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뜻대로 2

by 남킹

3.




“어 생각보다 지원자가 많네…….” 아내는 청소년 센터 강당 문을 비죽이 열며, 탄식 조로 나를 뒤돌아보며 말을 했다. 아내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기 시작했다. 우리는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에 떠밀려 강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내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안나는 강당 우측 모서리, 또래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흰색 혹은 연분홍 발레 연습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다양한 춤 동작을 취하며, 연습에 몰입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천천히 그녀 가까이 다가가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하지만 아이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시선을 천장으로 향한 채, 오른손을 위로 쭉 곱게 뻗으며, 왼쪽 다리를 들고 천천히 회전하는 동작을 연습하고 있었다.


“안나야…! 안나야…!” 아내가 두 손을 입 가까이에 둥글게 모으고 낮은 소리로 몇 번을 불렀다. 이윽고 딸이 알아채고 우리를 쳐다봤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어깨를 으쓱으쓱했다.

“저놈의 배짱은 누굴 닮았는지…?” 아내가 피식 웃으며, 나를 쳐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딸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에, 아내의 얼굴에 깃들었던 근심이 사라지는 듯 보였다. 동시에 나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안나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우리는 신도시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자그마한 크기에 턱도 없이 높은 매매가의 아파트를, 나의 급여 대비 상당한 부담을 느낄만한 대출을 끼고 구매했다. 아내의 끈질긴 요구에 결국 내가 승복한 것이다. 나의 출근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딸의 발레 때문이었다. 동시에 아내의 못다 이룬 꿈에 대한 강박이기도 하였다.

아내는 춤을 사랑하였다.


우리가 사실 처음 만난 것도 강남의 한 유명한 나이트클럽에서였다. 딸에게는 차마 나이트 부킹으로 시작된 인연을 밝힐 수 없어서, 모 미술관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아내와 입을 맞추었지만 말이다. 아내는 고지식하고 뼈대 있는 교육 집안의 장녀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대학 전공은 교육대나 인문대, 혹은 법대뿐이었다. 장인어른의 말씀을 빌리자면, 여자가 춤을 춘다는 행위는 '엉덩이에 헝겊 쪼가리 하나 걸치고, 허연 허벅지를 드러내고, 음탕한 짓을 하는 몸동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낙담한 아내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반항을 결심하였는데, 그것은 집에서 최대한 먼 곳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거였다. 하지만, 이 또한 집안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는데, 조신한 처녀가 늑대로 우글거리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혼자 자취를 한다는 게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한가지 묘안이 있었다. 집안의 대들보이자 3대 독자인 한 살 터울의 남동생이, 서울에서 편안하게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서는, 누나인 자신이 먼저 올라가서 미리 터를 잡아 놓아야 한다는 묘한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오랜 고집 끝에, 어렵사리 집안의 허락을 받아, 자유가 숨 쉬는 서울의 모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논리로 내세웠던 남동생은, 연거푸 대학에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방위병 근무까지 마친 뒤, 그녀가 졸업한 그해에, 겨우 턱걸이로 지방에 있는 모 대학에 입학하였다. 아무튼, 날개를 단 아내는, 각종 댄스 동아리에 가입하여 짧지만, 행복으로 충만한 대학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졸업이 다가왔다.


취업하려고 백방으로 쫓아다녔지만, 현실의 벽은 우리 시대 여성에게 너무 가혹했다. 미취업이라는 것은 그녀에게 곧 낙향을 의미했다. 그리고 낙향은 그녀에게 비극의 전조로 여겨졌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고별 댄스 모임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조용필이라는 명찰을 단 친근한 웨이터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아저씨, 저기 저 두꺼운 안경 쓰신 분 여기 자주 와요?”

“아뇨 처음 보는데요.”

“회사 다니는 사람인가?”

“뭐 배지 보니까 대기업 같은데요?”

“아 그래요? 그럼 저 좀 소개해 주세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춤으로 단련된 탄탄한 그녀의 몸매와 긴 생머리에 홀딱 빠져버렸다. 더욱이 그녀는, 내가 수십 번도 더 본 영화에서, 주연으로 나오는 <마이클 콜레오네>의 첫 번째 아내인, <아폴로니아>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의 아폴로니아를 운 좋게 찾은 것이다. 결국, 우리는 육 개월 뒤에 결혼했다. 그리고 다시 육 개월 뒤에는 안나가 태어났다.


내 생에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4.




“맹모삼천이 뭔지는 알잖아? 응?” 아내가 뜨거운 국 냄비를 살며시 내 앞에 내려놓으며, 입을 삐죽거리며 나를 내려보며 말했다. 식탁 한 귀퉁이에는 오늘 낮에 획득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모 아파트 안내 카탈로그가 놓여 있었다. 아내는 내가 해외영업부 차장으로 진급한, 올해 가을부터 줄곧 모 신도시로 이사할 것을 요구해 왔다. 아내의 얘기인즉, 그곳 신도시에 있는 모 청소년 수련관이 있는데, 그곳에 <프러미에 발레단>이 있다고 했다. 그 발레단은 너무도 유명하고 훌륭하여, 매년 수많은 대회에서 각종 단체 또는 개인 우승을 싹쓸이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지도교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 학교가 있는, 러시아 유학파라는 것이었다. 그 여선생님은 아주 대단한 안목과 열정을 지니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엄청난 카리스마를 풍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녀 밑에서 수학한 학생 중에는, 성공한 발레리나가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XX 발레리나도 그곳 출신이라고 하였다.

“그래, 그러면 이번 주말에 그 수련관인가 뭔가 하는 곳 한번 구경이나 가 보자….”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청소년 회관 복도 한쪽 벽면 전체가 상장과 트로피로 가득하다니까……. 글쎄…….”




5.




“송안나 학생 입장해주세요….”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딸아이를 호출하는 방송이 강당에 울려 퍼졌다. 대부분의 참가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돌아간 텅 빈 강당, 구석진 곳에서 아내와 나는 기다림에 지쳐있었다. 우리는 차가운 나무 바닥에 퍼질러 앉아 멍한 상태로 있다가, 안나의 호출에 잽싸게 정신을 가다듬고, 거의 동시에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우리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개를 들고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쭉 당긴 채, 칸막이가 디귿으로 가려진 곳으로 들어갔다. 나는 살금살금 뒤따라 가서, 칸막이 틈새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부를 지켜봤다.


안나의 맞은편에 3명의 심사위원이 앉아 있고, 그녀의 오른편에는 피아노와 연주자가 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심사위원 중 중간에 앉아 있는 여자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녀가 바로, 아내가 침이 닳도록 찬양을 하던, 바로 그 발레 선생이라는 것을 나는 거의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늘고 날카로운 코와 좁고 넓은 이마, 그리고 얇은 입술을 하고 있었다. 복도에 주렁주렁 걸려 있던 우승 사진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여자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화장기가 거의 없는 민얼굴이었지만, 입술에는 붉은 루주가 칠해져 있었다. 그녀는 안나에게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몇 가지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하얀 이를 크게 드러내며 씩씩하게 답변을 하였다.

“다섯 살 때부터요…….”

“.....”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배웠어요.”

“....”

“네, 춤추는 거 좋아해요. 엄마도 좋아하고요. 아빠는…….” 안나는 그 대목에서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선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빠는요……. 종일 누워서 TV만 보세요…….”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심사위원들도 덩달아 웃기 시작했다.

“어휴 남사시러버서…….” 어느새 아내가 옆으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 치며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쏘아봤다. 숨어서 지켜보는 데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안나는 이제 몇 가지 발레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발을 모아 팔자로 펼치더니 척추를 곧게 세우고 다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천천히 구부렸다 폈다를 하면서 까치발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였다. 아이의 눈은 절반쯤 감긴 채,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살짝 들고선, 전방을 보더니, 어느새 턴 동작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쭉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하면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10살짜리 어린이치곤 제법 그럴싸하게 보였다. 춤에는 문외한인 나의 눈에도 뭔가 모를 아름다움 같은 게 느껴졌다. 더욱이 그녀는 긴장하거나 위축된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오히려, 엷게 머금은 안나의 미소에서는 자만심마저 느껴졌다.

“너무 당당해 보이지 않나?” 나는 아내에게 고개를 돌리며 속삭였다. 그러자 아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쯧쯧 무식한 양반…. 도도함은 발레의 생명과 같은 것이여……. 모르면” 그 순간 나는 아내의 입을 손으로 털어 막았다. 왜냐하면, 다음의 말은 안 들어도 유추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모르면 잠자코 구경이나 하라고?” 아내는 시선을 문틈에 고정한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아주 밝아졌다.

“우리 안나는 진짜로 체질인가 봐……. 집에선 저 동작이 잘 안 되었거든……. 근데……. 신기하게 사람들 앞에만 서면…….” 아내의 얼굴에 확신이 묻어났다. 나는 살며시 그녀의 볼에 입맞춤했다. 어느새 강당은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거짓과 상상 혹은 죄와 벌 (22).jpg
신의 땅 물의 꽃 (2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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