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먼 길 육교를 두리번거리며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버스와 차량 사이 짙은 바람이 훅훅하며 할퀴고 갔다.
혼자서 버스를 타고, 늘 가던 그 모텔, 같은 호실에 들어갔다. 데스크를 지키는 청년이 나를 보더니 익숙한 미소와 함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혼자세요?”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왔어요.”
“아. 네.” 나는 서둘러 키를 받았다. 녀석이 신기한 듯 목을 길게 빼고 싱긋이 웃는다.
나는 이런 변명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곧 후회가 왔다. 나는 알고 있다. 남자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이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거잖아. 바보같이.’
늘 안방처럼 친숙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오래전에 맡았던 향기가 간헐적으로 솟아 나온다. 마치 삶과 시간을 연결하는 끈이 있어서 어디든 연결된 느낌이다. 나는 내가 속한 곳에 묶여버린 것 같다.
직장, 남자, 여관, 집 그리고 이 도시. 번잡하고 지나치게 복잡하고 무질서답게 보이지만 사실 언제나 따지고 보면 외롭고 썰렁하기 짝이 없는 이곳.
하지만 나는 도시를 떠날 수 없다. 늘 마음은 이국의 낯선 태양을 바라보지만, 현실은 무기력하고 슬프며 아프고 혼란스럽다. 자극에 민감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정신병에 주눅이 든 채 늘 불분명한 실체와 상상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창이 붉었다. 바람은 거칠고 하늘은 투명하였다. 나는 커튼을 젖히고 길게 숨을 쉬었다. 갑자기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 느껴졌다. 대지를 가르는 높은 하늘. 적막한 방에 정적은 깊고 슬펐다.
나는 옷을 벗고 탕에 물을 가득 받았다. 뜨거운 물이 철철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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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하게도 결혼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 갈수록 명확해지고는 있었다. 그러므로 홀가분한 감상에 주안점을 두었다기보다는, 한심한 관계로 발전하는 것 같은 다소 지저분하지만 좀 더 인간적이고 속된, 그런 분위기에 휩싸이는 순박함을 애초에 차단하였다는 점에서 배신감 같은 분노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우리의 다툼은 침묵보다 무거웠다. 입을 다문다는 것. 그러므로 용서와 화해를 시간의 긴 장막 속에 내버려 둔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는 녹슨 옥상 문을 연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더없이 상쾌한 하늘. 여전히 푸른 기운을 감싸고 있는 해안선이 선명한 만을 끼고 있다. 검은 어둠 사이로 밝게 빛나는 굴곡진 언덕과 경사가 가파르게 늘었다 줄어드는 광경이 어지럽게 펼쳐진다. 감정의 격앙이 밀려온다. 깊은 어둠에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보인다. 내가 발버둥 쳐도 건너갈 수 없는 공간들. 고통이 쇠잔한 이마에 걸려 있다.
불가지의 세상에서 기지를 꿈꾸는 우리가 불쌍하고 초라하다. 속수무책으로 뒤틀리고 우울했던 날들이 아직도 내 몸속에 납덩이처럼 남아 있다.
비정형의 얼굴 모습을 바라봤다. 나는 아무것도 표현되지 않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연락이 왔어.” 남자는 싱긋이 웃는다.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는 즐거우면 무표정하고, 우울할 때면 피식거리며 웃곤 한다. 그의 얼굴이 감정을 고대로 전달하는 순간은 섹스할 때뿐이다. 그때만 비로소 인간답다.
“신문사에서 먼저, 학교에서 나중에.”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복학하라고…. 뭐…. 한 번씩 터지는 입시비리 같은 거야. 내가 당했다는 것만 빼고….”
“갈 거야?” 남자는 줄곧 나를 보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그를 바라본다.
“아니….” 그가 비로소 나를 본다. 이제껏 보지 못한 무미건조한 표정. 그는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마치 측은함이 온몸을 덮은 듯한 외로움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가 내 곁을 떠날 것을 알았다. 그 순간,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그의 욕망을 느낀 것이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그는 다시 시무룩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의 눈에도 피로와 따분함이 물들었다. 그는 방전된 배터리처럼 의자에 축 걸터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한번 쓱 문지르고 다시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내게 몸을 가까이 다가가며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내게 물음을 던진다.
모든 기억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조각 조각나고 단편은 이어지지 않는다. 삶을 행복으로 채웠던 쪼가리 시간.
멍청하게도 죽음의 그늘에 삶을 지나치게 보듬으려고 애쓴다. 생각하면 하등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건만 아등바등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난 고통을 생각했고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느껴왔다. 악당의 죽음을 바라보며 시원하다고 느끼며 극장 문을 나서겠지만, 그건 바라보는 당신의 마음이지 죽은 자는 어떤 느낌, 즉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
차가운 바람이 분다. 멋 내려고 골라 입은 얇은 잠바로, 추위가 무자비하게 들어왔다.
귓전을 때리던 세찬 바람은 으르렁거리며 몰려다닌다. 양 사방에서 할퀴듯 대든다. 바람은 지친 낙엽과 헤진 비닐을 그냥 두지 않는다. 기어이 들어 올려 먼지 속으로 던지듯 날리며 성난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비쩍 마른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천천히 나아간다.
나는 천천히 공기 속으로 내 몸을 맡긴다. 바람 속에 분해되는 나의 몸뚱이. 비로소 자유가 찾아온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래, 고통은 아주 짧게 끝날 거야. 곧.’ 나는 그 순간, 비로소 남자가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글픈 나의 사랑에 작별을 고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