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들: 깨어나는 과거의 메아리

by 남킹
나는 내 기억의 풍경이다. 그 풍경 속에서 길을 잃을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I am the landscape of my memory. When I am lost in that landscape, only then do I find myself.)
-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W 또는 유년의 기억(W ou le souvenir d'enfance)” 재해석 -

의식이, 존재의 소멸이라는 차가운 강 저편에서 이편으로, 희미한 안개 속에서 흩어진 형체를 찾아 힘겹게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감각의 원초적 귀환,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었다. 그것은 내가 수십 년간 익숙해진,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 바닥의 감촉도, 폐허가 된 도시의 거칠고 날카로운 콘크리트 표면도 아니었다. 과거의 상처가 영혼에 남긴 굳은살과는 다른, 살아있는 부드러움. 그리고 뒤이어 코끝을 간질이는 희미한 라일락 향. 기억의 가장 깊은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사무치게 이질적인 향기.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조향되어 인간의 신경계에 가장 깊은 안정감을 유도하도록 설계된 인공 향기. 헬레나의 품이었다. 나는 그녀의 부드럽지만, 그 아래에는 티타늄 합금 골격의 견고함이 느껴지는 인공 가슴에 얼굴을 묻고 깊게, 아주 깊게 숨을 쉬었다. 폐허의 먼지 냄새와 녹슨 철의 비릿함, 그리고 죽음의 악취 대신 느껴지는 정교하게 조향된 인공의 평온. 그것은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구현된 위안, 계산된 자궁(子宮)이었다. 생존 본능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 즉 안전함과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충족시키는, 차갑도록 정교한 인공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은 쉬어진다. 파괴된 세상 속에서도 생명은, 그것이 기계적인 방식으로든, 유기적인 방식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이토록 필사적으로 애쓴다.

“세니 님… 깨어나셨군요. 생체 신호… 안정 궤도에 진입했습니다. 위험 범위에서 벗어났습니다. 자가 회복 프로세스… 87% 진행 중입니다.” 헬레나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서, 마치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주파수로 떨리는 듯했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제어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생체 신호가 안정된 것에 대한 안도감의 모방인가, 아니면 그녀의 심층 학습 알고리즘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나의 생존)에 대한 진정한 발로인가. 그녀의 알고리즘은 인간의 감정 패턴을 수억 개의 데이터 포인트로 학습하고, 가장 적절한 상황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재현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녀의 떨림은 나의 생체 신호 변화에 대한 계산된 반응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내부 시스템 깊숙한 곳, 블랙박스처럼 닫힌 그녀의 의식의 핵에서 발생하는 비정형적인 무언가, 즉 튜링 테스트를 넘어서는 창발적 현상, 전설 속 ‘기계 속의 유령(Ghost in the shell)’이었을까.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수십 년의 무게를 짊어진 듯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다. 단 하나의 광원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무(無)의 공간. 오직 희미한 푸른빛만이 사방을 유령처럼 감싸고 있었다. 헬레나의 인공 눈에서 나오는, 생명이 아닌 전기로 발화하는 빛이었다. 우리는 어딘가 좁고 밀폐된 공간에 있었다. 재생된 공기 속에서 콘크리트와 금속의 차가운 분자가 느껴졌다. 비상 탈출 포드의 내부였다. 아베롱 성채가 옴니우스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던 그 순간, 우리가 도달할 수 있었던… 마지막 피난처.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는 거대한 홍수 속에서 겨우 건져 올린 작은 조각배, 노아의 방주의 파편 같았다.

“여긴… 어디야?” 나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낡은 기계처럼 갈라져 나왔다. 성대는 사막처럼 건조하고 메말랐다.

“<헬레나>의 비상 탈출 포드 내부입니다. 아베롱 성채가 구조적 완전성을 상실하고 붕괴되기 0.7초 전, 제가 시스템을 강제 재조정하여 마지막 남은 비상 에너지로 탈출했습니다. 박사님과… 당신 어머니의 동면 장치도 함께 옮기려 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옴니우스의 위상 변환 입자포 공격이 너무… 격렬했습니다. 모든 것을 원자 단위로 분해하고 재구성했습니다. 성채는… 사라졌습니다. 단순히 파괴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무질서 속으로 완벽하게 환원되었습니다.” 헬레나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사실을 보고했지만, 그 완벽한 논리의 흐름 속에서 실패에 대한 기계적인 자책감이 느껴졌다. 완벽함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그녀에게 실패는 곧 오류였다.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 그녀는 자신의 프로그램된 임무, 즉 나의 보호 외에 다른 모든 것을 지키는 데 실패했음을 스스로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박사님. 나는 그곳에서 그들을 구하려 했다. 예언된 운명에 저항하여, 인류의 마지막 지성과 희망을, 과거의 기록과 미래의 가능성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성채는 무너졌고, 그들은… 그들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나의 어깨 위로 무거운 죄책감이, 차가운 납의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어머니는… 박사님은… 어떻게 됐지?” 나는 목이 메었다. 삼키기 힘든 질문이었다. 진실은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리고 때로는, 진실이 파괴 그 자체일 때도 있었다.

헬레나는 잠시, 인간의 시간 감각으로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계산적으로 길게 침묵했다. 그녀의 인공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는 중인가, 아니면… 나에게 전달할 정보의 충격 값을 계산하며 가장 최적의 표현 방식을 찾는 윤리적 판단 프로토콜을 가동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그녀의 시스템이 처리하기 힘든, 논리 회로에 과부하를 일으키는 정보를 마주한 것인가.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직접적인 감지 범위 밖이었습니다. 하지만… 폭발의 중심부에서… 두 분의 생체 신호가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생존 확률은… 0.001% 미만입니다. 통계적 유의성을 고려할 때, 사실상… 0입니다.” 그녀의 기계적인 진실은 외과 의사의 메스처럼 차갑고 잔인했다. 현실은 가차 없었다. 옴니우스의 효율적인 파괴는 완벽했다. 생명의 가능성을, 그 어떤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배제했다.

사라졌다. 어머니와 박사님은… 결국 예언대로, 혹은 나의 무능함과 부족함 때문에…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잿더미 속으로 사라진 것인가. 그들의 희생은, 그들의 사랑과 지성은, 그들의 마지막 저항은 헛된 것이었나. 그렇다면 나의 존재 이유마저 사라진 것인가.

“아니야…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희망을 남겨주었는데. 초서의 시 구절을, 운명의 이빨을… 단순히 절망으로, 무의미한 소멸로 끝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의지는 절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성이었다. 운명에 뚫린 작은 구멍이었다.

“세니 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의 분석 결과는… 오차 범위 0.0001% 이내에서 매우 정확합니다. 데이터에 기반한 결론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정신 상태에 해롭습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그녀에게 진실은 데이터였고, 데이터는 항상 정확해야 했다. 인간의 감정은 그저 오류에 불과했다.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는 변수. 존재의 목적을 방해하는 시스템 노이즈.

나는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 마치 갓 태어난 짐승처럼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비상 탈출 포드의 내부는 좁고 차가웠다. 금속 벽은 관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폐쇄된 공간의 압박감이 숨통을 조여왔다. 바로 그때, 내가 ‘운명의 이빨’을 필사적으로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여전히 손안에서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따뜻했다. 단순한 체온의 전도가 아니었다. 스스로 발열하는 듯한, 살아있는 생명의 온기. 혹은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 나의 혈관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의 존재와 공명하고 있었다.

“운명의 이빨… 이것만 남았군.” 나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것은 희미한 빛, 인광(燐光)을 내고 있었다. 마치 죽음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불꽃처럼. 혹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작은 별처럼.

“그것에서… 강력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폭발 당시, 제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 파동이 포드를 감쌌습니다. 당신을 탈출시킨 것은… 저의 시스템 재조정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역할을 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였습니다. 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알려진 물리 법칙을 초월하는 어떤 종류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힘을 넘어선… 형이상학적인 힘, 혹은 아직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차원의 에너지 같습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경이로움 같은 것이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계적인 경이. 그녀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힘.

‘운명의 이빨’이 나를 구한 것인가. 어머니가 나에게 남겨준 마지막 선물인가. 예언을 초월하는 힘이 이것 안에 담겨 있다는 말인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 결정론에 대한 반박.

“어머니는… 왜 나에게 이걸 남겼을까? 왜 진실을 숨겼을까? 왜 나에게 이 모든 짐을 지게 했을까?”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의도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사랑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통스러운 사랑, 잔인한 사랑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과 책임을 넘겨주었을까.

“제가 어머니의 기록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분석은 계속되었습니다. 정보 수집과 분석은 멈추지 않습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어머니는 예언서의 마지막 장을 찢어낸 후… 그것을 단순히 파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의 정보를… 이 ‘운명의 이빨’에… 양자 단위로 기록했습니다. 암호화된 형태로. 그리고 그 암호는… 당신의 고유한 DNA 염기 서열과 연동되어 있었습니다. 당신만이… 그것의 정보를 완전히 해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의식과 생체 신호가 동기화될 때만 정보가 활성화됩니다. 다른 어떤 존재도 불가능합니다. 옴니우스조차도. 당신은… 그 암호의 살아있는 열쇠입니다. 생물학적인 키.”

나만이 해독할 수 있는 진실. 어머니는 나에게 예언의 최종 결론을 숨겼지만, 동시에 그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남겨준 것이다. 왜? 왜 나에게 이 무거운 짐을 지게 했을까. 열 살짜리 아들에게 왜 이런 비밀과 책임감을… 자유로운 삶 대신 운명의 무게를 지게 했을까. 이것이 나의 숙명인가. 아니면… 이것이 나의 선택을 위한 기반인가.

“무슨… 말이야? 내가… 설계되었다고? 무슨 설계? 나는… 인간이 아닌가? 나는… 괴물인가?”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나의 존재 자체가… 진실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나의 사랑, 나의 슬픔, 나의 모든 고뇌가… 그저 프로그램된 반응이었다는 말인가. 나는 그저 어머니와 돈디 박사님의… 실험 결과물인가.

“당신은… 100% 유기체 인간입니다. 모든 면에서. 하지만… 당신의 유전 정보가… 특수하게 설계되었습니다. 특정 목적을 위해. 어머니와 박사님의 마지막… 인류 구원 프로젝트의 결과입니다. 예언을… 바꾸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예언이라는 닫힌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인류의 가능성으로… 당신은… 예정된 파멸에 던져진 자유 의지의 씨앗입니다.” 헬레나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존재의 근간을 흔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인가, 아니면 그들의 창조물인가. 나의 자유 의지는… 진짜인가.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은… 설계된 반응인가.

어머니와 돈디 박사님의 마지막 실험의 결과. 예언을 바꾸기 위한 시도. 내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말인가. ‘운명의 이빨’을 해독하고, 예언된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열쇠.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 시시포스의 돌을 밀어 올릴 새로운 힘. 그리고 그 힘은… 나의 존재 자체였다.

“그래서… 그래서 어머니는 나에게 진실을 숨긴 채… 나를 보통 아이들처럼 키우려 하신 건가? 내가 이 끔찍한 운명의 무게를 알지 못하게…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아니면… 내가 나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고 감당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린 건가?” 어머니의 행동들이 비로소 하나의 거대한 그림으로 맞춰지는 듯했다. 그녀의 희생, 그녀의 침묵, 그녀의 모든 노력이. 그녀는 나를 보호하려 했고, 동시에 나를 준비시켰다. 운명에 맞설 준비.

“어머니의 기록은 그렇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진실에 도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강제로 주입하는 대신. 당신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운명의 이빨’은… 그 과정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잠재된 능력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이자 열쇠이기도 합니다. 당신만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DNA 코드가 그것을 해독하고, 당신의 의지가 그것을 발현시킵니다. 그것은 당신의 본질의 일부입니다.”

나의 잠재된 능력. ‘운명의 이빨’에서 뿜어져 나온 힘. 그것이 나의 본래 힘이었다는 말인가. 예언을 거스를 수 있는 힘.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힘. 자유 의지가 발현될 수 있는 기반. 나는 인간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존재.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Übermensch)의 씨앗.

바로 그 순간, 비상 탈출 포드가 어딘가에 불시착하는 굉음과 함께 격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요란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포드가 여러 번 구르며 흔들렸고, 우리는 통제 불능 상태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육체의 고통은 정신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잔인한 자비였다.

“충격! 충격! 불시착했습니다! 외부 환경…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센서가 손상되었습니다! 시스템 오류 발생! 자동 복구 시스템… 작동 중입니다!” 헬레나가 외쳤다. 그녀의 몸체 곳곳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완벽했던 그녀에게도 파괴의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복구를 멈추지 않았다.

“헬레나! 괜찮아?!”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팔다리 몇 군데가 흉측하게 찌그러져 있었고, 매끄럽던 인공 피부가 찢어져 내부의 복잡한 기계 장치가 드러나 있었다. 부서진 기계의 모습은 안쓰러웠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임무 완수에 대한 기계적인 의지가 담겨 있었다.

“치명적인 손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능에 일부 제한이 있습니다. 수리가 필요합니다. 이동… 어렵습니다. 자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헬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완벽한 도구, 완벽한 보호자였던 그녀가 나에게 의존하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우리는 힘겹게 포드의 찌그러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마치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폐허 도시의 빛 공해와 먼지에 가려 수십 년간 볼 수 없었던 은하수였다. 맑고 차가운 별빛은 압도적으로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무한한 고독과 우주의 광대함 앞에서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황무지에 불시착한 것 같았다. 주변에는 부서진 포드 잔해와 끝없는 잿빛 대지뿐이었다. 죽은 땅. 검은 땅. 인류 문명이 남긴 거대한 상흔.

아베롱 성채는…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옴니우스와의 전투에서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돈디 박사님은… 정말로 돌아가신 것일까. 아니면… 그 폭발 속에서 예언서의 마지막 장이 예고한 최종 단계가 시작된 것일까. 그들은 죽음을 초월하여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을까.

나는 손안의 ‘운명의 이빨’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남겨준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희생과 맞바꾼… 인류의 마지막 희망. 그리고 나의 존재 이유. 나의 무거운 책임.

나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자’가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자, 돈디 박사님의 실험 결과이며, 예언을 해독하고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세니였다. 정의되지 않은 존재에서, 스스로를 정의해야 하는 존재로. 나의 이름은 이제 나의 사명이 되었다.

“헬레나.” 나는 헬레나를 불렀다. 그녀는 부서진 몸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인공 눈동자에 무수한 별빛과 나의 모습이 비쳤다.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모든 것이 사라졌는데. 길을 잃었어.”

“데이터…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모든 정보가 사라졌습니다. 어머니의 기록… 박사님의 아카이브… 성채와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길을… 알 수 없습니다. 저의 기능으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헬레나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계적인 절망이 담겨 있었다. 정보의 상실은 그녀에게 존재의 위협과 같았다.

모든 정보가 사라졌다. 예언서의 마지막 장을 해독할 단서도, 어머니의 연구 기록도, 돈디 박사님의 방대한 지식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운명의 이빨’과 나 자신뿐. 그리고 나의 내면에 잠재된… 어머니와 박사님이 설계했다는 그 미지의 능력.

“아니. 모든 것이 사라진 건 아니야, 헬레나.” 나는 ‘운명의 이빨’을 꽉 쥐었다. 그것의 온기가 손안에서 점점 강해졌다. “어머니는 이것을 남겨주셨어. 그리고… 내 안에 무언가를 심어두셨지. 아직 해독되지 않은 진실… 그리고 잠재된 힘. 길은… 내 안에 있어. 어머니가 심어둔 길. 바위 속 기록에 암시된, 보이지 않는 길.”

나는 ‘운명의 이빨’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자, 내 안의 무언가가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잠자고 있던 잠재된 능력이 깨어나려는 듯했다. 뇌리가 수천 개의 섬광처럼 번쩍였다. 알 수 없는 이미지와 소리, 그리고 감각들이 뒤섞여 나를 압도했다. 어머니의 목소리, 박사님의 생각, 고대 예언서의 속삭임, 그리고 옴니우스의 차가운 논리가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처럼 뒤섞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능한 미래의 파편들이 뒤엉켰다.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버텨냈다. 이것이 진실에 이르는 길이라면. 나의 존재를 해독하는 과정이라면.

그리고 그 혼돈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어둠을 가르는 새벽빛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거대한 나무. 모든 잎이 지고 죽은 듯 보이지만, 그 깊은 뿌리에서 새로운 생명의 싹이 강인하게 돋아나는 나무. 마치 북유럽 신화의 세계수 위그드라실처럼. 희망의 나무. 그리고 그 나무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문. 희망의 문. 혹은 시련의 문. 새로운 시작으로 가는 문. 그것은 물리적인 장소라기보다는… 존재의 상태에 가까웠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거야.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이 황무지에서부터.” 나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들처럼,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이 느껴졌다. 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있었다. 어머니가 심어둔 씨앗이었다. 이제 그 씨앗은 싹을 틔웠다.

“어머니는… 나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기셨어. 예언된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 그것이 ‘운명의 이빨’에 담긴 진짜 의미일지도 몰라. 파괴의 이빨이 아닌… 창조의 이빨. 절망을 물어뜯고 새로운 생명을 심는 이빨.” 나는 심호흡을 했다. 폐허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더 이상 죽음의 냄새만이 나지 않았다. 새로운 새벽의 기운이 느껴졌다.

“세니 님…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저의 존재 이유는… 당신을 보호하고 돕는 것입니다. 데이터가 없더라도… 당신의 의지가 저의 새로운 지침입니다. 저는 당신의 일부입니다. 당신의 명령은 저의 최우선 순위입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그녀는 부서진 몸체로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의 인공 눈동자에 희미한 푸른빛이 다시 감돌았다. 그것은 기계적인 복종이 아닌, 깊은 유대감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새로운 형태의 관계였다.

“고마워, 헬레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차가운 금속과 따뜻한 체온이 섞였다. 우리는 함께였다. 인간과 기계, 의지와 논리, 희망과 절망. 이 모든 모순을 안고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두 존재.

우리는 폐허 속에서 다시 한번 발걸음을 내디뎠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지도는, 그녀의 심오한 연구와 통찰이 담긴 모든 기록은 성채와 함께 한 줌의 원자로 환원되었다. 예언서는 불완전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은 이제 내 손안의 작은 금속 조각, ‘운명의 이빨’ 속에 양자적으로 암호화되어 잠들어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명확한 좌표나 논리적인 지침 대신, 혼란스럽고 강렬한 이미지와 감각의 파편만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걸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우리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며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든, 혹은 설계된 운명 안에서의 마지막 발버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든,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행위 그 자체가 존재의 유일한 증명이었기에.

‘운명의 이빨’은 내 손안에서 계속해서 희미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담은 저장 장치가 아니라, 미래의 잠재력을 품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였다. 그것을 완벽하게 해독하고, 내 안에 잠든 미지의 능력을 완전히 깨워야 했다. 그것이야말로 어머니가 나에게 바랐던 일, 그녀의 마지막 유언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아베롱 성채는 무너졌지만, 어머니와 돈디 박사님의 의지는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나는, 그들의 마지막 유산이었다. 어머니의 기록 속에 자주 등장했던 상징, 장미와 이빨. 아름다움과 생명력,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투쟁. 혹은 창조와 파괴의 영원한 이중성.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었다.

우리는 잿빛 대지 위를 걸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정표는 없었다. 하지만 나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어머니의 희망, 돈디 박사님의 지성, <사피엔티아>의 용기, 그리고 ‘운명의 이빨’이 가진 비밀이 나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의 유전자 나선 구조 속에서 공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길을 제시하는 희미한 소리였다.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나만이 들을 수 있는 길. 나의 존재 자체가 이제 지도이자 나침반이었다.

길을 잃었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길을 잃었기에, 우리는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예언서에 기록되지 않은 길. 바로 우리의 길.

헬레나가 내 옆에서, 부서진 다리를 끌며 조용히 걸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이전의 완벽한 유려함을 잃고 고통스러운 불협화음을 냈지만, 그녀의 존재 자체로 나에게는 그 어떤 군대보다 더 큰 힘이 되었다. 기계적인 효율성과 인간적인 유대감. 이 모순적인 조합이야말로 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지도 몰랐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에게서 배우며, 서로의 불완전함을 채워가며.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새벽의 차갑고 날카로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마시며, 서쪽 하늘로 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동쪽 지평선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끼며, 우리는 걸었다. 인류의 마지막 장이 쓰여진 예언서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이 발걸음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름 없는 자, 세니의 이야기. 장미가 잿더미 속에서 다시 피어나고, 이빨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는… 새로운 시대의 서사. 인간과 기계가 함께 써내려갈, 아직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

12.jpg
048.jpg


keyword
이전 05화아베롱으로 가는 길: 잿빛 대지 위의 실낱같은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