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뜻대로 4

by 남킹

9.




거의 일 년 동안 불쌍한 모녀는 다이어트에 매달렸다. 나는, 다이어트의 종류가 무궁무진하며 그 시장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사실, 평생 도대체 살이라는 게 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다이어트라는 용어 자체가 마치 수억 광년 떨어진 외계행성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친숙하다. 아주 친숙하다. 나는 간헐적 다이어트, 레몬 디톡스 다이어트, 원푸드 다이어트, DASH 다이어트, 황제 다이어트의 과정들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모든 게 나의 딸에게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현실에 꽤 많이 실망을 하곤 했다.


안나는 다이어트의 부작용, 즉 요요현상을 매번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었다. 못 먹어 지친 그녀의 몸에, 나날이 강도를 더해가는 발레 연습이,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하였다. 막다름에 몰린 그녀는 실수가 늘어나고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성적이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발레 공연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어느새 밀려 나갔다. 솔로 선발에서도 다른 친구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태평스럽고 대범하던 성격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불안해하고 신경질적으로 바뀌어 갔다. 엄마와 싸움이 잦고 누군가에 대한 알 수 없는 비난이 갈수록 늘어났다. 결국, 그해 겨울, 프러미에 발레단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발표회를 한 달 정도 앞둔 그 날, 안나는 발레의 꿈을 접고 말았다. 춤을 춘다는 게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그녀는 예술 중학교가 아닌 일반 중학교로 진학을 하였다.




10.




“아빠……. 음……. 피아노를 배울까 생각해요…” 안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을 길게 잡아당기며, 다분히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그녀가 중학생이 된 그해,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일찍 귀가한 나는, 모처럼 만에 가족들과 다정한 저녁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설레기도 하였다. 지난겨울의 아픈 상처가, 계절의 변화와 함께, 빠르게 아물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된 듯 보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예전보다 확실히 다시 밝아졌고 느긋해졌으며 농담이 늘어났고 새로운 친구들이 생겨났다. 나는 다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봤다.

“어디 봐둔 학원이라도 있어?” 나의 물음에 아내가 끼어들며 대답을 했다.

“저기 가동 아파트 상가 있잖아. 거기 로또 명당자리 있는 거기…거기 2층에 피아노 학원이 있는데, 안 그래도 오늘 낮에 안나하고 같이 가서 상담받고 왔는데…생각보다 되게 크더라고…선생도 되게 실력파셔…. 알고 봤더니 독일에서 유학했더라고…”


독일 유학이라는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쿡하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와, 씹고 있던 밥알을 거의 쏟아 낼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러시아 유학에 이어 이번엔 독일 유학이여?’라고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안나의 상처를 건드리고 나아가 우리 가족의 평화를 깨트릴 소지가 충분한 발언이라는 사실을 경각하고는 속으로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다소 과장된 표정으로, 놀라움을 표시하며 안나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이제 우리 딸, 피아니스트 되는 거야?” 그러자 안나는 눈알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으쓱하더니 웃으면서 말하였다.

“음…. 아빠가 머어었찐 피아노 사주면 한번 고려해볼게….” 그 말에 감당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밥알 몇 개가 입에서 뿜어져 흩어졌다. 그중 하나가 하필이면 아내의 입술 위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내는 그런 줄도 모르고 깔깔거리며 웃어 젖혔다. 우리 가족 모두 환하게 웃었다. 순간 아내의 모습에서, <마릴린 먼로>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주 잠시지만 말이다.




11.




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 가족은 전자 오르간을 사기 위하여 낙원 악기 상가를 찾았다. 피아노 대신 전자 오르간을 선택한 이유는, 아파트 특성상, 층간 소음으로 이웃들과 마찰을 빚을 수도 있거니와, 안나가 아직 초급 단계이므로, 부담 없이 가볍게 취미 생활로 우선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낙원상가가 초행길이었으므로 물어물어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반짝거리는 전자 기타들이 일렬로 쫙 늘어선 채 우리를 반기는 듯하였다. 뒤이어 고급스러워 보이는 피아노들이 눈에 들어왔고, 벽에는 다양한 종류의 현악기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져진 채,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사방팔방에 펼쳐져 있는 다양한 음악의 세상에, 감탄의 시선으로 훑고 지나갔다. 이윽고 우리는 유리로 된 사각의 방에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그곳에는 멋진 전자 오르간들이 계단식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중년의 아저씨가 반가운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딸아이가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초급 학생을 위한 적합한 악기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안나를 보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한 뒤, <인기 상품>이라는 마크가 붙어있는 오르간의 파워를 켠 뒤, 한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귀에 익숙한 곡이었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피아노곡 중의 하나였다. 아내도 아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안나는 감탄의 표정으로 연주자의 손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나머지 손으로 여러 가지 스위치와 다이얼을 만지기 시작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다양한 음질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리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신기한 듯 웃었다. 덩달아 연주자도 신이 난 듯, 연주 속도는 빨라지고 음향효과는 더 다양하게 바뀌었다. 나중에는 드럼 소리에 천둥 치는 소리, 돼지 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우리는 이 신기하기 짝이 없는 악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망설이지 않고 구매를 결정하고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청년이 큰 박스 하나를 가져와 내게 안겼다. 박스에 포장된 전자 오르간이 눈대중보다는 꽤 커 보였지만, 다행히 무게는 가벼운 편이었다. 아내와 나는 박스의 양 끝을 두 손으로 각자 받쳐 들고, 좁은 복도를 조심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안나가 갑자기 휙 고개를 돌리더니

“아빠 고마워……. 열심히 할게…. 난 아무래도 음악 쪽인가 봐….” 하면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끙끙거리며, 뒤따라오던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에구 아빠 닮아서 좋겠수…….”

“아빠도 음악 좋아하는 거야?”

“너희 아부지……. 말도 마라……. 음악 한다고 가출까지 한 분이시란다…….” 이 말을 들은 안나가 재밌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아빠! 정말 가출까지 했었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이며 가던 길을 멈추었다.


마침 그곳에는 통기타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곳이었다. 나는 잠시 쉬어가자며, 전자 오르간 박스를 통로에 세운 뒤, 손에 잡히는 기타를 하나 쥐고는 바닥에 퍼질러 앉아 연주하기 시작했다. <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 내가 끝까지 연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곡 중의 하나였다. 나는 두 여인의 눈을 번갈아 쳐다보며 거만한 표정으로 기타 코드를 바꾸어 나갔다. 마치 전설의 기타리스트인 <지미 페이지>가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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