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은 끝에서 출발한다.
생체 인식 확인 절차를 마친 예레미는 물끄러미 <노붐 이니티움> 보안 기지국 현판을 바라봤다. 늘 들었고 가슴에 새긴 말이다. 그가 태어난 2066년을 다들 <아마겟돈>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제 서른세 살이 된 그는, <목성> 외계 소속 <가니메데> 항시 보안청 최고 단계의 훈련을 막 수료한 상태였다. <칼리스토> 외곽 제38 분쟁 접경지역 파견 근무 7년, <유로파> 제5 경시청 최고위 수사관으로 7년을 무사히 보낸 그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다.
그는 이제, 사건과 분쟁이 있는 곳이라면 태양계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 그의 모든 인체 정보는 4,500개의 우주 양자 정보 센터에 레벨 1로 동기화되었다. 10억의 <자연계 인간> 중 단지 0.1%에 해당하는 상위 신분이 된 것이다. 즉, 그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은 이 세상에 없다.
“이해되지 않는군요. 왜 당신은 <어비스>로 가려고 하는가요?” 제냐가 낮은 전자음으로 물었다. 제냐는 <스카이데크> 사에서 출시한 분쟁 조정 특화 시스템 인공지능 바이오 7.14678 버전이다. 예레미가 가는 어느 곳이든 간에 그녀는 함께 할 것이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전쟁이 있는 곳이라면….” 예레미는 진지한 미소를 띠며, 600개의 모니터 중 한 곳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흐릿한 영상 속에, 수백 개의 전투 드론이 지독한 먼지를 뿜으며 지상의 반란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냐는 슬픈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물론 나도 알고 있어. 생존 귀환율이 채 30%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그런데도 어쩌겠나…. 늘 가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곳은 당신이 태어난 곳도, 심지어 당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도 아니잖습니까?” 제냐는 이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목소리 톤을 높였다.
예레미는, 줄곧 모니터에 주시하던 시선을 천천히 제냐에게로 돌렸다. 그는 그녀를 쳐다볼 때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과 감성에 늘 감탄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제냐의 투명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를 사랑했다. 어머니와 흡사한 눈빛이었다.
어머니는 예레미가 10살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지구에서 고도 1만 km에 떠 있던 4만 개의 피난 인공위성 중 하나에서였다. 극심한 식량난과 연료 부족으로, 당시 피난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부족함은 존재 가치를 가볍게 만들었다. 연일 폭동과 살인이 일어났다. 부유한 자들은 달과 화성 등, 이미 테라포밍을 완료한 외행성 영역 식민지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군인과 투쟁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은 지구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은 방사능 오염이 덜 된 극지방과 태평양 섬들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인공위성에 남은 이들은 늙고 병든 자, 여자와 어린이들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굶어 죽어갔다. 이미 수천 개의 위성은 떠 있는 공동묘지였다.
예레미를 구한 것은, 컬렉터로 알려진 노예상이었다. 그들은 피난 위성을 돌며 버려진 어린아이들을 모아, 새로 건설한 식민 행성의 입주민들에게 팔았다. 90억 명의 지구인은 대멸종 이후 9억 명으로 줄어들었고, 그중 태양계 행성으로 이주한 이는 고작 100만 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값나가는 귀한 존재였다.
예레미는 그가 팔린, 그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영문도 모른 채, 노란 병에 담긴 액체를 마시고, 얼마 남지도 않은 몸속의 음식물을 모두 게워낸 그는, 얼음장같이 차갑고 좁은 캡슐에 갇힌 채,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캡슐 유리에 비친 그의 얼굴은, 이미 체념과 피곤함에 절은, 마치 운명의 선고를 받은 자 같이, 굴곡이 선명하였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태양계 광범위 표준시각으로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외행성 섹터에서 외곽에 속하는, 목성계 초기 식민지 건설을 담당하던 한 부국장의 아들로 입양이 된 거였다.
예레미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제냐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풀거리는 그녀의 갈색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몸을 어르는 즐거움.
그녀의 입술에 그의 손끝을 대어 본다. 부드러운 감촉 위에 콧바람이 머문다. 새큰거리는 여자의 다문 입술이 십 대 소녀처럼 보였다. 둥글고 짙은 눈에 붙은 무거운 눈썹. 그녀는 살짝 눈을 흘기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간. 웃음이 만드는 합죽한 모습. 그런 찰나의 순간은 언제나 내밀한 그들만의 사랑이었다.
그는 제냐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투박하지만 그 속엔 그를 사랑하게 만든 따스함이 배어있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느꼈던 그리움이었다.
윤곽이 도드라진 곳에 그녀의 연분홍빛 젖꼭지가 달랑거렸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느끼며 말랑한 가슴을 만졌다. 그리고는 그녀의 불룩한 허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미세한 움직임. 그는 보름달처럼 부푼 제냐의 배에서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꼈다. 눈으로 다시 보고 귀를 갖다 댔다.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그는 점점 달아오르는 자신을 느꼈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김이 목을 태우는 듯하였다. 그는 이윽고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확신에 찬 어조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곳은…. 내 어머니가 나를 잉태한 곳이니까.”
모니터에는, 죽어가는 인간을 형체도 없이 갈가리 찢어버리는, 포격이 생생하게 잡혔다. 뼈대만 남은 앙상한 빌딩이 쓰러질 듯 늘어섰다. 도시는 참혹하게 비었다. 정지한 세상. 육중한 기계 무리가 꼼지락거린다. 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지구. 푸른 행성. 하지만 지금 그곳은 더 이상 생명이 살 수 없는 검은 심연. 어비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삶은 사라진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