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은 춤을 춘다. 3

by 남킹

퇴근할 때쯤, 남자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사무실에 오는 모든 전화는 내가 가장 먼저 받는데도, 남자는 전화를 잘 하지 않았다. 아니 잘 못 한다고 해야겠다. 전화를 받고 몇 초간 숨소리만 들리면, 나는 그인 것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고 상냥한 어투로 천천히 말을 했다. 그러면 그는 안심이 되는지, 간략하게 목적만 전달하고는 끊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지 말고 볼링장으로 곧장 오라 하였다. 과외비를 받았으니 사겠다고 하였다. 처음 사귄 후 몇 달 동안은 줄곧 내가 돈을 냈다. 남자는 무직이고 거의 빈털터리로 지내면서도 돈 벌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일 조금씩 타내는 그의 용돈에서는, 담뱃값과 라면, 김밥 정도밖에 충당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나 또한 말단 여직원이 받는 쥐꼬리만 한 봉급이 다였기에, 우리는 편의점에서 산 간단한 음식을 싸 들고 여관에서 주말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마저도 버거웠다. 그러다 남자는, 내가 내는 일방적 데이트 비용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컸던지, 어느 날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하면서, 내게 그가 받은 한 달 수업료를 주는 거였다. 한 푼도 안 빼고. 그리고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내게 주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는 더욱 많은 돈을 내게 주기 시작하였다. 현수가 받는 돈은 이제 내가 버는 돈보다 더 많았다. 하지만 맡겨두고 찾아가는 돈이 더 많을 때가 가끔 있었다. 하지만 나는 뭐라 하지 않았다. 남자는 돈에 무관심하고, 나는 그 무관심에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는 대개 기품이 있어 보였다. 적어도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 비교하자면 그렇다. 그는 넓은 세상의 주변에서 살기보다는, 자기만의 작은 세상의 중심에서 살아가는 듯이 보였다. 그는 삶의 한 가닥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 세상을, 그저 낮은 눈으로 바라보는 방관자처럼 보였다. 또한, 그는 우리가 아니라고 우기기도 하지만, 실상 우리 삶을 지배하는 돈에 대한 과도한 욕망에서 살짝 비켜 나온 듯 홀가분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있으면 쓰고 없으면 말고 식이다. 참으로 편리하기 그지없다. 그에 반하여, 나는 현재라는 좁은 발판 위에서 끝없는 돈에 대한 갈증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자꾸만 발을 헛디디고 고통 속으로 떨어지기가 일쑤였다. 풍족한 적이 없었다는 것과 또 앞으로도 풍족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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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장 입구에 꾸며놓은 분수대에 작은 새가 물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목욕을 하고는 쏜살같이 날아갔다. 이런 탁한 도시에 아직도 새가 산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렸다. 볼링장 문을 열자 둔탁한 공 굴리는 소리와 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몰려왔다. 동시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마구 헤집었다.


현수가 보였다. 예의 고급반 스터디 멤버들과 함께 있었다. 남자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모두가 나를 일제히 쳐다봤다. 그들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남자에겐 친구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많은 것도 아니고 친밀한 것도 아니었다. 어떨 땐 줄곧 혼자고 어떨 땐 줄곧 같이 있었다. 마치 그는 내게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느껴지는, 소원함 대 친밀함, 혹은 융합 대 개별의 문제를 너무도 쉽게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다.


멤버 중엔 여자들도 있다. 오늘은 그중 한 명만 보였다. 그녀는 꼭 낀 스트레이트 팬츠에 <I Love NY>이 새겨져 있는 티셔츠를 맵시 있게 걸치고 나왔다. 바싹 마른 체형에 반짝이는 작은 이마와 뾰족한 턱선이 마치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인처럼 보였다. 여자가 무거운 공을 힘겹게 던지며, 돌아서서 애써 가쁜 숨을 골라 뱉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중동의 열사 지방에서 태양을 한껏 받은 듯, 하얀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시선을 딱히 고정할 수가 없어서 주위를 둘러보는 척했다. 나는 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 때문에 현수와 심하게 다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지난달에 스터디 회원들끼리 수영장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나는 그들의 사진 속에서 이상한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현수 바로 옆에 이 여자가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패션 잡지에서나 볼 듯한, 야하기 그지없는 비키니를 입고선. 내가 이 사실을 지적하자 남자는 피식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순간, 마치 ‘속 좁은 인간은 어쩔 수 없어’ 하는 듯한 빈정거림으로 비쳤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래서 마구 화를 냈다. 속 좁은 인간의 특권인 양, 그동안 담아 두었던 아주 사소한 불만까지 덤터기로 쉼 없이 쏟아부었다. 그리곤 참을 수 없는 침묵이 찾아왔다. 남자는 거의 한 달 동안 나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내가 사과했다. 우리의 싸움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나만 화를 내고 나만 사과를 하였다. 그는 절대로 나를 어르고 달래지 않았다. 그냥 두고 볼 뿐이었다. 언제까지나. 나는 차라리 핍박이라도 당해 봤으면 하고 느낄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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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같이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서 빌딩을 나왔다. 시커먼 하늘 사이로 흐릿한 달빛이 흘러갔다.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인적이 없는 길에 바람만이 형상 없는 손님처럼 왔다 가며, 잡동사니를 뿌리고 다녔다. 골목을 가득 채운 많은 식당이 이미 문을 닫았거나 닫으려고 하고 있었다. 갑자기 빡빡한 인심과 조급한 안달로 가득한 도시가 홀연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입구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식당으로 들어가 가장 빨리 나온다는 순댓국을 주문했다. 과연 종업원 말대로 번개처럼 음식이 차려져 나왔다. 나는 허기로 쓰러지기 직전인지라 염치 불고하고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그렇게 허겁지겁 먹다가 순간, 나는 남자가 먹는 모습을 쳐다봤다.


내가 좋아하는, 이 남자를 나는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덧없는 것을 두려움 없이 감싸 안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지금 느끼고 아파하고 있다. 남자의 세상에 내가 너무 속물다운 걸까? 아니면 속물다운 세상에 내가 너무 충실한 걸까? 그도 아니면 우리는 그냥 단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신의 땅 물의 꽃 (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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