 찾는 것과 길 잃은 방랑객이 우연히 도착하는 것.


사실 미자는 전자에 나는 후자에 해당하겠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방문의 목적은 약간 다르다. 그녀는 가톨릭 집안에 입양되어 유아세례를 받고 무수하게 많은 미사와 성경 공부를 한 것은 틀림없지만, 성인이 되자마자 종교의 구속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녀가 이곳 수도원을 찾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책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나의 방문은 한마디로 혼란과 탐색이다. 멍청한 내비게이션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길치와 다름없는 나는,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탈리아 오지 탐험을 충동적으로 시작하고 말았다. 물론 즉흥적이지만, 나의 실행을 이끈 배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외로웠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세상에 적응하게 되리라고 막연하게 추측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나는 직장 상사, 가족, 친구 혹은 정부의 잔소리가 점점 듣기 싫어졌다. 어떨 때는 참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나를 표현하는 형식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나를 옥죄는 사슬로 바뀌었다.


미자의 얼굴은 모가 난 듯 투박스럽다. 그리고 쉼 없이 흔든다. 그녀가 내 집에 처음 온 건, 비 내리는 이른 아침이었다. 기다란 깔 때 모자와 붉은색이 감도는 슈미트 가방, 은색 캐리어를 끌고 왔다. 발을 녹색 발판에 문질러 구두에 묻은 흙을 털고는 성큼성큼 들어왔다.


가까운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부스스 잠을 깬 나는 환영 속으로 마지못해 문을 열어 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마치 자기 집인 양, 트렌치코트를 훌쩍 벗어 침대로 던졌다. 그리고는 다른 가방을 벌컥 열더니, 방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줄을 걸치고는, 비에 젖어 책장이 말린 책들을 조심스레 꺼내어 줄에 나란히 걸기 시작했다.


“도와줄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좁은 공간이 책들로 이내 비좁았다.


책 널기가 끝나자, 그녀는 소형 냉장고를 벌컥 열고는 맥주 캔을 따서 꿀떡꿀떡 삼켰다. 내가 아끼던 마지막 술이다.


“야, 안주 없냐?” 냉장고 문을 닫으며 그녀가 물었다. 안주가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석 달째 놀고 있다. 처음 회사에서 잘렸을 때는 매우 두려웠다. 갑자기 아무 할 일이 없게 되자 ‘절망적이야’. 하는 초조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하지만 일주일쯤 지나자 약간 견딜 만했다. 한 달쯤 지나니 편해졌다. 두 달쯤 되니 아주 편해졌다.


마치 감옥을 탈옥한 죄수가 된 기분이다. 미래는 두렵지만, 현재는 달콤하다. 물론 저축한 돈은 이제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아무리 좋게 잡아도, 앞으로 3주쯤 지나면 거리에서 구걸할 판이다. 그런데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는다. ‘나는 진정한 자유를 찾은 걸까?’ 어쩌면 사르트르 말대로,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짐을 풀지도 않은 채, 노트북 폴더를 열고 음악 사이트에 접속하여 자신의 <플레이 리스트>를 틀었다. <프로그레시브 테크노> 음악이 삽시간에 코딱지만 한 공간에 가득하다. 그녀는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키보드를 신나게 두드렸다.


“마감이 얼마 안 남았어.” 그녀는 블로그에 집착한다. 스스로 정한 시간까지 업데이트하여야 한다는 강박을 가졌다. 그녀는 <중세 역사와 문학, 철학>에 대한 연구에 몸이 달아 있다. 게다가 그녀는 황감하게도 적잖은 돈을 지니고 다녔다.


“순전히 운이지. 무척 돈이 많은 양부모를 만났거든. 게다가 무척 후하시기도 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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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킹 SF 소설집 - 2024-01-05T124017.36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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