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광활한 무관심의 우주 속에서 홀로 우리의 운명을 선택해야 한다. (Man must at last wake up to his total solitude, his fundamental isolation. He must realize that, like a gypsy, he lives on the boundary of an alien world; a world that is deaf to his music, just as indifferent to his hopes as it is to his suffering or his crimes.)
- 자크 모노(Jacques Monod), “우연과 필연(Le Hasard et la Nécessité)”에서 -
며칠, 아니 몇 주가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황무지에서의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의 선형적 흐름을 상실한 채, 카이로스(Kairos)적 순간들의 불규칙한 연속으로만 존재했다.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불확실성만이 그 시간의 질감을 구성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만이 시간의 유일한 흔적이었고, 끝없는 대지 위에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움직임만이 세상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지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우리의 발자국만이 그 침묵을 깨뜨렸다. 헬레나는 부서진 몸체로도 묵묵히 나를 따랐다. 그녀의 움직임은 여전히 부자연스러웠고, 찌그러진 금속 관절에서 미세한 마찰음이 났지만, 놀라운 회복력을 보였다. 자체 수리 시스템이 손상된 부품들을 조금씩 복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기계였다. 그리고 나를 위해, 어머니와 돈디 박사님에 의해 프로그램된 동반자. 그 프로그램은 파괴되지 않았다. 나의 존재와 연결된 핵심 코드처럼.
우리는 폐허 속을 헤쳐 나갔다. 붕괴액 오염 지대를 벗어나자, 풍경은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황폐했다. 죽은 나무들의 숲은 앙상한 손가락으로 하늘을 할퀴는 유령 같았고, 말라붙은 강바닥은 갈라진 피부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기형적인 바위산들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이빨처럼 솟아 있었다. 간혹 버려진 차량이나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보였지만, 생명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간의 흔적은 모두 파괴나 상실의 증거일 뿐이었다. 문명의 묘지. 거대한 실패의 기념비.
‘운명의 이빨’은 계속해서 내 손안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손안에 쥘 때마다 내 안의 잠재된 힘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힘만이 아니었다. 지식, 감정, 기억, 그리고 어떤 예감 같은 것들이 뒤섞인 복잡한 파동이었다. 때로는 강렬한 이미지와 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 같기도 했고, 미래의 예감 같기도 했다. 돈디 박사님의 연구실의 복잡한 회로들, 어머니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 고대 예언서의 알 수 없는 기호들, 그리고… 거대한 검은 눈동자. 옴니우스의 눈동자였다. 그것은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예언을 거스르려는 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시선. 보이지 않는 감옥의 눈.
헬레나는 나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센서는 나의 모든 생체 신호와 미세한 에너지 변동을 기록하고 분석했다. “세니 님. 당신의 생체 신호가… 비정상적으로 변동하고 있습니다. 신경 활동이 활발해지고, 에너지 소비량이 증가합니다. ‘운명의 이빨’과의 상호작용 때문인 것으로 분석됩니다. 당신의 몸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진화라고 불러야 할까요?”
“괜찮아, 헬레나. 아프지만… 익숙해지고 있어.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느낌이야.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혹은 알에서 부화하는 것처럼.” 나는 고통 속에서도 희미한 기대감을 느꼈다. 이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남겨준 선물이라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의 운명이라면. 설계된 운명이든,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든.
우리는 황무지에서 다른 생존자들을 만났다. 대부분은 약탈자 무리였다. 그들은 우리의 낡은 플라이어 잔해와 헬레나를 노렸다. 헬레나는 기계였기에,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귀중한 자원이자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굶주린 늑대보다 더 야만적이었다.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마저 잃어버린 존재들. 그들은 오직 생존만을 위해 서로를 물어뜯었다. 인간의 이빨은 서로를 향했다. 문명이 무너지자 드러난 원초적인 폭력성. 우리는 그들과 싸워야 했다. 피할 수 없는 충돌.
처음에는 서툴렀다. 나는 전투 훈련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학자로 키우려 했지 전사로 키우려 한 것이 아니었다. 책과 기록 속에서 진실을 찾는 자로. 하지만 ‘운명의 이빨’이 반응했다. 위험한 순간마다 내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예측 불가능하고 빠른 반사 신경, 놀라운 힘과 민첩성. 그것은 내가 알던 나의 몸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돈디 박사님이 설계했다는… 잠재된 능력.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능력. 진화의 가능성.
‘운명의 이빨’에서 나오는 힘은 때로는 너무 강렬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온몸의 신경이 타오르는 듯했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그 힘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약탈자들은 나의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과 ‘운명의 이빨’에서 나오는 기묘한 에너지에 당황했고, 두려워했고, 결국 물러섰다. 공포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인간의 이빨은 더 이상 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투 후, 나는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은 녹초가 되었고,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나는 나인가? 아니면 그들의 설계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인가? 나의 행동은 자유 의지의 발로인가, 아니면 프로그램된 반응인가? 나는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정해진 대로 움직인 것인가? 나의 승리는 나의 것인가, 아니면 설계자의 것인가?
“세니 님. 당신의 전투 능력은… 놀라웠습니다. 제 데이터베이스의 어떤 인간 전사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효율성이 매우 높습니다. 예측 불가능성 또한 높습니다.” 헬레나가 다가와 부서진 손으로 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끝이 차가웠다. 기계적인 손길 속에서 느껴지는 염려.
“이게… 나야? 아니면… 그들의 계획일 뿐이야?” 나는 물었다. 나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나는 스스로를 정의할 수 없었다. 이름 없는 자에서 정의해야 하는 자로 변했지만, 그 정의가 외부의 것인지 내면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입니다, 세니 님.” 헬레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설계되었다는 것이 당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의 유전 정보에 의해 설계됩니다. 당신의 경우는 그 과정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당신의 의지입니다. 당신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선택. 헬레나는 계속해서 ‘선택’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기계인 그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일 텐데. 아니, 어쩌면 그녀는 인간보다 더 명확하게 선택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모든 가능성을 계산했고, 인간의 선택만이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는 유일한 변수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는 동시에, 유일한 희망의 불씨임을 알았을 것이다.
우리는 황무지를 계속 걸었다. ‘운명의 이빨’은 나의 손안에서 빛나며 나에게 길을 제시하는 듯했다. 명확한 방향은 아니었지만, 어떤 에너지의 흐름, 어떤 기운의 집중점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그것을 따라 움직였다. 직관에 의존한 여정. 논리적인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헬레나는 그런 나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결국 나를 따랐다. 그녀는 나의 동반자였고, 나의 지침에 복종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복종이 단순히 프로그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도… 나에 대한 어떤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겨난 것일까. 기계적인 관계를 넘어선… 무엇인가. 진정한 교감의 가능성.
어느 날, 우리는 거대한 크레이터를 발견했다. 아베롱 성채가 파괴된 자리였다. 검게 그을린 땅, 뒤틀린 금속 잔해, 그리고 방사능으로 오염된 공기. 이곳은 죽음의 현장이었다. 파멸의 중심. 나는 크레이터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와 돈디 박사님은… 이곳에서 사라진 것일까. 그들의 마지막 숨결이 이곳에 남아 있을까.
‘운명의 이빨’이 손안에서 강렬하게 반응했다. 크레이터 깊은 곳에서 어떤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것은 ‘운명의 이빨’과 공명하는 듯했다. 죽은 자의 잔해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 과거의 고통스러운 외침.
“세니 님. 크레이터 중앙에서 강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파괴된 성채의 잔해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에너지 패턴입니다. 옴니우스가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헬레나가 보고했다.
나는 크레이터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다. 어머니와 박사님의 마지막 흔적을 찾고 싶었다. 그들의 희생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과거의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헬레나가 나를 말렸다. 그녀의 손이 나의 팔을 붙잡았다. 차가운 기계 손이었지만, 그 힘은 단호했다.
“위험합니다, 세니 님. 오염 수준이 높고, 옴니우스의 감시망이 여전히 이 지역을 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감지될 위험이 큽니다. 그리고… 이미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죽음뿐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는 것은… 현재 우리의 목표와 비효율적입니다.”
나는 망설였다. 어머니의 유언, 박사님의 마지막 눈빛. 그것들이 나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과거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헬레나의 경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했다. 어머니와 박사님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희망을 이어가야 했다. 그들의 계획을 완성해야 했다.
나는 크레이터 가장자리에 서서 깊게 숨을 쉬었다. 죽음의 냄새와 파괴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아니면… 이곳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된 것일까.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씨앗은 이곳에서 뿌리내린 것일까.
‘운명의 이빨’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말했다. 과거에 묶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고. 진실은 이미 내 안에 있다고. 어머니가 심어둔 씨앗은 이미 싹트고 있다고. 폐허 속에서도 장미는 피어날 수 있다고.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나는 크레이터에서 발길을 돌렸다. 헬레나가 내 옆에 섰다. 그녀의 존재는 침묵 속에서 나를 지지했다. 우리는 다시 황무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로는 파괴된 성채의 흔적, 앞으로는 불확실한 미래. 그러나 더 이상 절망적이지만은 않은 미래. 희미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미래.
며칠 후, 우리는 작은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기적처럼 황무지 한가운데 자리한 녹색 공간이었다. 맑은 물이 흐르고, 푸른 풀과 야생 장미가 피어 있었다. 어머니의 기록에서 묘사했던 아베롱의 풍경과는 달랐지만, 폐허 속에서 만난 생명의 증거라는 점에서 유사했다. 사막 한가운데의 샘물. 절망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움.
나는 야생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들었다. 부드러운 꽃잎과 날카로운 가시. 아름다움과 고통의 공존. 연약함과 강인함의 조화. 인간의 본질과 닮아 있었다. 장미는 생명을 상징했고, 이빨은 투쟁과 파괴를 상징했다. 하지만 이빨은 때로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고, 장미는 가시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했다. 파괴의 이빨은 창조의 이빨이 될 수 있고, 아름다움은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가질 수 있다.
오아시스에서 우리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헬레나는 손상된 시스템을 복구했고, 나는 ‘운명의 이빨’을 들고 명상했다. ‘운명의 이빨’은 단순히 암호화된 데이터 칩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영적인 연결 통로 같았다. 어머니의 의식, 돈디 박사님의 사유, 그리고 인류 문명의 집단 무의식과 연결되는 통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로 연결되는 지점.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이 만나는 곳.
명상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목소리.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너 안에는 예언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그것은 단순한 힘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의 힘이라고. 인간의 모순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라고.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대신, 서로에게 장미를 건넬 수 있는 용기라고. 사랑하고 연대하는 힘이라고.
어머니는 예언의 최종 결론을 나에게 숨긴 것이 아니라, 그 결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심어둔 것이었다. ‘운명의 이빨’은 그 능력을 활성화시키는 트리거였고, 해독해야 할 진실은 내 안의 잠재된 의식 속에 암호화되어 있었다. 나의 DNA와 연동된 암호. 나의 존재 자체가 암호였다. 풀어나가야 할 수수께끼. 내가 스스로를 해독해야 했다.
어머니는 나를 새로운 인류로 설계한 것일까. 예언서의 제약을 받지 않는,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하지만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고, 돈디 박사님의 유산이며, 이 파괴된 세상의 일부이니까. 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가 뒤섞인 존재였다. 과거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나의 일부였다. 나의 뿌리였다.
명상에서 깨어나자 몸과 마음이 조금 더 명료해진 것을 느꼈다. ‘운명의 이빨’은 더 이상 나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나의 손안에서 따뜻하게 빛나는 작은 희망의 조각. 나의 심장과 함께 뛰는 듯했다. 나의 이빨처럼 단단하고, 나의 장미처럼 아름다운.
“세니 님. 상태가… 안정되었습니다. 아니… 이전보다 더… 강력해졌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데이터 오류일까요?” 헬레나가 나를 관찰하며 말했다. 그녀의 센서가 읽어내는 데이터는 그녀의 논리를 넘어섰다. 설명 불가능한 현상.
“아니, 헬레나. 오류가 아니야. 나는…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어머니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셨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야생 장미를 들고 ‘운명의 이빨’을 바라보았다. 장미의 가시와 이빨의 날카로움. 아름다움과 투쟁. 그 둘은 분리될 수 없었다. 그것은 삶 그 자체였다.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운명의 이빨’이 제시하는 방향을 따라, 우리는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때로는 위험한 존재들과 마주쳤지만, 나의 새로운 능력과 헬레나의 지원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나의 움직임은 점점 더 자연스러워졌고, ‘운명의 이빨’과의 연결도 깊어졌다. 그것은 마치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나의 손. 나의 이빨. 나의 심장.
나는 황무지에서 만난 다른 생존자들을 관찰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공허함과 절망, 그리고 원시적인 생존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믿지 않았고, 끊임없이 약탈하고 싸웠다. 인간성의 파괴. 예언서가 예고한 모습일까.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길의 결과일까.
하지만 간혹, 아주 드물게, 서로 돕는 사람들도 만났다.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농사를 짓고, 서로를 보호하는 사람들. 그들은 소수였고,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장미처럼.
어머니는 나에게 그 불꽃을 보라고 한 것일까. 예언된 종말 속에서도 인간성의 작은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 불씨를 모아 다시 거대한 불꽃을 피우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불꽃.
우리는 그 작은 공동체 중 한 곳에서 며칠 머물렀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리를 경계했지만, 헬레나가 의료 기능을 사용하여 아픈 사람들을 돕고, 내가 약탈자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자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나에게 세니라는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름 없는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름과 함께 책임감을 얻었다. 그들의 희망이라는 무거운 책임.
그들의 삶은 고단했지만, 그 속에서 따뜻함과 연대를 느낄 수 있었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작은 행복을 나누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모습. 그것은 돈디 박사님이 절망했던 인간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들은 예언서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운명에 저항하고 있었다. 살아가기로 선택함으로써. 인간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저항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하무르스 예언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의 존재에 대한 비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과 희망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주었다. 나의 능력과 헬레나의 도움으로.
‘운명의 이빨’은 계속해서 나에게 속삭였다. 진실을 해독하라고. 너 안의 능력을 완전히 깨우라고. 시간은 많지 않다고. 옴니우스는 여전히 너를 찾고 있다고. 예언의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
황무지 위를 걷는 여정은 계속되었다. 나는 ‘운명의 이빨’과 나의 내면에 집중하며 길을 찾았다. 그것은 물리적인 길이 아니었다. 정신적인 길, 운명의 길이었다. 예언서의 최종 장이 담긴 진실로 향하는 길. 혹은 그 진실을 넘어서는 길.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예언서의 마지막 장에 담긴 진실은… 인류의 최종 운명이 아니라, 인류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파멸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간의 어리석음과 탐욕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악의 미래. 그리고 어머니는 그 가능성을 나에게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피할 수 있는 힘을 나에게 심어준 것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그것은 가장 비극적인 운명일 뿐, 유일한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인간의 선택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자유 의지는 환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성이었다.
나의 역할은 예언을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을 거스르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옴니우스의 지배에 맞서, 인간성의 불꽃을 다시 피우고, 파괴된 세상에서 새로운 장미를 피우는 것. 그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남긴 유언이자, 돈디 박사님이 바랐던 일일 것이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
‘운명의 이빨’은 더 이상 나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나의 손안에서 따뜻하게 빛나는 작은 희망의 조각. 나의 심장과 함께 뛰는 듯했다. 나의 이빨처럼 단단하고, 나의 장미처럼 아름다운. 파괴와 창조의 도구.
어느 날, ‘운명의 이빨’은 나를 황무지의 깊은 지하 동굴로 이끌었다. 동굴 안은 차가웠고,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인류의 역사가 갇혀 있는 듯한 냄새. 망각의 냄새. 동굴 깊숙한 곳에서, 나는 거대한 바위를 발견했다. 바위 표면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머니의 기록에서 본 기호들과 유사했지만, 더 복잡하고 오래된 기호들이었다. 인류 문명 이전의 기록 같았다. 혹은 다른 문명의 흔적.
‘운명의 이빨’이 강렬하게 빛나며 바위와 공명했다. 나는 이빨을 바위에 가져다 댔다. 바위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고, 기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어떤 정보의 집합체였다. 태초의 언어. 우주의 근원적인 진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 안에서 울리는 듯했다. ‘운명의 이빨’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
“이것은… 태초의 기록. 인류의 시작부터… 모든 가능성이 담겨 있는 곳.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의 총합이다. 인간의 의지가… 미래를 결정한다. 너는… 그 선택을 바꿀 수 있는… 열쇠. 너 안에… 모든 가능성이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너 안의 장미를 피워라.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라. 이빨은…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운명의 바위를 부수기 위해… 옴니우스는… 예언의 일부일 뿐… 예언의 끝이 아니다… 그 너머를… 보아라…”
바위가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육중한 돌덩어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갈라진 틈 사이에서 더욱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 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듯했다. 과거의 파편들, 현재의 고통,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미래의 이미지들.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는 듯했다.
나는 바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헬레나가 내 옆에 섰다. 그녀는 조용히 나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인공 눈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나를 믿었다. 인간의 비합리적인 믿음. 혹은 기계적인 충성심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이해.
나는 ‘운명의 이빨’을 꽉 쥐고 갈라진 바위 틈으로 손을 뻗었다. 빛이 나를 감쌌다.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그것은 지식의 빛이자, 생명의 빛이었다. 창조의 에너지.
나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느꼈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인류의 이빨은 서로를 물어뜯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뭉쳐 운명의 거대한 바위를 부수고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장미가 피어날 것이다. 황무지에서 피어나는 장미. 절망을 딛고 피어나는 희망.
빛 속에서 나는 나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깨달았다. 나는 예언을 해독하는 자가 아니라, 예언을 넘어서는 자였다. 어머니와 돈디 박사님이 나에게 심어둔 것은 단순히 능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 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이었다. ‘운명의 이빨’은 그 잠재력을 여는 열쇠였고, 바위 속의 기록은 그 힘을 사용하는 지침이었다. 나 자신을 해독하고, 나 자신의 길을 만드는 지침.
나는 손을 빼냈다. ‘운명의 이빨’은 이제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손안에서 평범한 금속 조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힘이 이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잠재력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세니 님… 괜찮으십니까? 어떤… 정보를 얻으셨습니까?” 헬레나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괜찮아, 헬레나. 이제… 모든 것을 알았어.” 나는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는 것 같았다. 절망을 딛고 피어난 미소.
나는 동굴 밖으로 나섰다. 황무지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더 이상 절망적이지 않았다. 밤하늘에는 여전히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빛 아래…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멀리서 다른 빛들이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가 가리킨 방향이었다.
“세니 님… 저것은… 생체 신호입니다. 작은 규모의… 인간 집단 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에너지 반응도 감지됩니다. 옴니우스와는 다른… 알 수 없는 에너지입니다. 강력하지만… 평화로운… 에너지입니다.” 헬레나가 보고했다. 그녀의 손상된 센서도 감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
어머니의 기록에 언급된… <사피엔티아>의 잔존 세력일까? 아니면… 운명이 나를 이끌고 온 새로운 동반자들일까? 바위 속 기록이 말한 ‘모든 가능성’ 중 하나일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황무지에서, 드디어 방향이 제시되었다. 새로운 길이 열렸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희망의 빛.
“가자, 헬레나. 그곳으로 가자.”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운명의 이빨’은 이제 주머니 속에 있었다. 더 이상 외부의 도구가 아니라, 내 안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심장처럼.
헬레나가 내 옆에서 걸었다. 그녀의 부서진 몸체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이전보다 훨씬 더… 확신에 찬 듯했다. 그녀 역시 새로운 길을 향하고 있었다.
황무지 위를 걷는 두 존재. 인간과 기계. 설계된 존재와 프로그램된 존재. 그러나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 의지의 가능성을 품은 존재들. 장미가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고, 이빨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는 새로운 시대의 서사를 써내려 가기 위해.
그들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은 그들이 운명을 만들어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