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여자가 나타났다. 나는 서둘러 마무리를 짓고 계산을 한 후, 여자와 함께 이미 어두워진 좁은 골목으로 나왔다. 인적은 드물고 밤바람은 고요함으로 살랑거렸다. 우린 아무 말 없이 그냥 걷고 있다.
마치 우리가 가야 할 곳, 혹은 가는 길은 향락도 슬픔도 아닌, 마치 마르세유 궁전의 곧게 뻗은 정원을 호기심 어린 관광객들이 걷는 듯, 뚜벅뚜벅 걸어가기만 하고 있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 꿀꺽하고 쑥 내려가 버린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가까워져 온다. 당구장에서 시켜 먹은 짜장면 냄새가 스멀거리며 목구멍에 올라온다. 나는 담배를 물고 여자의 얼굴을 슬쩍 훔쳐본다. 말이 없다는 것은 화가 많이 났다는 뜻이다.
어느덧 우린 사거리까지 왔다. 뜨거운 모래 위를 걸은 듯 정수리가 갑자기 뜨끔뜨끔 아파진다. 나는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배는 불렀지만 참고 먹어야 만 할 것 같았다. 말없이 모퉁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드르륵거리는 문소리에, 그녀의 발자국 그림자만 개발새발 밀려 들어오는 것만 같다. 다들 떠난 자리에 빈 그릇들만 덩그러니 식탁에 헝클어져 있다. 낡은 식탁과 의자, 문과 벽 천장에서 청국장 냄새가 깊숙이 베어 나왔다.
종업원이 한번 흘낏 보고는 고개만 한번 까딱거린다.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두리번거림도 없이, 성큼성큼 빈자리에 가 앉는다. 나도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끈적거리는 식탁 위에 팔꿈치를 괸 채, 청국장 백반을 주문했다.
벽에 붙어 털털거리는 선풍기에는 먼지와 기름때가 켜켜로 쌓여 있다. 옆 식탁에 팽개쳐진 잔반에 파리 때가 몰려 있다.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진다.
나는 여자를 쳐다본다. 까만 실을 길게 뒤로 묶은 그녀의 머리 위에도 파리가 앉는다. 앉은 채 몇 번을 방향만 틀더니 다시 날아 식탁 모서리를 거쳐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마론 인형처럼 가늘고 곧다.
나는 그녀의 초점 잃은 시선을 따라 차림표 옆 낡은 액자를 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푸시킨의 시가 기도하는 소녀와 함께 담겨 있다. 어릴 적, 이발소에서 본 것과 같은 것이다. 동네 목욕탕에서도 봤고, 시내버스에서도 봤다.
익숙하게, 잊히지 않을 만큼 보아 온 것이지만, 하루에도 수백 번 변화하는 감정의 골을 따라, 무심하던 글귀가 어느덧 내 삶의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 올 때도 있었다.
바로, 머리를 자르러 간 입영소 이발소에서, 같은 액자를 마주하게 되었고, 나는 다가올 두려움을 애써 떨치기 위해 수없이 이 시구를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종업원이 엽차를 가져 왔다. 한 모금 마시려는데 쉰내가 확 풍기는 게 욕지기가 치밀었다. 속이 울컥하며 메슥거리기까지 하였다.
나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하는 격한 분노에 휩싸였다가, 여자의 눈에 고인 반짝이는 이슬을 보고 말았다. 여자가 그만 만나도 괜찮다고 한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기어드는 것 같은 말끝을 따라 희미한 한숨을 묻어 냈다.
그렇지만 나는 그저 액자만 보면서 중얼거릴 뿐이다.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