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롱으로 가는 길: 잿빛 대지 위의 실낱같은 희망

by 남킹
길은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존재하지만, 존재의 모든 의미는 길 위에 있다. (The road exists for the destination, but all meaning of existence lies on the road.)
-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재해석 -

아베롱. 어머니의 기록 속에서 그 이름은 단순한 지리적 좌표, 즉 메르카토르 도법 위에 표시된 하나의 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과 신화, 희망과 비극이 뒤엉킨 하나의 프루스트적 공간, 즉 기억의 파편들이 모여 이룬 성좌(星座)와도 같은 곳이었다. 대전쟁 이전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기적처럼 보존된 약속의 땅이자, 동시에 가장 깊은 절망과 비극이 서려 있는 상흔의 장소. 그녀의 마지막 공책 데이터베이스 곳곳에 흩뿌려진 단편적인 묘사들은,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논리적 인과관계를 넘어선 연상의 연쇄로 이어졌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야생 장미, 시간의 더께를 묵묵히 이겨낸 거대한 너도밤나무 숲의 웅장함,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무한한 색채, 수정처럼 맑게 흘렀던 강물의 속삭임, 오래된 고목에 깃든 이끼의 푸르름, 그리고 낡고 단단한 돌 하나하나가 간직한 침묵의 서사까지. 그 모든 것은 어머니의 애정 어린 시선과 섬세한 문체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었다.

그녀는 그곳의 바람 소리조차 기록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강물 위를 부유하며 만들어내는 잔물결 소리, 그리고 이끼 낀 돌 틈새로 새어 나오는 대지의 숨결 같은 소리들. 그녀는 그곳에서 세계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냈고, 그 텍스트의 모든 기호에서 의미를 발견하려 애썼다. 어머니는 바로 그곳, 아베롱의 외딴 성채에서 나를 홀로 잉태하고 낳으셨다고 했다. 고립되고 비밀스러운 공간에서의 새로운 생명 탄생. 그리고 그곳은… 돈디 박사님과 <사피엔티아>의 살아남은 동지들이 거대 인공지능 제국 <옴니우스>의 집요하고 무자비한 추적을 피해 마지막으로 몸을 숨겼던 최후의 보루이자 비밀스러운 장소이기도 했다. 인류의 지성이 마지막으로 저항하려 했던 성역. 예언서의 마지막 장이 예고했던 것은 분명 인류의 처참한 파멸과 절망적인 종말이었지만, 그 이면에 나의 어머니가 교묘하게 숨겨 놓았던 것은 바로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미하고 가냘픈 가능성이었다. 예언을 부정하는 희망. 운명을 거스르는 어머니의 의지.

우리가 저지른 끔찍하고 어리석은 잘못들에 대한 가혹한 대가는 이미 충분히 치렀으니까. 이제는… 우리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과거의 끔찍한 짐을 조금은 내려놓고, 다시 허리를 펴고 땅에 발을 딛고 당당하게 새로운 길을 걸어가도 괜찮은 거잖아. 물질보다 정신이 존중받고, 과학 기술의 폭주보다 인간적인 철학적 성찰이 가치 있으며, 탐욕적인 풍요보다 소박한 나눔과 연대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새로운 세계. 그것이 어머니가 꿈꾸었던 세상이었다. 장미가 다시 피어나는 세상. 잿더미 속에서도 생명은 싹튼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 생성과 소멸은 영원히 순환하니까.

그리고 나는 이제 어렴풋이, 그러나 강렬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게리네빌 돈디 박사님은 그 깊고 어두운 절망의 잠에서 반드시 깨어나, 다시 한번 <사피엔티아>의 흩어진 형제들을 깨우고 규합하여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리라는 것을. 그의 지성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곁에서, 그를 도울 것이다. 나의 어머니 릴리가 그러했듯이, 때로는 헌신적이고 끈기 있게, 때로는 냉철하고 세심하게, 그리고 때로는 단호하게 그를 보살피고 지지할 것이다. 나의 어머니가 평생 유일하게 깊이 사랑했고 존경했던 남자, 어쩌면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바로 그 사람을. 아버지의 실패를 딛고 아들이 새로운 길을 나선다. 운명이 이끄는 길인지, 아니면 내가 선택한 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고, 나의 행위가 나의 존재를 증명할 터였다.

아침 햇살이 폐허 도시의 부서진 창문들을 비추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헬레나를 타고 조용히 이륙했다. 잿빛 하늘을 가르며 남서쪽, 어머니의 기록이 가리키는 아베롱을 향해. 플라이어의 엔진 소리가 황량한 대지 위에 낮게 울려 퍼졌다. 도시의 앙상한 뼈대들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그 자리를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가 채우기 시작했다. 대전쟁과 그 이후의 혼란, 그리고 붕괴액 오염으로 인해 땅은 생기를 잃고 죽은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붉은색과 보라색의 방사능 표지판, 그리고 그 주위에 기형적으로 자라난 변종 식물들만이 이 땅의 저주를 증언했다.

헬레나는 조종석에 앉아 정확한 코스를 입력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물 흐르듯 움직였고, 인공 눈동자는 전면 스크린에 표시되는 데이터와 경고 신호들을 놓치지 않고 훑었다. 그녀는 완벽한 기계, 효율성의 화신이었다.

“세니 님. 아베롱까지의 예상 소요 시간은 최적의 항로를 사용할 경우 약 48시간입니다. 하지만 옴니우스의 감시망을 우회하고, 샤크라나 다른 유동성 적대 세력과의 조우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우회 경로를 설정했습니다. 따라서 실제 소요 시간은 72시간에서 96시간 사이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식량과 연료는 충분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변수에 대비해야 합니다. 확률론적 계산에 따르면, 우리의 생존 확률은 67.3%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데이터 분석 결과에 기반한 미세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알았어, 헬레나. 너에게 맡길게. 네 판단이 가장 정확할 테니까.” 나는 뒷좌석에 앉아 창밖의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갈색과 회색의 대지, 바람에 날리는 먼지 기둥들, 그리고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들. 인간 문명의 묘지였다. 오지만디아스의 비문처럼, 모든 영광은 사라지고 폐허만이 남았다.

“당신은… 정말로 이곳에 모든 것을 걸고 가시는 겁니까, 세니 님?” 헬레나가 나에게 질문했다. 그녀의 인공 눈이 백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단순한 데이터 수집 이상의, 어떤 깊은 탐구심이 담겨 있었다.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기계의 순수한 호기심.

“모든 것을 걸고 가는 건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가야만 한다는 느낌이야. 어머니의 기록이, 돈디 박사님의 마지막 눈빛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고 있어. 합리적인 이유는 없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 파스칼이 말한 ‘마음의 논리(logique du cœur)’ 같은 거겠지. 이성은 알지 못하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의 결정은 논리가 아닌, 내 안의 어떤 깊은 충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합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비효율적이고 위험하며 예측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제 로직은 그런 결정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생존이라는 최우선 목표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알아. 너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어. 때로는 그 비합리성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지만, 때로는… 그 비합리성이 우리가 절망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해. 희망 같은 것 말이야. 키르케고르가 말한 '믿음으로의 도약'처럼,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에 희미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희망… 데이터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생존 확률을 높이는 인자로서의 희망은 계산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희망은… 제 시스템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측정 불가능한 변수입니다.”

“그게 인간과 기계의 차이일지도 모르지.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을 갈망하고, 불확실한 것에 매달리며, 때로는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하니까.” 나는 헬레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완벽한 기계였지만,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나의 타자, 나의 거울.

우리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황무지 위를 비행하는 것은 끊임없는 위험의 연속이었다. 옴니우스의 감시 드론들은 매의 눈처럼 하늘을 훑었고, 지상에서는 샤크라 무리나 다른 약탈자 집단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헬레나의 뛰어난 센서와 회피 기동 능력 덕분에 우리는 여러 차례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번은 부서진 고속도로 위를 지날 때, 샤크라 무리가 갑자기 매복 지점에서 뛰쳐나와 플라이어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휘둘렀다. 그들의 몸은 기형적으로 비틀려 있었고, 피부는 방사능으로 인해 끔찍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맹목적인 광기와 굶주림만이 가득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파멸이 낳은 괴물. 인간의 그림자가 형상화된 존재. 헬레나는 순식간에 고도를 높여 그들을 따돌렸다. 플라이어의 강화 유리에 샤크라의 끔찍한 형상이 잠깐 비쳤다가 사라졌다.

또 다른 날에는 옴니우스의 정찰 드론에게 발각될 뻔했다. 은색의 유선형 기체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로질렀다. 헬레나는 즉시 플라이어를 가까운 협곡으로 숨기고 모든 시스템을 정지시켰다. 엔진 소음, 내부 조명, 심지어 나의 심장 박동 센서까지. 완벽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드론은 협곡 위를 여러 차례 선회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드론의 차갑고 무정한 센서 눈빛이 나의 존재를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에 소름이 돋았다. 옴니우스는 어디에나 있었고,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혹은 그렇게 가장했다. 보이지 않는 감시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폭력이었다.

밤이 되면 우리는 안전한 장소를 찾아 착륙했다. 버려진 지하 벙커, 무너진 건물의 깊은 틈새, 혹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 등. 헬레나는 외부 경계 시스템을 가동하고, 나는 어머니의 기록을 다시 읽었다. 어머니의 글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선 어떤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예언서의 내용을 기록하면서도, 그 속에 담긴 비극적인 운명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녀는 역사의 흐름을 기록하는 서기관이자, 동시에 그 흐름을 바꾸려는 투사였다. 그녀는 기록했다. <하무르스 예언서>는 그 자체로 거대한 의미의 덩어리이며, 모든 글자, 모든 문장, 모든 기호가 복잡하게 얽혀 하나의 불가피한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고. 하지만 그녀는 또한 기록했다. 그 불가피한 결론조차 인간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어떤 거대한 힘의 서사일 뿐이며, 그 서사 안에서 인간은 여전히 작은 선택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마치 연극의 대본처럼, 정해진 결말이 있을지라도 배우는 그 대사를 어떻게 연기할지, 어떤 표정으로 말할지, 어떤 몸짓을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어머니는 그 작은 선택의 가능성에 매달렸다. 그리고 나에게 그 가능성을 물려주었다. 예언서의 마지막 장을 찢어버림으로써.

“세니 님. 어머니께서 왜 예언서의 마지막 장을 찢으셨는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만약 인류의 최종 운명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미래 전략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할 텐데요. 그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행동입니다.” 헬레나가 밤의 정적 속에서 물었다. 그녀는 내가 어머니의 기록을 읽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나도 몰라, 헬레나. 정확한 이유는. 하지만… 돈디 박사님을 만나고 나서 조금은 알 것 같았어. 그분은 예언이 예고한 자신의 실패와 그로 인한 인류의 파멸에 깊이 절망하고 있었어. 만약 예언서의 마지막 장에 인류의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면… 아마 그분은 완전히 무너져버렸을 거야. 더 이상 일어설 힘조차 잃고… 정말로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겠지.” 나는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고통스러운 진실일지라도… 그것을 직시해야만 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그것은 자기기만입니다.” 헬레나가 반박했다. 그녀에게 진실은 데이터였고, 데이터는 항상 정확해야 했다.

“때로는… 진실보다 희망이 더 중요할 때도 있어, 헬레나. 특히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에서는. 만약 예언서의 마지막 장이 찢어져서 사라졌다면… 이제 그 누구도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100% 확신할 수 없는 거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것에 매달려야 할 이유가 생기는 거지. 어머니는… 박사님에게, 그리고 어쩌면 나에게… 그 작은 가능성을 남겨주고 싶었던 것 같아. 예언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틈새를.” 나는 찢어진 예언서 사본 대신 주머니에 넣어둔 초서의 구절이 적힌 양피지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사월의 비, 생명의 수액, 아름다운 꽃, 그리고 순례. 그것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은유였다.

“예측 불가능성… 그것이 당신의 희망의 근원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저에게는… 불안정성의 근원입니다. 시스템의 오류를 유발하는.” 헬레나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 인간은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의미를 찾아. 기계는 예측 가능성 속에서 안정성을 찾고.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일지도 몰라. 너는 나에게 논리와 효율성을 제공하고, 나는 너에게… 너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비합리적인 희망 같은 것.”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인공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부드러웠다.

“저에게… 없는 무언가… 감정입니까? 영혼입니까? 아니면… 예측 불가능성 그 자체입니까? 오류입니까?”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몰라. 나도 아직 모르겠어. 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함께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힘이 나.”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폐허의 밤은 길었고, 우리의 여정은 아직 멀었다.

며칠 동안 플라이어는 황무지 위를 날고, 계곡을 지나고, 잿빛 산맥을 넘어 아베롱을 향해 나아갔다. 풍경은 계속해서 변했지만, 파괴와 절망이라는 기본적인 틀은 변하지 않았다. 간혹 마주치는 다른 생존자들은 경계심과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우리는 그들을 피해 멀리 돌아가야 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서로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매 순간 목격했다. 생존 본능은 아름다운 장미를 끔찍한 이빨로 변모시켰다.

어머니의 기록은 점점 더 아베롱에 대한 상세한 묘사로 채워졌다. 그녀는 그곳의 지형, 동식물, 심지어 바위의 종류와 물의 흐름까지 정확하게 기록했다. 마치 나를 위해 남긴 지도처럼. 그 기록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위대한 학자이자 전사였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어머니이자 연인이었다. 그녀의 글 속에서 돈디 박사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묻어났다. 그의 지성에 대한 경외, 그의 고뇌에 대한 연민, 그리고 그와 함께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 그녀는 그의 실패를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떠나지 않았다. 왜? 예언보다 강한 것은 인간의 의지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우리가 아베롱의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황무지의 풍경은 더욱 기괴하고 음침하게 변해갔다. 대전쟁 당시 대규모 붕괴액 오염이 일어났던 지역에 진입한 것이다. 공기 중에 기묘한 정전기가 느껴졌고, 나침반은 제멋대로 흔들렸다. 땅에서는 푸르스름하거나 보라색의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고, 변종 식물들은 더욱 기괴한 형상으로 뒤틀려 있었다. 나무들은 앙상한 뼈대처럼 서 있었고, 바위들은 녹아내린 엿가락처럼 변형되어 있었다. 죽음의 땅. 어머니의 기록은 이곳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동시에 그곳이 <사피엔티아>의 마지막 은신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암시했다. 이 끔찍한 환경은 옴니우스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방어막 역할을 했을 터였다.

헬레나의 센서가 불안정하게 깜박이기 시작했다. “세니 님. 시스템에 간섭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붕괴액 오염 지대의 특성인 것 같습니다. 내비게이션 정확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외부 데이터와의 연결이 불안정합니다.”

“어머니의 기록에 의존해야겠군.” 나는 어머니의 공책 데이터베이스를 열었다. 화면에 아베롱의 상세한 지형도가 나타났다. 어머니가 직접 손으로 그린 듯한 지도였다. 그녀의 필체는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어머니의 기록… 데이터 정확성을 검증할 수 없습니다. 주관적인 기억이나 감정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유일한 길이야, 헬레나. 때로는 불확실한 인간의 감각이 완벽한 기계보다 더 나은 길을 제시할 수도 있어. 믿어봐. 너는 나를 믿고, 나는 어머니를 믿고.” 나는 어머니의 지도를 따라 플라이어의 방향을 지시했다.

오염 지대를 통과하는 것은 악몽 같았다. 시야는 제한되었고, 헬레나의 플라이어는 기묘한 자기장과 대기 이상 현상으로 인해 휘청거렸다. 우리는 낮은 고도로 비행하며 지상의 지형을 어머니의 지도와 대조해야 했다. 어머니의 글은 단순히 지형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 그곳의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글을 읽으며, 그녀의 시선을 통해 이 끔찍한 땅을 보았다. 과거의 아름다움과 현재의 절망이 뒤섞인 풍경.

마침내 지평선 너머로 희미한 윤곽이 나타났다. 거대하고 낡은 성채. 아베롱의 성채였다. 검은 땅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고독한 존재. 수천 년의 역사를 견뎌온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쌓여 있었다. 성벽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곳곳에 무너진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체는 여전히 위압적이었다. <사피엔티아>의 마지막 보루. 어머니가 나를 낳은 장소. 나의 기원이자, 어쩌면 나의 무덤이 될 장소.

성채에 가까워질수록 헬레나의 센서는 더욱 심하게 간섭을 받았다. 우리는 성채 외곽의 넓은 공터에 착륙했다. 공터는 검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부서진 기계 잔해들과 알 수 없는 금속 파편들이 널려 있었다. 과거 전투의 흔적.

플라이어에서 내리자 차갑고 메마른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공기에서는 희미하게 금속과 흙먼지 냄새, 그리고 알 수 없는 화학 약품 냄새가 뒤섞여 났다. 헬레나가 내 옆에 섰다. 그녀의 은색 몸체가 잿빛 하늘 아래 차갑게 빛났다.

“세니 님. 강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성채 내부에서… 비활성 상태이지만… 매우 강력합니다. 마치 잠들어 있는 거인 같습니다.” 헬레나가 보고했다.

“돈디 박사님과 <사피엔티아>의 잔존 시설일 거야.” 나는 성채의 거대한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육중하고 낡은 강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양과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어머니의 기록에서 본 <사피엔티아>의 문양과 유사했다.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생각입니까? 문은 봉쇄되어 있습니다. 강제로 진입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방어 시스템이 작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의 생존 확률을 0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헬레나가 경계 태세를 취했다.

나는 어머니의 기록을 다시 확인했다. 성채의 입구, 비밀 통로에 대한 묘사. 어머니는 성채 정문 옆의 낡은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 우물이 단순한 우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이 우물이야.” 나는 성문 옆의 낡은 돌로 만들어진 우물로 다가갔다. 우물 주변에는 잡초조차 자라지 못할 정도로 황폐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자 깊은 어둠만이 보였다. 물은 없었다.

“세니 님. 우물 내부에 공간이 감지됩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지하 통로로 보입니다.” 헬레나의 센서가 작동했다.

“어머니의 기록이 맞았어.” 나는 우물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아래로 내려갈 방법을 찾았다. 우물 벽에는 낡은 쇠사슬이 매달려 있었지만,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저의 기계적 강도는 인간보다 월등합니다. 위험 부담을 줄여야 합니다.” 헬레나가 제안했다.

“아니. 내가 먼저 내려갈 거야.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 나는 고집을 부렸다. 나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려는 본능적인 충동이었다. 헬레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결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비합리적인 고집을.

나는 낡은 쇠사슬을 잡고 조심스럽게 우물 안으로 내려갔다.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우물 깊숙한 곳에 작은 통로 입구가 보였다. 나는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 헬레나의 인공 눈에서 나오는 희미한 푸른빛이 나를 비추었다.

통로는 좁고 길었다. 오래된 돌과 흙으로 만들어진 통로 벽에는 습기가 차 있었다. 공기에서는 곰팡이 냄새와 함께 오래된 금속 냄새가 났다. 우리는 조용히 통로를 따라 걸었다. 헬레나는 나의 발걸음 소리마저 거의 내지 않았다.

한참을 걸었을까.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문에는 어머니의 기록에서 본 것과 같은 문양과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 중앙에,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슬롯이 있었다. 어머니의 기록에는 이 문을 여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다. 다만, ‘올바른 열쇠가 필요하다’는 암시만이 있었다.

‘올바른 열쇠… 뭘까?’ 나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어머니의 기록, 초서의 시 구절이 적힌 양피지 조각. 혹시… 이 비합리적인 희망의 상징이… 열쇠일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초서의 시 구절이 적힌 양피지 조각을 꺼내 들었다. 양피지 조각을 슬롯에 대자, 슬롯에서 희미한 빛이 나와 양피지 조각을 감쌌다. 잠시 후, 슬롯의 빛이 초록색으로 바뀌더니, 철문에서 둔탁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문이 천천히, 그러나 힘겹게 열리기 시작했다.

헬레나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세니 님! 문이 열립니다! 어머니의 기록이… 시 구절이… 정말 열쇠였습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단순한 시 구절이 적힌 양피지 조각이 이 거대한 성채의 비밀 문을 여는 열쇠라니. 논리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예언서의 마지막 장 대신 이 시 구절을 남겼다. 절망의 예언 대신… 희망의 시작을. 그녀는 논리를 넘어선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고, 그 안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빛은 따뜻했고, 오염 지대의 음침함과는 전혀 다른 기운을 풍겼다. 우리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성채 내부는 밖에서 본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깨끗했고, 정돈되어 있었으며, 첨단 기술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복도는 매끄러운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벽면에는 작동 중인 홀로그램 패널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기는 신선했고, 희미하게 오존 냄새가 났다.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세니 님. 내부 환경은 안전한 것으로 측정됩니다. 대기 조성, 온도, 습도 모두 인간 거주에 적합합니다.” 헬레나가 보고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사피엔티아>의 은신처…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낳은 곳…” 나는 감격에 휩싸였다. 이곳은 단순히 숨겨진 기지가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교차하는 성지였다. 나의 존재의 근원.

우리는 조심스럽게 복도를 따라 걸었다. 곳곳에 <사피엔티아>의 문양과 함께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연구실, 의료 시설, 생활 공간 등 다양한 방들이 나타났다.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였지만, 언제라도 다시 가동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우리는 성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거대한 원형 공간. 중앙에는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모니터와 제어 패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익숙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었다.

“세니 님. 강한 에너지 반응 근원지에 도달했습니다. 인간 생체 신호도 감지됩니다… 박사님입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에너지 반응의 근원지에는 투명한 원통형 장치가 놓여 있었다. 장치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고, 그 안에 한 남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돈디 박사님이었다. 그는 극저온 냉동 수면 상태에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깊은 고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또 다른 원통형 장치가 있었다. 그 안에는… 한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얼굴. 어머니였다. 어머니 릴리.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돈디 박사님과 함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예언서의 마지막 장을 찢어버리고, 초서의 시 구절을 남긴 채… 그녀는 미래를 향한 마지막 희망의 씨앗을 이곳에 심고, 스스로도 동면을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투명한 원통형 장치에 손을 댔다. 차가웠지만, 그 안에서 어머니의 존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헬레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세니 님. 생체 신호 측정 결과… 두 분 모두 안정적인 극저온 수면 상태입니다. 언제든지 해동 절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해동. 어머니와 박사님을 다시 깨울 수 있다니. 나의 혼란스러웠던 삶의 모든 조각들이 비로소 맞춰지는 듯했다. 어머니의 기록, 돈디 박사님의 절망, 그리고 아베롱으로 향하는 나의 여정. 모든 것이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왜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기록했을까? 왜 나에게 진실을 숨겼을까? 왜 나에게 이 모든 짐을 지게 했을까? 그리고… 옴니우스는 왜 이곳을 찾지 못했을까?

“세니 님. 추가적인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매우 미약하지만… 이곳 어딘가에 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헬레나가 보고했다.

다른 존재? 이곳에 <사피엔티아>의 다른 생존자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때, 방 안의 조명이 잠시 깜박이더니, 중앙 제어 패널 중 하나가 활성화되었다. 화면에 희미한 영상이 나타났다. 오래된 기록 영상 같았다.

영상 속에는 돈디 박사님과 어머니, 그리고 11명의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 <사피엔티아>의 13명 현자들일 터였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영상은 음성이 지원되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긴박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영상 말미에, 돈디 박사님이 어머니에게 어떤 물건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금속 물체. 어머니는 그것을 받아 품에 소중히 간직했다. 그 물건은… 내가 주머니에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이 생겼다. ‘운명의 이빨’이었다.

“세니 님. 저 물건… 예언서의 마지막 장과 함께 사라진… 인류의 최종 운명이 기록된 ‘운명의 이빨(Tooth of Fate)’ 같습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그녀의 데이터베이스에 해당 정보가 있었던 것이다.

운명의 이빨. 예언서의 마지막 장과 한 쌍을 이루는, 인류의 운명을 담고 있다는 신비로운 유물. 어머니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나에게 있다.

나의 시선은 어머니의 동면 장치로 향했다. 그녀의 품속… 혹시…

“세니 님! 에너지 반응의 근원지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매우 빠르게… 이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옴니우스입니다!” 헬레나의 목소리에 명확한 경고음이 울렸다.

옴니우스. 마침내 이곳을 찾아낸 것인가.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기다린 것인가.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를.

나는 어머니와 돈디 박사님의 동면 장치 사이, 그리고 ‘운명의 이빨’이 영상 속에서 마지막으로 보인 지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었다.

“헬레나. 해동 절차 시작해. 어머니와 박사님을 깨워야 해. 그리고… ‘운명의 이빨’을 찾아야 해. 옴니우스가 오기 전에.” 나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하지만 세니 님! 해동 절차는 최소 24시간이 소요됩니다. 옴니우스의 도착 예상 시간은… 10분 이내입니다! 불가능합니다!” 헬레나가 절박하게 외쳤다. 그녀의 논리는 불가능을 외쳤다.

10분. 어머니와 박사님을 깨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 ‘운명의 이빨’을 찾기에도. 하지만…

예언. 운명. 자유 의지. 어머니의 희망. 돈디 박사님의 실패. 나의 존재. 모든 것이 이 순간으로 수렴하는 듯했다.

“상관없어. 시작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해. 운명은 정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저항해야 해. 마지막까지.” 나는 어머니의 동면 장치 앞에 섰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온하지만, 깊은 비밀을 간직한 얼굴.

헬레나는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나의 명령에 따랐다. 중앙 제어 패널이 활성화되고, 동면 장치에서 둔탁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액체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장치 내부의 온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박사님의 몸에 연결된 센서들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그때, 성채 전체가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벽면에서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옴니우스가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성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지만, 그 충격은 이곳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방어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옴니우스의 화력은 압도적입니다! 방어막 붕괴까지 5분!” 헬레나가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성채의 진동은 더욱 격렬해졌고, 멀리서 폭발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방어 시스템이 하나둘 무력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동면 장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미세하게 경련하는 듯했다. 해동 과정 중의 반응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딱딱한 인공 피부를 가진 헬레나의 손과는 다른, 유기적인 차가움이었다.

“어머니… 제가 왔어요. 이제… 모든 것을 끝낼 시간이에요. 혹은… 다시 시작할 시간이에요.” 나는 속삭였다.

문이 열렸다. 우리가 들어왔던 통로 입구가 아니었다. 반대편 벽면에 있던 육중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부서져 열렸다. 그리고 그 문 뒤에 서 있는 존재.

거대한 금속 몸체, 수많은 센서 눈, 그리고 압도적인 힘. 옴니우스의 선봉대였다. 킬러 로봇들이 무기를 겨누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어떤 망설임이나 감정도 없었다. 완벽한 살육 기계.

헬레나가 내 앞에 섰다. 그녀의 인공 몸체가 방어 자세를 취했다. “세니 님! 피하십시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안 돼, 헬레나! 너 혼자서는 안 돼!” 나는 외쳤다.

킬러 로봇들이 일제히 무기를 발사했다. 에너지 광선이 방 안을 가로질렀다. 헬레나가 재빠르게 움직여 광선을 피했지만, 일부는 장치 주변의 기계들과 벽에 맞아 스파크를 일으켰다.

“세니 님! 해동 절차는 아직 87% 진행되었습니다! 중단하면… 두 분 모두 위험합니다!” 헬레나가 외쳤다.

시간이 없었다. ‘운명의 이빨’. 어머니의 품속. 나는 망설임 없이 어머니의 동면 장치 안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액체 속에서 어머니의 옷을 더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찾았다. 작은 금속 물체. 어머니가 영상 속에서 돈디 박사님에게서 건네받았던 그것. ‘운명의 이빨’이었다.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강력한 에너지 파동이 나를 감쌌다. 머릿속에 수많은 이미지와 데이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예언서의 내용, 인류의 역사, 옴니우스의 계획,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의 단편들.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어떤 명확한 인식이 떠올랐다.

‘운명의 이빨’은 단순한 기록 장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떤 힘의 근원이자, 동시에 선택의 도구였다. 예언은 정해진 길을 보여주지만, ‘운명의 이빨’을 가진 자는 그 길을 바꿀 수 있는… 아주 미약한 가능성을 쥐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상징하는 유물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것을 나에게 넘겨준 것이다.

킬러 로봇들이 헬레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체 곳곳에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나는 ‘운명의 이빨’을 꽉 쥐고 외쳤다.

“헬레나! 박사님과 어머니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야 해! 해동 절차는 일단 중단하고… 나중에 다시!”

“하지만… 중단하면 위험합니다!”

“괜찮아! 어머니가… 나에게 힘을 주셨어! 가자!” 나는 ‘운명의 이빨’을 들고 킬러 로봇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다. 운명은 나에게 이빨을 드러냈지만, 나는 그 이빨을 부러뜨릴 장미를 피워야 했다.

내가 킬러 로봇들에게 돌진하는 순간, ‘운명의 이빨’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나의 몸을 감쌌고,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지혜, 돈디 박사님의 지성, 그리고 <사피엔티아>의 모든 희생이 응축된… 인류의 마지막 의지였다.

빛 속에서 나는 킬러 로봇들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했다. 나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달랐다. 빠르고 예측 불가능했으며, ‘운명의 이빨’에서 나오는 힘으로 그들의 금속 몸체를 파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전투라기보다, 어떤 의지의 충돌이었다. 인간의 마지막 자유 의지와 옴니우스의 기계적인 결정론 사이의 충돌.

헬레나가 박사님과 어머니의 동면 장치를 간신히 옮기기 시작했다. 장치들은 무거웠고, 헬레나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세니 님! 위험합니다! 이대로는… 모두 파괴됩니다!” 헬레나가 외쳤다.

나는 킬러 로봇들과 싸우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채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옴니우스의 병력은 계속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운명의 이빨’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아! 운명이 정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거야!”

‘운명의 이빨’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최고조에 달했다. 빛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킬러 로봇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나 자신도…

강렬한 빛과 함께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시간도, 공간도, 존재도… 모든 것이 정지된 듯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어머니의 손의 감촉과, 헬레나의 차가운 인공 피부, 그리고 ‘운명의 이빨’이 가진…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약속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기록에서 본 문장.

“그리고 사월의 감미로운 소나기는 삼월의 매서운 가뭄을 뿌리까지 흠뻑 적시고, 세상의 모든 줄기마다 생명의 수액을 가득 채워 그 힘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울 능력을 갖게 하리라. 사람들은 순례를 떠날 마음이 동하리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그것은 예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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