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그레고리 흘라디는 차창 밖을 응시했다. 황금빛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하지만 헤스티아 성은 다가갈수록 점점 밝아졌다. 성벽 위에서는 작은 등불들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깜박였다. 그 안으로는 굵은 베이스의 테크노 비트가 어지럽게 어우러진 레이저 광선을 흔들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입구에 차를 세웠다. 흰 장갑을 낀 안내원이 잽싸게 다가왔다.
발렛파킹 서비스입니다.
차 문을 열고 발을 내딛자, 그를 반겨줄 음악이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그는 안내원에게 키와 팁을 건넸다. 그리고 입구에 마련된 접수대에 초청장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스테판 홀트 님.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문을 지나 그레고리는 내부로 들어섰다. 홀 양옆에는 불빛에 비친 샴페인 잔과 맥주잔이 가득 차 있었다. 밤하늘을 향해 솟은 촛불 모양의 조명이 모든 통로를 밝혔다. 높은 천장에는 옥색의 장식 천이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묵직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고 수많은 색상의 조명이 내부를 환상적인 분위기로 물들였다. 음악은 홀 내부를 채우며 미로처럼 얽혀 퍼져나갔다. 눈부신 공연 무대에는 화려한 복장을 한 연주자들이 신시사이저를 연주하며 청중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파티장은 인산인해였다.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치장한 남녀가 즐겁게 춤추고 있었다. 나비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한 그레고리는 오히려 생뚱맞은 느낌을 받았다. 테크노 음악의 매혹적인 리듬에 맞춰 사람들은 마치 중력을 초월한 듯 자유롭게 몸을 흔들었다. 초록색과 빨간색, 파란색의 레이저 광선은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흐르며, 환상적인 빛의 장막을 만들었다.
파티장은 한 폭의 예술 작품이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풍성한 황금빛 가운과 보석으로 장식된 마스크로 그레고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레고리는 잠시나마 이리나를 떠올렸다. 그녀의 투명한 눈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마치 풀밭에 피어난 아침 이슬과도 같았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창이었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그의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리나. 사랑해.
그레고리는 이리나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면서 자유로운 환상 속으로 빠져들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이곳에 즐기러 온 것이 아니다. 그는 파티장을 지나 성벽을 따라 뻗은 길로 나갔다. 점점 음악 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속으로 자연의 소리가 커졌다. 바람 소리. 새 소리. 발소리. 마침내 요란한 장식을 한 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림자 같은 인물이 그레고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스테판 홀트 씨, 혹시 무기를 휴대하셨나요?
아뇨.
그럼 잠시 몸수색이 있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그레고리의 몸 구석구석을 만졌다.
좋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그레고리는 그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한 장식의 넓은 통로 끝에 금장 색의 문이 그들을 맞았다. 잠시 후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레고리는 천장을 힐끗 한번 쳐다봤다. 짙은 색의 반원형 CCTV가 천장 각 모서리에 박혀 있었다. 사무실은 우아함과 화려함에 눈이 부셨다. 소파는 화려한 천에 싸여 있으며, 정교한 자수가 그려진 금색 실로 장식되어 있다.
이리로 앉으시죠.
그레고리는 안내에 따라 소파에 몸을 기댔다. 풍부한 쿠션과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감촉이 그를 편안함으로 인도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방을 관찰했다. 벽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도금된 나무 장식과 어우러져 고풍스런 역사의 흔적을 품었다. 벽면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와 아름다운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유난히 큰 창문과 그것을 부드럽게 숨기고 있는 화려한 커튼이었다. 밝게 빛나는 천은 불꽃놀이를 보는 것과도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이윽고 반대편 문에서 중년의 신사 2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그레고리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가브리엘입니다. 그리고 옆에는 변호사 보리슬라프입니다.
네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스테판입니다.
저는 에둘러 말하는 것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네 저도 그게 편합니다. 말씀하시죠.
우리 사업이라는 게 무척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것이라는 것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항상 살얼음 위를 걷는 거죠. 한 번만 삐끗하면 모든 게 끝장이니까요. 그런데도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이 사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첫째도 신중함. 둘째도 신중함. 셋째도 신중함 덕분이었죠.
네.
특히 저희와 첫 거래를 하는 고객이라면 무척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테판 씨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네,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스테판 씨를 조사했습니다. 전문가를 동원해 아주 깊이 조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 대한 파악이 완료되셨나요?
네, 어느 정도는 되었습니다.
가브리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흡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희 사업 아이템이 늘 이런 불확실성과 불안전성, 고위험은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에 대한 보상도 클 수밖에 없는 거고요.
네, 그렇죠.
세상에는 이름난 부자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부자가 더 많죠. 우리 고객의 대부분은 바로 알려지지 않은 부자들이죠. 그분들은 뭐든 꼭꼭 감추려고만 하십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부자들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들이 중국이나 인도의 저 외딴 시골의 졸부가 아닌 이상, 부자들의 이야기는 늘 주변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테판 씨에 대해 저희가 파악한 바는 무척 고무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요?
유럽 석유, 철강 산업으로 유명한 가벤스 가문 혈통, 하버드 경제학과, 투자 회사 설립. 막대한 자산 보유, 매년 수백만 달러의 기부….
네, 제대로 조사하셨군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다고요?
이런 분이 왜 저와 이런 말도 안 되게 위험하고 불법적인 거래를 하시려고 합니까?
네, 그건….
그레고리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빠트리고 조사하셨습니다.
빠트렸다고요?
네, 투자 회사에 관한….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가 그러하니 지난달 17일 자 파이낸셜 지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브리엘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변호사가 휴대폰에서 기사를 검색하여 그에게 보여주었다. 기사를 훑어본 가브리엘은 눈만 그레고리에게 향한 채 물었다.
이 기사가 사실입니까? 폰지 사기 의심 정황.
사실입니다. 저 기사를 본 저희 최대 고객이 투자금을 회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큰돈이 필요한 거고요.
완벽하군요.
네?
그레고리는 가브리엘이 완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 일종의 불안을 감지했다.
완벽하게 준비하셨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레고리는 그 순간 푹신한 소파에서 가시 바늘이 솟구치는 불편한 환상을 겪으며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가브리엘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변호사가 자리를 털고 나갔다. 뒤이어 검은 슈트에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남자 4명과 호리호리한 모습의 여자가 들어왔다. 남자들은 그레고리 주변을 둘러쌌다. 그리고 여자는 가브리엘 옆에 섰다. 그레고리는 이제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확신했다. 그는 다시 큰 창문을 쳐다보며, 정장 안쪽 주머니에 꽂혀 있는 만년필을 팔꿈치로 살짝 누르며 확인했다.
폰지 사기라? 음, 멋지군요. 그러니까 당신은 번듯하게 투자 회사를 차려서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속이고 고객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꼬리가 밟히자 그 돈을 메꾸기 위해서 무기 브로커인 나에게 접근했다. 그 말인 거죠?
네, 말하자면…. 그렇죠.
멋진 시나리오입니다.
나를 믿지 않는군요.
물론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방금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당신은 사기꾼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제가 믿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지금 코너에 몰린 것은 확실합니다. 당장 큰돈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는 이 여인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군요?
네?
그레고리는 급히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수수한 하녀 복장에 깡마른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엉거주춤 가브리엘 옆에 서 있었다. 가브리엘은 다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그녀는 소파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신중함으로도 모자랄 때가 있어요. 상대가 작정하고 속이려 든다면 걸려드는 거지. 별수 있겠어요. 게다가 그 상대가 거대한 비밀 조직이라면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레고리 씨.
그레고리의 머릿속이 스파게티처럼 엉키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알았는가? 저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이제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가야 하나?
그레고리는 공들인 그의 첩보 활동이 한순간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다.
솔비타, 고개를 들어 그레고리 씨를 보세요.
가브리엘의 요청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레고리를 쳐다봤다.
솔비타, 당신 고향이 어디인가요?
시시포스입니다.
그녀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곳에서 15년 전 당신은 무슨 일을 했나요?
호텔 객실원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레고리 씨를 아는가요?
네, 저희 호텔 단골손님이었습니다. 항상 후하게 팁을 주셨고요.
그럼, 15년 전 그 뜨거웠던 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죠?
네, 그레고리 씨와 동침한 여인이 베란다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그 후 그레고리 씨는 어떻게 되었나요?
잡혀갔습니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그레고리 씨가 맞나요?
네, 맞습니다.
가브리엘은 빈정거리는 표정으로 그레고리에게 말했다.
알고 보니 시시포스에서 모르는 이가 없더군. 시시포스의 바람둥이. 그런데 시시포스의 감옥은 스파이 교육도 하나? 응? 그레고리 씨.
그 순간 그레고리는 잽싸게 호주머니에서 만년필을 뽑아 가브리엘의 팔을 비틀면서 뒤로 돌아 들어가 그에 목에 만년필을 살짝 찔렀다. 그리고 크게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마! 너의 주인이 죽는 것을 보지 않으려면 그 자리에 멈춰! 알겠어! 이 머저리들아!
그레고리를 둘러서 있던 경호원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솔비타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 도망쳤다. 가브리엘의 목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이 이러지 마시오! 좋게 좋게 말로 합시다!
조금 전의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가브리엘은 애원하듯 외쳤다.
내가 알고 싶은 거는 너도 알고 있잖아! 가브리엘! 너 목을 베는 거는 순식간이야! 그러니 너가 말해봐! 도대체 어디서 핵탄두를 가져오는 거야? 도대체 누가 그거를 너에게 팔아달라고 요청하는 거야? 어서 사실대로 말해!
그레고리 씨!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당신이 성장했던 그 시시포스가 어떤 도시인지를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시시포스라니? 시시포스가 왜?
당신의 그 대단한 첩보 기관에 제발 역사 교육 좀 하라고 하세요! 시시포스는 아무것도 아닌 곳이었어요. 농사도 안되는 그저 버려진 척박한 땅이었어요. 우리나라가 어떤 곳이에요? 비옥하기 그지없는 검은 흙으로 둘러싸인 곳이라고요. 시시포스만 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별안간 도시가 들어섰어요. 그리고 소련 서기장이 매년 빠짐없이 그곳을 방문했고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럼?
맞아요. 당신 형제들이 뛰어놀던 그 땅의 지하에는 수십 개의 비밀 저장고가 있어요. 그리고 지금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 간의 전쟁이 시작된 거고요. 당신 형만 아니었으면 당신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못했을 거예요. 알겠어요?
그럼, 내 형이? 올리거가?
네, 당신 형이 내게 부탁했어요. 목숨만은 살리라고.
그럼, 젠장! 그 무기 판매상이 올리거란 말이야? 이 더러운 새끼야!
불쌍한 그레고리. 당신은 형들이 그저 술만 파는 조직 폭력배 정도로만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당신 동생 빅토르가 국방 연구소에 근무하는 게 단지 우연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레고리는 그 순간 힘이 쭉 빠져 하마터면 쥐고 있던 만년필을 놓칠 뻔하였다. 지난 일 년간 그가 추적했던 모든 의문이 삽시간에 분명하게 다가왔다. 빈 곳. 텅 빈 곳으로 고통이 채워졌다.
그레고리는 큰 창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우두둑 뜯어진 커튼, 와장창 부서진 유리 조각과 함께 밑으로 떨어졌다. 철퍼덕하며 물속으로 떨어진 그는 하염없이 내려갔다. 그레고리는 사전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곳이 수족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안쪽 주머니에서 점착 폭탄을 꺼냈다. 그리고 수족관 전면을 차지하는 거대한 유리에 부착했다. 그리고 속으로 카운팅을 하면서 최대한 빨리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키며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새 가브리엘의 부하들이 바깥에서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생포하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하 몇 명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그레고리 발밑에서 강한 폭발 진동이 올라왔다. 하지만 수족관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미세한 금만 났다. 당황한 그레고리는 다시 잠수하기 시작했다. 부하들도 맹렬히 그를 쫓아왔다. 그는 금이 간 유리 벽을 발로 세차게 찼다. 하나, 둘, 셋. 그의 발차기는 가브리엘의 부하들이 그를 잡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레고리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떼거리로 몰려온 그들은 그레고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고 위로 떠올랐다. 그들이 가까스로 수면 위로 얼굴을 드러내고 참았던 숨을 쉬는 동안 수족관이 깨졌다.
그레고리와 가브리엘 부하들은 점점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친 거품과 함께 수많은 흑해 물고기가 떠내려가는 물결을 따라 황급히 몸을 버둥거렸지만, 속수무책으로 떠밀려갔다. 그레고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지를 틀어가며 물결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겼다. 그는 꼭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살아서 시시포스와 그의 형제들에게 다가온 암울한 기운을 꼭 밝혀야겠다고 결심했다.
*************
성으로 연결된 좁은 도랑을 통해 탈출에 성공한 그레고리는 본부에 연락하기 위해 휴대폰을 켜려다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빠른 걸음으로 주택가 근처 골목으로 갔다. 인적이 드문 곳에 주차된 차량을 발견한 그는 익숙한 솜씨로 차 문을 따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재빨리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는 차량 내비게이션을 켜고 오데사 항구를 검색하여 입력했다.
예상 운행 시간 : 4시간 13분. 고속도로는 한가했다. 그는 차량 속도를 최대로 올렸다. 주위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변했다. 그는 차창을 활짝 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순간의 한기가 그의 지친 몸과 영혼을 자극했다. 검은 하늘. 검은 세상. 그리고 어둡게 가라앉은 마음.
그레고리는 동생 빅토르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자신과 멀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레고리는 누구보다 그를 살뜰하게 챙겼다. 숫기도 없고 외톨이에, 학교에서는 왕따인 그를 일진으로부터 지켜 준 건 그레고리였다. 그는 빅토르의 수호자였다. 하지만 빅토르가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어느 시점부터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뚜렷하게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는 그레고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젠장, 나는 그저 내 형제와 조용히 살고 싶었단 말이야.
그날, 그레고리가 군대에 끌려가던 날, 바로 고속도로에서 비로소 그는 알게 되었다. 빅토르의 고통을. 그가 왜 나를 외면하는지를. 막내 세르게이는 마침내 그레고리에게 자신만이 간직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이리나의 딸 나타샤의 아버지가 빅토르라는 사실을. 그레고리는 그 순간 좌절했다. 그는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가여운 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불쌍한 동생을 배신하고 절망으로 빠트린 것이다.
이후, 그레고리는 시시포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모든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전혀 낯선 곳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았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지금 다시 빅토르를 만나려 하고 있다. 지금 동생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는 동생의 수호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