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마음

by 남킹

가을의 데이터가 에덴의 인공 기후 시스템을 스쳐 갔다. '코어' 구역의 공원에는 홀로그램 단풍이 붉게 물들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누구의 마음에도 닿지 않는 공허한 코드의 나열일 뿐이었다.

그 사건 이후, 보랑의 세계는 온통 청호라는 존재로 채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홀로그램 창을 띄워놓고 그날 몰래 복사해 온 로그 파일을 열어보았다.

STIGMA_7734.log

화면 가득히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신경계에 가해진 전압, 뇌파의 비정상적인 진폭, 고통에 반응하는 생체 신호의 기록이었다. 그 무미건조한 데이터의 행렬 속에서 보랑은 기계가 아닌 한 인간의 처절한 비명을 들었다. 그녀는 파일을 닫지 못했다. 잠들기 전이면 늘 그 파일을 열어보는 것이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그것은 끔찍한 고통의 기록이자, 그녀가 처음으로 목격한 인간다운 저항의 증표였다.

어느 날, 보랑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그 해커… 유청호라는 사람, 이대로 '언더'에서 썩게 둘 순 없어요. 그의 재능은 진짜예요. '옴니-텍'의 하급 연구원으로라도 채용할 순 없을까요?"

보랑의 어머니는 딸의 눈빛에서 단순한 동정 이상의 감정을 읽었다. 그녀는 딸의 행복을 바랐지만, 동시에 남편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것이 위험한 줄다리기임을 직감했지만, 딸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 자리였다. 맹 회장이 최고급 배양육 스테이크를 썰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보, 유생원이라고 아시죠?"

맹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유생원은 청호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낡은 시대의 호칭이자, 그들끼리의 경멸이 담긴 별명이었다.

"알고말고. 왜?"

"여름에 회장님께서 직접 '처리'하신 그 해커 말입니다. 보랑이가 그러는데, 그 아이의 코딩 실력이 아까우니 우리 회사에서 거두는 게 어떻겠냐고… 아무래도 그 애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 같아요. 준구와의 약혼은 세 길 네 길 뛰면서 싫다고 하니,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뭐? 미친 소리!"

맹 회장의 포크가 접시 위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어디 인재가 없어서 '언더'의 데이터 기생충 따위를 들인단 말인가? 준구는 '코어'의 혈통에 전투 시뮬레이션 실력도 최고인 인재야. 그런 애를 싫다니, 딸의 판단 회로에 녹이라도 슨 모양이군."

"하지만 여보, 그 데이터 해킹 사건도 사실은 준구가 청호를 꾀어서 벌인 일이라고 합니다. '미들' 구역의 보안팀 관리자들 사이에서 나온 이야기예요. 보랑이는 청호가 동료를 위해 입을 다문 것이 진정한 엘리트의 품격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매파를 보낸 심정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흥. 유생원이 그래서 왔었군. 그놈이 준구 이름을 말하지 않은 건 기특하지만…." 맹 회장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어. 그 집안은 근본 없는 '언더'의 쥐새끼들이야. 그런 집안과 창피해서 어떻게 비즈니스 파트너가 된단 말인가. 그런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시오."

맹 회장은 화가 나는 듯 테이블 위의 호출벨을 눌렀다.

"보랑이 들여보내."

잠시 후, 보랑이 아버지 앞에 조용히 섰다.

"너, 그래. 어디 남자가 없어서 데이터 도둑놈과 연을 맺으려 하느냐? 응?"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아버님. 소녀와 혼담이 오가는 권준구라는 사람은 그 데이터 도둑질의 대장이었다고 하옵니다."

이 말에는 맹 회장도 할 말을 잃었다.

"이년! '코어'의 딸이 아비 앞에서 말대답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입은 하느님이 생각과 감정을 말하라고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코어'의 입이나 '언더'의 입이나 같은 기능을 한다고 아뢰나이다."

"뭐, 뭣이! 저 건방진…!"

"그럼 소녀가 감정을 거세당한 안드로이드처럼 되었으면 아버님 마음에 드시겠나이까?"

맹 회장은 기가 막혔지만, 속으로는 딸의 당돌함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기개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면서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좌우간 혼사는 부모의 뜻대로 하는 법이다. 네 감정 따위는 회사의 중요한 M&A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어!"

"아버지와 딸은 가장 가까운 혈연이라고 생각하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 마음을 회사의 자산처럼 취급하시나이까? 아버님은 어머니와 결혼하실 때, 서로의 가치를 데이터로 환산하여 결정하셨습니까?"

"뭐, 뭣이 어쩌고! 세상이 뒤집히려고 이러나! 당신, 대체 딸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저렇게 버르장머리가 없단 말이오!"

맹 회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간 후, 어머니와 딸은 마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머님, 아무튼 저는 그 청호라는 분이 아니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어요."

"얘야, 어디 '코어'의 처녀가 그런 말을 하는 법이 있니.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이 맺는 계약이란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건 아버지나 어머니의 계약이 아니라 제 인생이에요. 그런데 왜 제가 제 인생의 파트너를 고르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보랑의 생각은 2099년의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진보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자신이 본능적으로 이끌린 그 감정이야말로, 모든 것이 통제되고 계산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진짜라고.

한편, 맹 회장은 자신의 방식대로 '모욕'을 되갚아 주었다. 그는 '언더' 구역의 모든 데이터 브로커와 시스템 관리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유청호, 코드네임 '블루레이크'의 디지털 ID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라고.

그날 이후, 청호는 단 한 줄의 코드 일감도 받을 수 없었다. 그가 접속하는 모든 구인 게시판에는 [접근 거부: 5등급 위험 인물]이라는 붉은 낙인만이 찍혀 있었다. 동생의 약값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맹 회장은 종아리를 때리는 대신, 그의 생명줄을 서서히 끊어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절망의 늪에서 청호는 복수심과 함께,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했던 그 당돌한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은 어둠 속 유일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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