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사랑 5

by 남킹

그녀의 노트북 배경화면에는, 그녀가 이탈리아에 온 첫날의 모습이 담겨있다. 화려하고 복잡한 로코코 양식 위에 걸터앉아 무진장하게 넓고 잘 정돈된 정원을 배경으로 소녀는 무척 밝게 웃고 있었다.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은 날이지.”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신 있게 그날을 설명해주었다.


“그냥 그렇게 느꼈어. 어느 날, 마치 내 주위에 있는 어른들에 의하여 억지로 떠먹여 지듯 양육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 꽉 쬐는 제복처럼 말이야.”

“그래서?” 나는 그녀의 가슴에 바짝 달라붙었다.

“뭐가 그래서? 그래서 그냥 나왔지. 아, 물론 무작정 나온 거는 아니고. 적어도 인사는 하고 나왔지.”

“자의식 과잉으로 항상 머릿속이 복잡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래서 지극히 단순한 곳을 찾았지. 바로 여기.”

“그러고 보니 벌써 삼 년이 훌쩍 넘었네.” 그녀의 날숨은 달짝지근했다.


“난 애인 같은 여자가 되고 싶었어. 위대한 연애 사건을 꾸미고 실천해보는 거지. 근데 세상은 자꾸 선생님같이 되라고 하는 거야.” 진한 키스가 오고 간 뒤 그녀는 찰랑한 눈망울로, 낮은 천장을 쳐다봤다.

“선생님?”

“응, 뭐 그런 거 있잖아. 훌륭한 예술가나 교육자나 의사 같은 거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여기 이렇게 혼자 있잖아. 이탈리아에서. 아무것도 아닌 채.” 여자는 콧등에 난 피지를 뾰로통하게 쳐다본다.

“그래서 위대한 연애 사건은 해본 거야?” 여자는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물면서 천천히 읊조린다.

“아니. 멍청한 놈들만 자꾸 걸려. 너처럼.” 나는 미자의 젖꼭지를 감싸며 크게 웃었다.


“내가 자꾸 멍청이라 해서 미안한데, 넌 사실 멍청하지는 않아.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는 말이야.”

“그 기준이 뭔데?”

“넌 지극히 세속적이잖아.”

“오, 그래? 멍청이의 반대가 세속적이라는 거야? 그럼 속세를 등진 구도자나 수도사들은 다들 멍청이겠네?”

“멍청이의 어원인 <스투피두스(stupidus)>는 모든 것에 놀라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자들이거든.”

“너는 정 반대잖아. 너무 닳고 닳아서 이젠 어떤 것에도 무감각하잖아. 그러니 멍청이는 아니라는 거야. 이 멍청아.”


그녀는 자기 생각을 항상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리고 주제는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직관적이고 결론적이며 편협하며 대범하다. 그리고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마치 말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섹스가 끝나면 우리는 나란히 천장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소곤거렸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한 가장 훌륭한 일은?” 그녀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묻는다.

“???”

“외계인을 친구로 만들어 버렸지.”

“하하하. 그럼, 그가 한 가장 나쁜 짓은 고고학자를 절도범으로 만든 거겠지?”


“왜 대부를 좋아하는데?”

“복잡하잖아. 주인공이 맞닥뜨린 상황도 갈수록 위태로워지지!”

“애걔걔, 겨우 그런 이유로 좋아한단 말이야?”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세계는 수많은 시련으로 가득한 곳이거든. 이 바보야.”


“한마디로 세상은 패배자의 논리로 가득하지. 미래를 그려낸 영화를 봐봐. 기계가 지배하거나 핵폭탄으로 모든 게 폐허가 되지. 여자는 아기를 낳지 못하고 원숭이가 인간을 대신하지.”


“내가 어떻게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겠어?”

“세상을 봐. 불행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떠들고 다니지.”

“파리에 폭탄이 터지고 뉴욕에 빌딩이 무너지고 배가 가라앉고 건물이 불에 타고.”

“나쁜 놈이 갑질하고 사기꾼이 정치하고.”

“매일 우리의 자랑스러운 아나운서가 불행을 전달하지.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봐봐. 우린 성공하거나 잘 된 사람들에 관해서만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잖아. 하지만 정작 필요한 건 실패한 것에 대해서 널리 알려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잖아.”


“경박하고 공허한 게 삶이야. 그러니 적어도 너는 살고는 있다는 거지.”


어떤 날은 가보트 음악을 틀어 놓고 나를 강압적으로 초대하여 무작정 춤을 춘 적도 있다.

새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우아한 모습으로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 그저 너와 같이 이렇게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 행복할 때가 있어. 어쩌면 그게 섹스보다 훨씬 나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 속에 네가 보이거든. 그래서 지금 행복해. 너도 그렇지?”

“그래도 난 섹스가 더 좋은데….” 나는 기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야.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선지자가 말씀하셨다? 바보같이.”

“왜?”

“어리석기 짝이 없어. 모든 것은 육체적 사랑이라고 말했어야지. 그랬으면 사람들이 훨씬 행복했을 텐데.”

“세상의 인간들을 봐봐! 철천지원수처럼 싸우고도 일주일 후면 여관방에서 키득키득하며 뒹굴고 있잖아.”


우리의 시간은 대부분, 대화와 섹스, 글쓰기, 책 읽기 그리고 약간의 영화 보기와 산책으로 이어졌다. 미자는 마치 진실인 양 감정이입을 잘 하였다. 무심한 얼굴에 내가 자극을 가하면 금방 깨어났다.

“정말? 와 소름 끼친다!” 이럴 때면 짙은 눈썹이 더욱 올라갔다.

“그래서?” 나의 말을 날름 가로채며 코가 닿을 듯 바싹 다가선다.

“이런 횡령꾼 아니 사기꾼 아니 협잡꾼 같으니라고!”

“이런! 재수 옴 붙은 날이네.”

“아무튼, 축하해. 너의 그 위대한 도그마는 언젠가 빛을 볼 거야.”

“나를 비꼬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하하하. 신성한 무지 또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니까.”


이별, 그 후


지식인이란 섹스보다 재밌는 '다른 하나'를 발견한 사람이다. - 올더스 헉슬리


미자는 느닷없이 나타난 것처럼 느닷없이 사라졌다. 지독한 더위와 가뭄이 작은 동네를 달구던 시기였다. 그녀가 내게 머문 지 3개월이 되었다. 텅 빈 방에, 그녀는, 쓰던 물건을 고스란히 남겼다. 책만 온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편지도 남겼다.


깨알같이 쓴, 그녀의 마지막 인사를 기대하였으나, 봉투 속에는 돈만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2주일을 더 버티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자 만료 직전에 독일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주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가정을 이루었고 아파트를 샀다. 그리고 늙었다.


내가 미자를 다시 만난 건, 대형 서점 신간 코너에서였다. <중세의 사랑> <오델리 송 저자> 첫 장을 넘기자, 그녀는 투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동안 그녀를 쳐다봤다. 내 기억 속에 사라졌던 그녀가 복원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책은 지나치게 두텁고 활자도 작았다. 나는 두툼한 돋보기안경을 걸치고 <3장. 이탈리아> 편부터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버스 민폐녀 (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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