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랑의 꽃봉오리는 여름날 바람에 마냥 부풀었다가, 다음 만날 때엔 예쁘게 꽃필 거예요.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하고보스의 대로변 사이에 난, 골목에 위치한 자그마한 이탈리안식 퓨전 레스토랑의 주인이었던 그녀는 음식을 판다는 고유의 목적에는 어긋 날정도로 단출한 테이블에, 훤히 다 보이는 투명 유리 넘어 행인을 바라보는 일에만 몰두하곤 하였다.
라후라가 제냐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스위스의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 (CERE)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30일의 휴가를 받아, 특별한 줄거리도 없이, 유럽 전역을 무작정 헤매고 다녔는데, 글자 그대로 헤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게다.
왜냐면 어떤 숙소나 정보도 공부하지 않은 채, 그냥 즉흥적으로 관심이 가는 곳으로 가곤 하였으니까.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사람이 붐비는 곳으로 가니 역이 나왔다.
라후라는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글자를 골랐다.
안도메란.
매표소에서 안도메란 편도를 끊었다.
친절한 매표소 직원은 좀 더 할인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고맙지만 그냥 비싼 티켓을 산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돌아다닌다.
배 고프면 식당에 들러 메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글자를 고른다. 혹은 그림을.
그리고 또 돌아다닌다.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그러다 날이 저물고 피곤이 몰려오면 숙소를 찾기 시작한다.
잘 보이지 않으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
주로 배낭을 멘 젊은이면 더욱 좋다.
그들은 고맙게도 매우 많은 정보를 지니고 다닌다.
값싼 유스텔 정보는 꿰고 다닌다.
어쩌면 동행이 되어 하룻밤 인연이 되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마을과 광장, 묘지, 다리 그리고 길을 돌아다녔는지, 아는 것은 그의 스마트 기기 내비게이션에 저장된 히스토리뿐이었다.
목적을 두지 않은 여행은, 우연이 뱉어낸 즉흥적인 감정의 쏠림에 따라, 햇살이 가늘어지거나 문득 어디서 본 듯한 친숙함이 들거나 혹은 판단이 작용하지 않는 멍한 상태에서도 주저 없이 머물곤 하였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런 사치도 이제 끝을 내딛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일주일이었다.
그러면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였다.
수많은 벽과 가로등, 광고판과 자동차, 사람 그리고 짙은 색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강을 품은 도시로 말이다.
톱니바퀴 속으로 그를 맞추어야 한다.
알람 소리에 깨고 지짐거리는 눈으로 전동차에 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만 할 것이다.
다시 결승선이 얼마 남았는지를 헤아리며 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의욕이 부침하는 과정에서 손쉽게 늙어 갈 것이다.
결코, 발버둥 쳐도 헐어버릴 수는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마지막 여행지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애초의 출발지에서 그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어느 방향에 위치한 지 혹은 이곳이 어느 나라 소속인지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를 만나기까지는 말이다.
라후라가 그날 역에 내렸을 때는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지독하게 내리째는 그야말로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기차를 탔고 무척 피곤하였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우선 숙소를 먼저 잡아서 그날은 그냥 잠으로 때워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담한 광장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여행객처럼 보이는 젊은이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유쾌한 대화를 나누며 가는 젊은 연인을 금방 발견했다.
그들의 안내대로 그는 유스텔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비교적 쉬운 방향이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곳이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같은 길을 여러 번 돌았다.
점점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분명 경험한 이에게는 쉬운 길이었을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뭔가를 놓친 것 같았다.
그렇게 화가 난 채, 30분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된 역전 뒷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그녀를 봤다.
아니 그녀가 그에게 왔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그녀는 식당 문을 반쯤 열고는 라후라에게 말을 걸었다.
“May I help you?” 그는 그 순간 그녀가 인도인인 것을 직감했다.
“혹시 인도인이세요?”
“아, 네. 혈통은 그렇습니다.
혹시 어디 찾고 계시는가요?
여러 번 이곳을 돌아다니시던데···”
“네, 유스호스텔 찾습니다.”
“아, 한국인이 운영하는 고향집 말씀하시는군요.
잠시만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가게 문을 닫고는 앞장선다.
그는 뜻하지 않은 친절에 방금 전까지 그를 괴롭혔던 화를 황급히 내려놓는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손수···”
“아니에요. 엄청 한가해요.” 그녀는 쾌활하게 뒤돌아보며 미소를 보낸다.
그리고 그 순간 라후라는 사랑이라는 열병에 그만 빠지고 말았다.
지독하게 맑은 하늘이었다.
그는 남은 휴가를 그곳에서 보냈다.
태양 속에 느긋한 일상을 보냈다.
긴 휴식을 취했고, 도시의 구석구석을 그녀와 돌아다녔다.
제냐는 느긋하고 푸근하였으며 삶의 기쁨을 품고 있었다.
“저는 비교적 단순한 편이에요. 아직까지의 제 인생은요.
철학을 전공했고 불가리아에 유학을 왔으며, 졸업 후 그냥 여기에 머물기로 하고 식당을 개업했죠.”
“요리를 좋아하는군요?”
“먹는 것은 좋아하죠. 요리는 그저 그래요.
그래서 메뉴도 딱 다섯 가지밖에 없어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죠.”
“그러다 망하면 어떡합니까?”
“단골손님이 몇 분 계세요. 대부분 은퇴하신 분이세요.
오시면 늘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휴가의 마지막 날, 그들은 같이 밤을 보냈다.
그녀의 방에는 작은 액자가 벽에 붙어 있었다.
이곳에 온 첫날의 모습이라고 하였다.
화려하고 복잡한 로코코 양식 위에 걸터앉아 무진장하게 넓고 잘 정돈된 정원을 배경으로 그녀는 무척 밝게 웃고 있었다.
“가장 행복한 날이었죠.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은 날이었죠.” 그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신 있게 그날을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자기 생각을 항상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마치 말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리고 주제는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직관적이고 결론적이며 관대하며 대범하였다.
그리고 늘 사랑과 용서를 갈구하였다.
그들은 나란히 천장을 바라보며, 이별의 고통을 감지한 듯, 마지막 밤이 새도록 소곤거렸다.
“저는 꿈을 사랑해요. 그래서 잠을 많이 자는 편이고요.
아니 자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제냐는 졸음이 한 움큼 달린 푸석한 얼굴에 눈을 반쯤 뜬 채, 배시시 웃으며, 라후라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날숨은 달짝지근했다.
그는 쏜살같이 흘러가는 그들만의 시간이 괴로운 듯, 불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디지털시계가 이미 새벽 5시를 알렸다.
“왜인지 아세요? 꿈속에서는 해방이 되거든요. 완전한 주체가 되는 거죠.
내가 현실에서 받았던 다양한 강요에서 풀려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하자고 한 약속이 일종의 강요라는 건가요?” 그의 마음에 없는 볼멘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나타난 게 고마울 정도로 그는 그녀에게 푹 빠져있었다.
“뭐, 사랑도 일종의 강요의 한 형태니까.
결혼 서약은 그 결정체죠.
죽을 때까지 당신만을 사랑하라고! 알았지! 재론 오방카스!” 그녀는 픽 웃으며 두 팔을 뻗어 그의 귀를 쭉 잡아당겼다.
“그래서? 제냐 아프로디칸스키씨! 나와 결혼하려고?” 그가 온종일 마음에 가득 담아둔 말이었다.
누가 톡 튕기면 폭하고 터질 듯이 부풀어있었다.
“어휴! 말을 말아야지.” 그녀는 재미난 듯 그를 쳐다본다.
“내가 어제 그랬잖아요.
나는 어쩌면 시작도 끝도 없고 입구도 출구도 불분명하며 안이 밖이고 위가 아래인 클라인 병 같다고.”
“그래서? 그게 우리의 결혼과 뭔 상관이에요?” 라후라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바보같이. 거꾸로 가는 인간과 함께하려고?” 제냐는 이제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라후라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다는 결혼 서약은 결국 세상을 위한 것일 뿐, 저와는 무관하다는 뜻이죠...
인간이 구축한 세상의 시스템에 부정적인 사람과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 불행한 인간이 되겠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그 순간, 행복을 느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다른 제도처럼, 하나의 상태 속에 갇히는 거라고 봐요.
그리고 특히, 당신은 곧 깨닫게 될 거예요. 그게 얼마나 답답한지를.”
“특히 왜 나지?” 라후라는 피곤한 눈을 크게 뜨고 제냐를 쳐다봤다.
“왜냐면, 심하게 자유로움을 갈구하잖아요.”
“내가?”
“네, 재론님, 한 달 동안 휴가를 어떻게 보냈나요?”
“그야, 자유롭게 발길 닿는 데로···” 그의 말에 제냐는 측은한 미소로 그를 바라봤다.
“난 뭔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내려놓았지.
그냥 내 시선이 가는 데만 보고 싶었던 거고...” 라후라는 자신이 내뱉는 말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사르트르 말대로,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상태를 우리는 자유롭다고 표현한답니다.” 제냐는 라후라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하였다.
“전 아담파 신자처럼 살고 싶었던 적이 있었어요.
블타바 강의 나체주의자 들어보셨나요? 권력도 계급도 노동도 화폐도 정부도 군대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사회 제도가 사라진 세상 말이에요.”
“언제부터?” 라후라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방 한쪽을 무질서하게 채우고 있는 수많은 책이 달려들 듯 위태롭게 쌓여있었다.
“오래전.”
“오래전? 모호한데.” 라후라가 제냐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물었다.
“어릴 때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였거든요.
내 물건에 절대로 남들이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죠.
특히, 내 동생에게는.
그런데 어느 날 깨우친 거예요.
내 모습이 남우세스러운 짓이라는 것을.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에 대해서도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세상에 묘한 매력을 느낀 거죠.”
“마치, 공산주의자 같은 느낌이 드는데?” 라후라는 제냐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렇지만은 않아요.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시작된 이상한 집착이 생겼으니까요.”
“이상한 집착?” 라후라는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야기에 대한 끝없는 끌림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책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어요. 어찌 보면 당연하겠죠.
책에는 숱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러다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인생을 늘 궁금해하죠.
바라봄의 즐거움과 몽환적인 생각이 삶의 기반이 되어 버린 셈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나와 아우르는 행위 말이죠.” 밝은 색의 헐렁한 옷 속으로 제냐의 부드럽고 앙상한 갈비뼈가 삐져나왔다.
“당신은 어떤가요?” 그녀는 사랑이 가득한 미소를 띠며 그에게 물었다.
“저는 아주 오래된 노래를 좋아했어요. 헤비메탈과 하드락... 고막이 찢어지게 크게 틀곤 했죠.
덕분에 지금도 가는 소리는 잘 안 들려요···그리고...” 그녀는 무척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낭만적인 연애를 하고 싶었고 가출도 해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거리를 떠돌던 애들과 며칠 동안 잔 적은 있어요.
그리고 형식과 예의에 무관심한 편이죠···그리고...
인공지능에 무척 관심이 많고요... 그리고... 그리고...” 라후라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마침내 고백을 하였다.
“저는 해킹을 합니다. 사피엔티아라는 조직에 몸담고 있어요.”
“해킹? 마치 범죄 조직처럼 들리네요.” 제냐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흔들리는 망막 속에 품은 갈등을 그는 느꼈다.
“그 반대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무척이나 은밀하면서도 사악한 집단에 대한 정보를···” 이 순간 그는 말을 끊었다.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튼 저는 당신을 지킬 거예요. 죽을 때까지···” 라후라는 제냐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어느새 그가 사는 곳에서 1600km 나 동쪽으로 와 있었다.
다음날, 작별은 짧았지만 발길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그는 그녀가 서 있는 플랫폼 기둥이 사라질 때까지 끝없이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