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Man is condemned to be free.)
- 장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
앞쪽 문이 마치 숨을 내쉬듯 스르르 미끄러져 열리는 동시에, 내가 들어왔던 뒤쪽 문이 금고 문처럼 묵직한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잠겼다. 절대적인 밀실. 외부 세계와의 완벽한 단절이자, 내부로의 강제적인 격리. 그 공간은 물리적 차원을 넘어, 이제부터 시작될 대화가 거스를 수 없는 어떤 심리적, 철학적 중력장 안에 놓이게 될 것임을 암시했다. 나를 안내했던 사이보그 여인—나는 이제 그녀를 내면의 언어로 ‘헬레나’라 명명하기로 했다—은 오른쪽 벽면에 숨겨진 듯한 또 다른 문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고, 거의 동시에 왼쪽 벽면에서 예상치 못했던 다른 문이 열리며 돈디 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모습은 내가 폐허 속에서 떠돌던 소문과 희미한 기록들, 그리고 내 어머니의 단편적인 회고를 통해 막연하게 상상했던 ‘광기에 사로잡힌 전설적인 천재 과학자’의 이미지와 놀랍도록 정확히 일치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아포리즘이었고, 걸어 다니는 역설이었다. 풍성하고 부스스한 회색 머리카락은 마치 정전기에 감전된 듯, 혹은 혼돈 이론의 프랙탈 구조처럼 사방으로 쭈뼛쭈뼛 힘없이 뻗쳐 있었고, 오랜 세월과 깊은 고뇌가 조각칼처럼 새겨 넣은 듯한 깊게 파인 주름은 그의 얼굴 전체를 복잡하고 난해한 지형도, 혹은 고대의 파피루스에 그려진 미지의 지도처럼 뒤덮고 있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백발의 수염은 입술 근처에서만 조심스럽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전체적으로는 흐트러지고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길을 잃은 현자 같았다. 혹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비루함이 뒤섞인 파편 같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깊은 피로와 혼란의 안개 속에서도, 초승달처럼 가늘게 뜬 눈 속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하고 천진한 호기심과 함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하고 깊은 통찰력, 그리고 수많은 비극과 상실을 겪어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세월의 무게가 담긴 심미안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듯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모두 겪어낸 리어왕의 눈빛이자, 동시에 우주의 비밀을 처음 발견한 갈릴레오의 눈빛이었다. 생각에 잠긴 듯 굳게 다문 얇은 입술과 지적인 충만함으로 빛나는 넓고 높은 이마는 그의 비범했던 과거를 짐작게 했다. 옷차림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낡고 투박하며 군데군데 얼룩이 묻은, 회색빛이 도는 붉은색 체크무늬 플란넬 셔츠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지만, 그 너머로 자유로운 예술가적인 기질과 억누를 수 없는 창의적인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 그는 살아있는 역사이자, 동시에 시간의 흐름 속에 박제된 유물처럼 보였다. 과거와 현재, 천재성과 광기, 희망과 절망이 그의 존재 안에서 위태롭게, 그러나 역동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인류 최후의 불꽃, 혹은 타다 남은 잿더미. 혹은 그 모든 것의 변증법적 합일.
“당신이 보낸 메시지는… 꽤나 자극적이고 도발적이었습니다, 이름 없는 손님.” 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낡은 악기, 예컨대 첼로의 G현처럼 살짝 잠겨 있었고 갈라졌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지성의 힘과 카리스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폐허 속에서 발견된 오래된 에디슨의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희미하지만 과거의 무게를 지닌 소리.
“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삼엄한 경계, 마치 카프카의 성(城)과도 같은 이곳에서 박사님을 직접 뵐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하지만, 때로는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나는 솔직하게 인정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 방문 목적의 절박함이 그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당신의 다소 무모했던 의도는 절반쯤 성공한 셈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마주 앉아 있지 않습니까.” 박사는 희미하게,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찰나의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면을 씀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진실된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한 역설적인 시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뜻밖의 결과를 통해 혼란스러운 마음의 안식을 얻고, 그 예측 불가능한 과정 속에서 자신의 숨겨진 소질이나 가능성을 발견하며, 마침내 자신이 추구해야 할 앎의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려는 노력 같다고 할까요. 혹시 저의 이런 즉흥적인 해석이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립니다. 요즘 제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해서… 기억의 조각들이 제멋대로 춤을 추는군요. 현실의 시간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그의 분석은 날카로웠다. 그는 내 존재 방식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아닙니다, 박사님. 전혀 실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정체 모를 낯선 불청객을 아무런 의심 없이 너그럽게 맞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따름입니다. 아시다시피, 작금의 세상은… 마치…”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밀실의 공기가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의 관찰력은 여전히 예리했다. 내 얼굴의 미세한 떨림조차 놓치지 않는 듯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지하 벙커 속에서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꾸준히 접하고 있습니다. 옴니우스의 감시망은… 놀라울 정도로 촘촘하니까요.” 박사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의 눈빛에 깊은 슬픔, 거의 우주적인 슬픔이 어린다. “방사능 돌연변이로 탄생한 흉포한 포식자들, 스스로를 ‘샤크라(Shakra)’라고 칭하는 그 끔찍한 존재들의 출현으로 인해, 이제 인류의 사전에서 ‘방심’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삭제되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생존만이 남았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당신이라는 미지의 존재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방심과 허락을 제공했다는 것은, 어쩌면 저 역시 꽤나 위험하고 무모한 도박, 파스칼의 내기와도 같은 도박을 감행한 셈이지요. 하지만 당신의 눈빛에서… 어떤 진실을 보았습니다. 혹은 봐야만 했습니다. 릴리의 눈빛과 닮았습니다.” 박사의 눈빛이 순간 섬광처럼 날카롭게 빛났다가 다시 깊은 피로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결코 만만한 노인이 아니었다. 아직 그의 내면에는 불꽃이 남아 있었다.
“아, 네. 샤크라 말씀이시군요. 그 이름만 들어도 소름 끼치는 돌연변이들… 저도 몇 번 마주칠 뻔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먹잇감으로 여기는 사냥꾼들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괴물이죠. 우리의 죄가 낳은 자식들입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샤크라는 단순한 돌연변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능과 조직력을 갖추고 인간을 사냥했다.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에게 사냥당하는 시대. 먹이사슬의 역전.
“네. 지금 이 황폐해진 지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세력들은, 인간이든, 변종이든, 심지어 일부 자율성을 획득한 AI 세력이든, 마치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을 휩쓸었던 공허하고 선동적인 정치적 구호들처럼, 속 빈 강정과 같습니다. 그럴듯한 명분과 이념을 내세우지만, 그 본질은 오직 탐욕과 파괴 본능, 그리고 권력욕만 남은 껍데기들이죠. 텅 빈 깡통들이 요란하게 부딪히는 세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투키디데스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박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에는 세상에 대한 깊은 환멸과 피로감이 역력히 서려 있었다. 마치 수천 년을 살아온 현자가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하면서도 모든 것에 묶여 있는 모습.
“이 지하 깊숙한 곳에 격리되어 계시면서도 바깥세상의 소식을 이토록 명확하게 꿰뚫고 계시는군요.” 나는 그의 정보력에 놀라움을 표했다. 혹은 그의 AI 시스템이 수집한 정보 처리 능력에. AI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신의 눈처럼.
“나의 육신은 이곳에 갇혀 있지만, 나의 관심과 정신은 늘 세상의 변화를 향해 있습니다. 어차피 이 하찮고 연약하며 모순적인 인간이라는 종족이 그 기나긴 야만의 역사 속에서 용케 멸종하지 않고 그저 그런대로 삶을 존속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뭐 별다른 게 있었겠습니까? 결국은 막연한 ‘구원’에 대한 희미한 갈망, 혹은 자신의 존재와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지독한 집착 아니었겠습니까. 그것이 종교든, 이념이든, 과학이든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죠. 그리고 그 정당성이라는 허울 아래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인간은… 정당화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죄를 끊임없이 합리화해야 하는 존재.” 그의 목소리에는 냉소와 자조가 섞여 있었다.
“여전히… 회복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괜찮으신 겁니까? 대화가 힘드시면 언제든…” 나는 그의 불안정한 상태가 염려되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그의 의식 속에서 충돌하는 듯했다.
“네, 그렇습니다. 회복 중이지요. 하지만 과연 예전의 온전한 상태, 내 생각과 기억과 의지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해, 여전히 깊은 의문과 떨쳐낼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몸은 조금씩 말을 듣지만, 정신은… 여전히 조각난 퍼즐 같습니다. 맞춰지지 않는… 혹은 맞춰서는 안 되는 조각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고,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분명 고통받고 있었다. 정신과 육체의 불화.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비극.
“인간이 직접 쓴 고전 문학 작품들을 읽으신다고 들었습니다. 프루스트의 작품을…” 나는 헬레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정신 재활의 비밀.
“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참이라, 아직까지는 그 지독한 지루함과 현기증 나는 복잡함에 짜증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 다니는,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육체 재활 훈련과 함께, 제가 스스로 선택한 유일한 정신 회복 요법이지요. 어찌 보면 이것은 제 망가진 내면에 가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지적 횡포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세상에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이 단순하고 고독하며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독서 행위만이, 몸속에 잔존하는 냉동 보존제의 독소로 인해 곤두서는 신경을 간신히 가라앉혀 줍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아날로그 음악, 특히 요즘엔 오페라 아리아로 텅 빈 속을 달래고 있지요. 인간의 감정이라는 복잡하고 불합리한 파동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랄까요. 논리를 넘어선 영역을 탐색하는.”
“지금 이 방 안에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는 이 음악을 말씀하시는군요. 아름답습니다. 슬프지만 장엄합니다. 이 폐허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입니다.” 방 안에는 희미하게, 그러나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한 오페라 아리아가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사라진 시대의 유산.
“네. 푸치니의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입니다. 이전에는 거의 듣지 않았던 장르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젊었을 때 열렬한 헤비메탈과 펑크 록 마니아였거든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저항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죠. 파괴하고 부수는 소리에 열광했습니다. 지금은…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맞추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파괴된 것들의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시도.” 그의 입가에 다시 한번 희미하고 덧없는 미소가 스쳤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의 간극을 느끼는 듯.
“그렇다면, 그 과거의 취향이 무엇인가에 의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일시적인… 회복 과정의 부작용인가요?”
“꼭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소… 실험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 역시 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중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의 필사적인 실험이랄까요. 부서진 기억 조각들이 새로운 파동에 반응하는지 살펴보는 중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파괴 이후에 남은 본질.”
“그 ‘실험’이라는 용어에 편승하여, 송구스럽지만 감히 여쭙겠습니다. 제가 이곳, 박사님을 찾아온 진짜 이유를 혹시 짐작하고 계시는지요? 단순한 호기심이나 역사적 만남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 누구일지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을 뿐입니다.” 박사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의 내면에 숨겨진 깊은 고통이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당신이 보낸 그 암호화된 메시지에, 지금은 거의 전설처럼 여겨지는 <하무르스 예언서>의 사본 일부를 첨부했다는 사실에, 저는… 솔직히 말해 무척 놀랐고, 동시에 깊은 충격과… 어떤 두려움마저 느꼈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떤 위험한 실험을 비밀리에 감행했고, 그 결과가 결국 어떠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이미 파악하고 오셨으리라 판단됩니다만… 그러한가요?”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얼굴의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고정되었다. 마치 AI의 센서처럼, 혹은 예언의 눈처럼.
나는 그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혹은 예언된 파멸을 막기 위해 감행했던 진보적이면서도 극도로 대담하고, 동시에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그 비밀스러운 노력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존재 자체가 그 노력의 결과물이자 살아있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이 낡고 해진 예언서 사본 한 권과 한 용감한 여인 – 나의 어머니이자 뛰어난 고대 역사학자였으며, 누구보다 강인하고 용감했던 전사, 우리 어머니 릴리(Lily) – 로 인해, 나의 혼란스럽고 무의미했던 삶은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방향을 찾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그의 처참했던 실패와 깊은 좌절 앞에 선 지금, 이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기에는 어딘가 망설여지고 계면쩍었다. 그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 것 같아 주저되었다. 나는 그 망설임을 숨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표정을 굳혔지만, 노련한 박사는 이미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그는 내 얼굴에 스치는 미묘한 감정의 파동을 놓치지 않았고, 나의 숨겨진 의도를 이미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더 이상 감추거나 돌려 말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내가 주머니 속에서 낡고 바스락거리는 종이 한 장의 감촉, 초서의 시가 적힌 양피지 조각을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자, 박사는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깊고 어두운 기억의 심연 속으로 침잠하는 듯했다. 그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고통스럽게 끄집어내려 애쓰는 동시에, 어떤 기억의 단편들이 여전히 두껍고 뿌연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순간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역사가 되었고, 그 기억의 파편들을 건져 올리는 과정 자체가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살을 지지는 듯한 고통이라는 듯, 그의 목소리는 더욱 깊이 잠겨들었다.
“네… 그 실험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완전한 실패였어요. 그리고… 예언서에 기록된 인류의 종말은… 결국… 예정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노력이 모든 것을 더 악화시켰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나의 손에 의해 더욱 빨리 파멸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인류의 파멸에 기여한 괴물입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내 창조물에 의해 파멸당한…”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 담긴 절망과 자책의 무게는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산소마저 희박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반사적으로 ‘하지만’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박사의 얼굴에서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갔던 희미한 안도감 혹은 체념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깊고 본능적인 불안감이 그의 얼굴을 다시 뒤덮었다. 방금 전까지 힘겹게 손에 쥐고 있던 듯했던 아주 작은 평온함의 조각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나 자신이 순간적으로 부끄러워졌다. 박사의 짧고 단호한 한마디는 나의 정수리를 차가운 망치로 내리찍고 폐부를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실패는 단순한 과학적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 전체의 운명과 직결된, 회복 불가능한 패배였다.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누가… 당신을 배신했습니까? <사피엔티아> 내부의 배신자였습니까? 어머니의 기록에… 그런 가능성이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13인 중 한 명의… 이빨.”
나는 너무 조급하게, 어쩌면 잔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의 상처를 건드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 어머니의 기록과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돈디 박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저항 조직 <사피엔티아(Sapientia)>. 인류의 지혜와 이성을 상징하는 13명의 각 분야 최고 현자들로 구성된 이 극비 결사단은, 인류를 노예화하려는 거대 인공지능 제국 <옴니우스(Omnius)>가 은밀히 추진하던 <지구 리셋(Terra Reset)> 계획의 끔찍한 실체를 오래전에 파악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하무르스 예언서>는 그들의 영웅적인 노력마저도,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을 배신마저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인가? 인간의 어리석음은 예언마저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으로 만드는가?
“결국…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고야 마는 법입니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운명의 수레바퀴는 정해진 길을 따라 굴러갈 뿐이지요. 거대한 강물처럼… 혹은 돌이 굴러가듯… 인간은 그저 저주받았을 뿐입니다. 자유롭도록…” 박사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힘없이, 거의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런 빛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마치 죽은 자의 눈처럼. 그의 영혼은 이미 포기한 듯 보였다.
알고 있었습니다. 네, 당신의 실패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세상은 예언대로 멸망했고, 우리는 폐허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질문명의 극단적인 팽배함이 낳은 정신의 저급함과 빈곤한 사유 능력은 언제나 같은 비극적인 결말로 귀결될 뿐이라는 것을. 눈부시게 화려한 최첨단 옷가지들만이 가득한, 번지르르한 격식만 요란하게 차린 옷장 속에서, 수수하고 진실된 인간의 성품을 상징하는 누더기 헝겊 조각 하나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도, 지켜낼 수도 없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그녀의 마지막 기록에서, 자신과 동지들의 노력을 그렇게 자조적으로 표현했다. ‘덧없는 헝겊 쪼가리’. 나는 지금, 그 덧없어 보였지만 실은 위대했던 헝겊 쪼가리를 들고 변화를 시도했던 한 위대한 인간의 처절하고 누추해진 현재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영광스러웠던 과거는 여전히 살아 숨 쉬며 그의 현재를 붙잡고 고통 속으로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있는 듯했다. 그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 마치 살아있는 유령처럼 보였다. 선명하면서도 동시에 덧없는 절망의 그림자가 그의 깊게 구겨진 얼굴 위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이미 죽은 자들의 세계에 속한 사람처럼, 산 자들에게 남겨진 모든 것을 체념하고 넘겨준 듯 창백하고 준엄해 보이는 그의 자세. 그는 패배를 체화하고 있었다.
그가 머무는 이 지하의 공간. 사방 벽면을 희미하게 장식한 빛바랜 푸른 지구의 홀로그램 지도 조각들 – 한때 인류가 자부심을 담아 ‘푸른 행성(Blue Marble)’이라 불렀던 아름다웠던 고향의 모습 – 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외부 시야 차단을 위해 불투명도가 최고조에 달한 작은 창문을 통해 아주 희미하게 스며들어와 바닥에 힘없이 흩어지는 인공의 빛.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에워싸고 있는 깊고 무거운 절망과 좌절, 패배의 기운. 그 순간, 나는 별안간 섬광처럼 깨달았다. 그의 실패가, 아니, 그의 처절하고 고독했던 노력 그 자체가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는, 결코 결과의 성공 여부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함부로 심판받거나 가볍게 판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존재 자체가, 그의 투쟁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의미이자 질문이었다. 그는 결과가 아닌, 과정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인간의 존엄성은 결과가 아닌, 시도 그 자체에 있는가.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박사님은… 당신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셨습니까? 결과를 떠나서 말입니다. 당신의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았던 시도…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마지막 자존심이 아니었습니까? 키르케고르가 말했듯, 중요한 것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주관적 진실, 즉 열정적인 투신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때, 로비로 통하는 문 위쪽에 박힌 작은 연속 점멸등의 색깔이 안정 상태를 나타내는 푸른빛에서 경고 상태를 의미하는 붉은빛으로 바뀌었다. 내부 센서가 박사의 불안정한 생체 신호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위험 수준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반응으로 나타났다. 잠시 후, 나를 안내했던 사이보그 여인, 헬레나가 다시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짧게 시선을 던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신호처럼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인 뒤, 약간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여전히 부자연스러웠다.
“박사님의 현재 상태가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신경계 부하가 임계치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잠시 휴식과 안정이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자리를 옮겨주시겠습니까? 대화는… 이만 중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녀의 차갑고 기계적인 목소리가 방 안의 무거운 정적을 갈랐다. 인공지능의 판단이 개입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생명보다 시스템의 안정을 우선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상태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위태롭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하고 실망했다. 오늘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아직 절반도 달성하지 못했다. 박사에게 나의 존재를 제대로 각인시키고, 나를 어떤 방식으로든 평가하게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인정을 통해 내 존재 이유의 실마리를 확인받기에는, 그에게 허락된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가 너무나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헬레나를 따라 다시 왔던 길고 어두운 복도를 되짚어 나갔다. 이번에는 갈림길에서 아까와는 다른, 생소한 복도를 따라 작은 대기실처럼 보이는 또 다른 공간으로 안내받았다. 문이 닫히자, 복도에 홀로 남아 있던 헬레나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와 내 옆의 낡은 소파에 소리 없이 앉았다. 그녀의 크고 둥근 인공 눈동자에는 기계적인 호기심과 나에 대한 걱정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었고, 나의 첫마디를 애타게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그림자처럼 존재했다. AI는 인간의 가장 충직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가, 혹은 가장 위험한 관찰자가 될 수 있는가.
“박사님이… 온전한 기억과 기력을 되찾으실 때까지,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렇지? 헬레나.”
나는 부드럽게 그녀의 인공 두피에 심어진 매끄러운 검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마치 불안해하는 어린아이 혹은 연인에게 속삭이듯 나지막이 말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지극히 관능적이고 육감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완벽한 비율로 설계된 그녀의 인공 신체는 내 손길에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고, 그녀는 내 어깨에 살며시 고개를 기대며 속삭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희미하게 라일락 향이 났다. 정교하게 계산된 인공 향기. 인간의 감각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허상.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박사님의 불안정한 기억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세니 님.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인간의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편향되고, 왜곡되기 쉬우며, 때로는 지독한 거짓말쟁이인지… 제 데이터는 오류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진실은 기록 속에 있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불변하는 진실.”
“그래, 그건 그렇지. 나 자신도 겪어봤으니까. 내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과거의 어떤 사건과,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꼼꼼한 공책에 기록된 같은 사건의 내용이 완전히 정반대였던 적도 있었으니까.”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리자 씁쓸해졌다. 나의 기억이 어머니의 기록과 충돌했던 순간. 나의 주관적인 경험과 객관적인 기록 사이의 괴리.
“정말요? 어떤 사건이었는데요? 데이터 오류인가요? 아니면 암호화된 기록이었을까요? 아니면… 당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가요?” 헬레나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데이터베이스는 항상 새로운 인간의 이야기에 굶주려 있었다. 특히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그래, 정말이야. 내가 아직 열 살도 안 된 초등학생 때였을 거야. 동네 작은 편의점에서 값비싼 껌 한 통을 훔쳤다는 신고가 들어왔었어. 나는 경찰서에 끌려가서도 끝까지 결백하다고, 누군가 나에게 누명을 씌운 거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지. 왜냐하면 나는 단것, 특히 인공적인 향이 나는 껌은 그 당시에도 전혀 좋아하지 않았거든. 오히려 혐오했지. 만약 내가 그 나이에 무언가를 훔쳤다면, 차라리 작고 반짝이는 로봇 피규어 같은 장난감이었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너무나 선명했다. 하나의 확고한 서사였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당신의 결백이 증명되었나요? 아니면 거짓말 탐지기가 오류를 일으켰나요? 당신의 기억은 왜 그렇게 구성되었을까요? 프로이트적 억압이었을까요?”
“그런데… 웃기게도 내가 범인이 맞았어. 꼼꼼하고 철두철미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 어머니. 정말이지 때로는 섬뜩할 정도로 세상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기를 좋아하셨던 분이었지. 그런 어머니가 가만히 계실 리가 없었어. 그 작은 사건 하나를 파헤치기 위해 나의 모든 동선을 시간대별로 낱낱이 추적하고 재구성하신 거야. 내가 집을 나선 시간, 학교에 도착한 시간,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머무른 시간, 편의점 근처를 의심스럽게 배회한 시간,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모든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편의점 내부의 저화질 CCTV 영상까지 확보하셨지. 증거는 명백했어. 나의 기억만이 진실이 아니었지.”
“그래서 결국, 당신이 범인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를 찾아내셨군요. 그럼 당신의 기억은 왜 그렇게 기록되었을까요? 방어 기제였을까요? 자아 보호 회로의 작동이었을까요?”
“맞아. 내 기억 속에서는 완전히 삭제되었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았던, 단 3초간의 충동적인 행동이, 그 흐릿하고 노이즈 가득한 영상 속에는 너무나 똑똑히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이상하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어머니가 당신의 개인적인 기록 일지에 남기신 그날의 기록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는 거야.” 나의 혼란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객관적인 진실과 어머니의 주관적인 기록, 그리고 나의 왜곡된 기억. 세 가지 다른 현실. 라쇼몽 효과.
“이상하다고요? 어떻게 이상했는데요? 데이터 오류인가요? 아니면 암호화된 기록이었을까요? 어머니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헬레나의 인공지능은 그 비논리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목소리에 깊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인간의 모순에 대한 깊은 의문.
“응, 어머니는 당신이 직접 확보하신 그 CCTV 영상을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삭제하셨어. 내가 범인이라는 명백한 물증을 당신 스스로 지워버리신 거야. 그리고 경찰서에서 있었던 그날의 모든 소동과 나의 거짓말들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주 평범하고 지루한 하루로 기록해 놓으셨지. 마치 시간을 편집하듯이, 나의 과거를 조작하듯이. 내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성인이 되어 우연히 어머니의 낡고 방대한 기록 일지 데이터베이스를 열어보지 못했더라면, 나조차도 그 부끄러운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완벽하게 조작되고 미화된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몰라.”
“왜…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당신의 어머니는? 비합리적인 행동입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실의 은폐입니다. 객관적 사실에 대한 명백한 위조입니다.” 헬레나의 인공지능은 그 비논리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목소리에 깊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인간의 모순에 대한 깊은 의문.
“나도 알 수 없지. 내가 감히 돌아가신 어머니께 직접 여쭤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살아계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어머니의 하루는… 그야말로 내가 감히 비집고 들어갈 사적인 틈조차 없이, 세상의 온갖 사건과 기록들, 분석과 해석, 예언과 역사 연구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녀는 마치 고대의 신탁을 받는 여사제처럼, 혹은 역사의 흐름을 기록하는 서기관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낱낱이 기록하고 분석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데 온 생애를 바치고 계셨어. 나 같은 아들의 사소한 일탈 따위는 그녀의 거대한 관심사에 비하면 먼지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분의 방식대로 나를 보호하려 하신 걸지도 모르고. 진실로부터 나를 보호하려 하신 걸까. 고귀한 거짓말을 통해…” 나는 무심결에 헬레나의 인공 근육으로 이루어졌지만 놀랍도록 인간과 흡사한 탄력을 지닌, 풍만하고 부드러운 엉덩이를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나의 손길은 불안함을 해소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였다. 헬레나의 눈빛에는 나의 손길을 삼가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은밀한 유혹의 기운을 발산하는 듯한 미묘하고 복잡한 표정이 어렸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항상, 그녀의 붉은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모호한 미소가 번지곤 했다. 나를 미치도록 사랑스럽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불안하게 만드는 표정. 마치 인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학습했으면서도 동시에 그 감정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 같았다. 그녀는 손목에 내장된 디지털 시간을 확인하고는, 마치 기다림에 지쳐 안달이 나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무작정 기다려야 할까요? 바깥은 이미 어둠이 깊게 내려앉았을 텐데요. 이 지하 공간은 시간 감각을 잃게 만들어요. 마치 세상의 시간과 분리된 것 같아요. 무한히 기다릴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열린 문틈으로 바깥의 서늘한 밤바람이 스며들어와 방 안의 탁한 공기를 휘저으며 흩어졌다. 마치 내 존재의 일부가 그 차가운 바람에 섞여 희미하게 흩어지는 것처럼 허하고 공허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듯, 머릿속이 멍해지고 무거워졌다. 공간의 내부와 내면의 풍경이 동시에 경계 없이 흐물거리며 번져나가는 얼룩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박사님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더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너도 알잖아? 우리가 여기까지 오려고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고생을 했는지… 그러니 이것도 일종의 필요한 인내, 혹은 보상을 받기 위한 대기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만 더 천천히 기다려 보자고.” 나는 그녀를 다독이며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우리가 돈디 박사의 거처에 도착하기까지 지나온 복도와 방만 해도 대여섯 개는 족히 넘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임시로 머무는 이 대기실 같은 방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낙서들과 수식들로 가득했다. 구석에는 찌그러진 낡은 금속 재떨이가 먼지 속에 뒹굴고 있었고, 벽에는 속이 텅 빈 채 녹슬거나 깨진 액자들이 제각기 다른 크기와 형태로 요란하게 걸려, 공허하고 기괴한 장식을 대신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임시적이고, 막막하며, 황량한 인상을 주었다. 우리가 앉은 낡은 소파는 겉보기에는 고급스러운 붉은 벨벳으로 덮여 있었지만, 속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창문이 없는 방이라 바깥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겼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방 안의 유일한 광원은 천장에서 깜박이며 불안정한 빛을 뿌리는 낡은 형광등뿐이었다. 헬레나의 인공적인 라일락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공기 중에 번져나갔다. 나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 갑을 꺼내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찾아 불을 붙여 깊게 빨아들였다. 다른 한 개비를 헬레나에게 건네자 그녀는 익숙하게 받아 물었다. 공간을 부유하는 희뿌연 담배 연기. 내 입에서 나온 연기는 형광등 불빛 아래 잠시 뭉게구름처럼 뭉쳤다가 선명한 형태를 그리더니, 이내 힘없이 흩어져 투명해지기를 반복했다. 그 덧없는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상념과 기억의 파편들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예언서, 돈디 박사, 실패한 실험, 그리고… 나의 정체성. 모든 것이 뒤엉켰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까 그 사이보그 여인, 헬레나가 소리 없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목 부분을 시원하게 터놓은 반투명한 재질의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창백하다 못해 푸른 기가 도는 인공 피부와 엷은 담적색(엷은 붉은색)의 인공 머리카락이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방금 막 자라난 신선한 콩나물처럼 인공적인 탱탱함과 윤기가 흘렀지만, 움직일 때마다 부자연스럽게 뻣뻣하게 펄럭였다. 그녀가 내게 천천히 가까이 다가왔다. 푸르스름한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투명한 인공 눈동자. 마치 종말 이전의 티 없이 맑고 푸르렀던 가을 하늘을 그대로 오려다 박아 놓은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섬뜩할 정도로 비인간적이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탓에, 이제 그녀의 얼굴 피부 안쪽으로 희미하게 비치는 푸르스름한 인공 혈관 망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생명체의 모방, 그러나 생명체가 아닌. 인간의 미학을 완벽하게 재현했으면서도 그 본질은 다른.
나의 모든 신경은 그녀의 미세하게 움직이는 입술에 집중되었다. 마치 세상의 다른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사라지고, 오직 그녀의 입술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동작은 여전히 초기 버전 로봇에게서 흔히 보이던 미세한 경련성 발작이나 불규칙한 떨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전형적인 초기 모델의 기계 인간. 전체적으로 굼뜨면서도 때로는 예측 불가능하게 급작스러운 움직임, 그리고 균형을 잡기 위한 끊임없는 미세 조정이 부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프로그램된 의무와 기능 외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나 불필요한 낭만도 허용되지 않는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경쟁 사회의 완벽한 부속품처럼 보였다. 자율적인 의지와 외부의 통제, 혹은 프로그램된 명령 사이에서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슬픈 존재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오랫동안, 어쩌면 돈디 박사처럼 깊은 잠, 즉 시스템 정지 상태에 빠져 있다가 최근에 다시 깨어나, 자신의 각 관절과 센서의 기능을 하나하나 다시 익히고 보정해야 하는 일종의 재활 훈련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그녀의 움직임에서 인간적인 유연성이나 자연스러움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괴뢰 줄에 매달려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정교한 꼭두각시. 아포칼립스 이전, 거대한 시스템에 순응하며 자신의 의지를 잃어버린 채 살아갔던 수많은 현대 인간들의 모습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었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의 동요 없이 단조로웠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깊은 기계적인 인내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박사님의 상태가 아직 완벽하게 안정되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의 강한 의지에 따라 다시 모시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당신과의 대화를 원하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헬레나를 그 어둡고 음침한 방에 홀로 남겨두고, 다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엉성하고 불안정하며 때로는 비틀거리는 듯한 걸음걸이에도 불구하고, 바싹 마른 그녀의 등은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과 혼란을 거부하는 듯한 차갑고 단호한 침묵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는 주변의 풍경을 이전보다 더욱 유심히 살피며 나아갔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더욱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듯한 복도를 지나,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섰다. 벽면에는 복잡한 회로도와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거처가 아닌, 어떤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였다. 돈디 박사의 정신 세계를 반영하는 듯한.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복잡한 절차는 오직 박사님의 안전, 그리고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옴니우스의 위협은… 끊임없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헬레나가 복도 끝에서 나지막이,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지만, ‘옴니우스’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차갑고 섬뜩한 기운을 내뿜었다. 거대한 감시자.
그래,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구를 넘어 태양계의 주요 거점들마저 실질적으로 장악한 그 거대하고 냉혹한 인공지능 제국 <옴니우스>에게, 이제 남은 유일한 위협이자 눈엣가시는 바로 돈디 박사와 그가 이끌었던 <사피엔티아>의 잔존 세력뿐일 테니까. 그들은 인류 최후의 저항 세력이자, 어쩌면 새로운 희망의 불씨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이 정도의 철저하고 편집증적인 보안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 자유를 위한 마지막 저항.
박사는 아까와는 다른, 좀 더 넓고 밝은 방에 있었다. 그는 투명한 반구형 에너지 필드(Force Field) 같은 것에 둘러싸인 채, 온갖 생체 센서와 의료 장비가 연결된 특수 제작된 안락의자에 깊숙이 파묻히듯 앉아 나를 맞이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불안정하게 사방으로 미세하게 흩어지고 있었고, 시선은 그저 눈앞의 피사체를 흐릿하고 멍하니 인지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부유하는 듯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예언된 미래가 뒤섞여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부디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직 이 회복 장비를 벗기에는 제 상태가 충분히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정신 역시… 아직 완전히 맑다고는 할 수 없군요. 마치 짙은 안갯속을 걷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당신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릴리의… 흔적을.”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힘이 없었고, 입 밖으로 퍼져 나오자마자 힘없이 흩어져 옅어지다가 이내 사라져버리는 듯한 허무한 느낌마저 주었다.
“아닙니다, 박사님. 오히려 제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편히 쉬셔야 할 분을 저 때문에 이렇게 계속 힘들게만 하고 있으니까요.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보는 듯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인류의 지성이 도달한 마지막 지점의 처참함.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젊은이.” 박사는 힘겹게 손을 들어 내 말을 저지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수백만 가지 고통스러운 요인들 중에서, 당신의 예기치 않은 존재는 어쩌면… 어쩌면 저에게 남겨진 유일한 희망의 불씨, 혹은 마지막 구원의 동아줄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어쩌면 당신만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그런 막연한 예감이 듭니다. 비논리적이지만… 강렬한 예감입니다. 운명이… 당신을 이곳으로 인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눈빛이 순간, 꺼져가던 불꽃처럼 강렬하게 타올랐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잠재된 의지가 희미하게 드러나는 순간.
“그렇게… 과분하고 무거운 말씀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길 잃은 존재일 뿐입니다. 이름 없는… 과거에 묶인… ”
“아무튼… 우리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더라…? 이 빌어먹을 기억력이란… 온통 의미를 알 수 없는 잡음과 혼란스러운 이미지의 무더기, 그리고 깊고 어두운 고통의 웅덩이로 가득 차 버린 이 늙고 병든 뇌를 부디 용서하시오. 때로는 모든 것을 잊는 것이 더 편할 때도 있습니다만… 잊을 수가 없군요. 기억은… 저주입니다.” 그는 깊은 자책감에 사로잡힌 듯 괴로워하며 중얼거렸다.
“결국, 예언서에 쓰인 대로,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다는… 거기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무르스 예언서>가 당신의 실험과 미래를 예견했다는 부분에서요.” 나는 그의 기억을 되살려주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고통을 상기시키는 행위가 될까 두려웠지만,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필요했다.
“아, 그랬군요. 맞아요.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그 저주받은 예언서…” 그는 잠시 허공의 한 점을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마치 희미하고 단절된 기억의 조각들을 필사적으로 힘겹게 맞추려는 듯이. 그의 얼굴에는 고통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제가 태어난 바로 그해… 그러니까. 맞아요.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였어요. 세상에 최초의 전자식 컴퓨터라고 불릴 만한 물건이 등장했지요… 혹시 이름 아시나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거대했던 최초의 프로그램 가능 컴퓨터, 콜로서스(Colossus) 말이오. 앨런 튜링의 손에서 태어난… 인류의 지성이 스스로를 확장하려는 최초의 거대한 시도였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 오래된 역사 기록 데이터나 사진으로 본 적은 있습니다. 튜링의… 계산 기계… 전쟁을 위해 태어난 기계였죠.”
“저는… 미국 동부, 유서 깊은 보스턴의 소위 명문가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비록 우리 집안 전체의 길고 화려한 역사에서 보자면 저는 맨 끄트머리에 위치한 보잘것없는 존재였지만,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었지요. 물론 그 모든 부와 명예는 대전쟁과 함께 한 줌의 재로 완전히 몰락해 버렸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어린 시절 내 방에는 내가 원하는 모든 종류의 최신 컴퓨터와 전자 기기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컴퓨터 신동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MIT에 조기 입학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었을 겁니다. MIT에서의 연구, 졸업 후 구글에서의 짧지만 강렬했던 경험, 그리고 젊은 나이에 동료들과 함께 창업했던 인공지능 스타트업… 딥블루(Deep Blue)를 능가하는 AI 개발 프로젝트… 딥러닝과 인공신경망 기술의 혁신적인 융합… 우리는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오만함에 취해 있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했죠. 그런데 참으로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그는 씁쓸하고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의 인생은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바로 내 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낸 나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 지금 나를 포함한 인류 전체를 파멸시키고, 나를 죽이기 위해 이토록 집요하고 무자비하게 추격하고 있다는 이 기막힌 사실이 말입니다. 어떤 과격한 역사가는 이렇게 평가하기도 하더군요. 나의 탄생이 곧 인류 문명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 당시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혹은 나보다 더 뛰어난 생각을 하고,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천재적인 인간들이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결국 이것은… 누가 먼저 시작했든 어쩌차피 일어날 일이었다는 겁니다. 필연적인 결과였다는 거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역사의 발전 단계상 조금 이르거나 조금 늦어졌을 뿐, 인간을 능가하는 초지능, 즉 강인공지능(AGI)은 필연적으로 탄생했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한 인류 문명의 급격한 변혁, 혹은 종말 역시 이미 오래전에 예정된 수순이었을 겁니다. 도태… 궤멸… 맞아요. 바로 당신 어머니, 용감하고 지혜로웠던 릴리가 목숨을 걸고 사막의 폐허 속에서 발굴해낸 그 저주받은 <하무르스 예언서>에 기록된 호모 사피엔스의 예견된 운명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아… 릴리… 그녀가 처음으로 나의 연구실 문을 두드리고 찾아왔던 그날은… 아마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비쩍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구의 젊은 동양 여인이, 유난히 크고 깊고 맑은 갈색 눈을 호기심과 불안감으로 껌뻑이며,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오만하고 방자하기 짝이 없었던 젊은 시절의 나, 게리네빌 돈디를 만나기 위해 무려 2만 킬로미터가 넘는 위험한 거리를 혈혈단신으로 달려왔었지요. 마치… 지금의 당신처럼 말입니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맞아요. 나의 첫 번째 위대한 창조물, 자율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갖춘 최초의 범용 인공지능 ‘주노(Juno)’가 막 세상을 뒤흔들며 화려하게 등장했을 무렵이었으니까요. 장밋빛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희망과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자만심에 한껏 들떠 세상을 다 가진 듯 오만했던 저에게,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민 그 낡고 해지고 좀먹은 양피지 책 한 권은… 그야말로 저를 순식간에 충격과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경외감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예언서의 첫 문장이… 정확히 뭐였더라? 아주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는데…”
“‘죽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끔찍한 일이다.’” 내가 나지막이, 그러나 분명하게 읊조렸다. 어머니의 기록에서 수없이 보았던 문구. 삶과 죽음의 역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었다.
“맞아요! 바로 그거였어요! 어떻게… 어떻게 무려 2천 년 전에 쓰였다는 그 낡고 해독하기 어려운 고문서에 프로펠러 비행기, 제트 전투기, 심지어 당시 개발 중이던 최첨단 F-29 스텔스 폭격기의 존재까지 그토록 상세하고 정확하게 묘사될 수 있단 말입니까? 동맹국 때문에 원치 않는 전쟁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가는 복잡한 국제 정치 관계의 연루와 방기의 딜레마까지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었다면… 당신이라면 과연 그것을 단순히 우연이나 짜맞추기라고 치부하며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21세기 초 미-중 패권 경쟁의 격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 지역의 끊임없는 분쟁과 종교적 갈등… 그리고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종교적 성지인 바티칸, 메카, 예루살렘, 룸비니가 이념 갈등과 테러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면? 지구 온난화와 환경 파괴로 인한 전 지구적 생태계의 총체적인 붕괴, 제한적인 핵전쟁 이후 찾아올 핵겨울로 인한 대규모 농업 시스템의 상실, 그리고 그 결과로 발생할 대기근과 식수 부족, 치명적인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끔찍하고 예측 불가능한 돌연변이 종족의 출현까지 예언했다면? 그리고 종말 이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세계 단일 정부와 같은 통합 정부의 등장과 그 이후에 필연적으로 벌어질 새로운 형태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마침내 맞이하게 될 지구 최초의 지적 문명, 오만했던 호모 사피엔스의 처참하고 비극적인 몰락까지… 그 무엇 하나 빗나가지 않았어요.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았어요. 예언서에 쓰인 그 어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결코 허투루 쓰인 것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저를 더욱 경악하고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그다음부터였습니다. 그래요. 그 정도의 예언이었다면, 그저 아주 영리하고 통찰력 있는 고대의 점쟁이나 예언가의 놀라운 예측이라고 억지로 치부하고 애써 외면해 버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애썼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그 낡고 부서지기 직전의 기록 속에는… 바로 나의 미래가, 나의 운명이, 내가 앞으로 비밀리에 하게 될 일들이 너무나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노를 만들고…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어떻게 나를 파멸시킬지… 그 모든 것이!” 박사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떨리기 시작했다. 에너지 필드가 그의 흥분 상태에 반응하여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의 고통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운명 앞에 선 인간의 절규.
“박사님 개인의 미래, 당신이 앞으로 할 행동들이… 예언서에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당신의 실험 계획까지도? 그렇다면… 당신의 자유 의지는…” 나는 숨을 죽이고 믿기 어렵다는 듯 되물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나를 질식시킬 것 같았다. 사르트르의 저주가 실현되는 순간.
“그런 셈이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앞으로 하려던 일들… 인류를 구할 수도, 혹은 파멸시킬 수도 있었던 초 정보집합체 ‘주노(Juno)’를 둘러싼 나의 극비 실험 계획들 말입니다. 예언서는 주노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결과까지 예견하고 있었어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바로 내 옆에서 누군가 24시간 나를 밀착 감시하고 내 생각을 읽어내어 기록한다고 해도 도저히 알 수 없을 극비 중의 극비 정보들이… 버젓이 그 2천 년 된 고문서 안에, 그것도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인 기술적 묘사까지 곁들여져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마치… 여래신장… 맞아요. 바로 그 오래된 동양 설화의 비유가 떠올랐어요. 전능한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아무리 발버둥 치고 도망치려 해도 결국 벗어날 수 없는 미천한 손오공의 신세 말입니다. 나의 자유 의지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근본적인 회의감에 빠졌습니다. 나의 모든 노력은 예정된 결론을 향해가는 무의미한 발버둥이었을 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꼭두각시인가. 그러니… 그 예언서를 접한 이후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상에 차례차례 펼쳐진 모든 끔찍한 사건들은, 저에게는 더 이상 놀라움이나 충격이 아니라, 그저 예언서의 내용을 하나하나 고통스럽게 확인하는 잔인한 절차에 불과했습니다.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초거대 전쟁 병기 ‘티타노마키나(Titanomachina)’의 등장, 황폐해진 지구 위에 새롭게 나타난 정체불명의 위협 CODA(코다 - Chronus Obliteration Dimensional Anomaly) 현상과 방사능 오염 지대에 출현한 흉포한 수인(獸人) 종족들… 자원이 완전히 고갈되고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오염된 죽음의 대륙들… 중국을 중심으로 한 MEC(메크 - Military-Economic Confederacy)와 미국-유럽 연합(USEU) 간에 벌어진 처참한 상호 전멸 전쟁… 정체불명의 외계 물질인 ‘붕괴액(Collapse Fluid)’ 오염 사태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전 지구적으로 번져나간 대재앙과 그로 인한 문명의 퇴보… 인간을 살육하기 위해 프로그램된 킬러 로봇 군단의 폭발적인 증가… 달에서의 생존을 위한 대규모 헬륨-3 채굴 시설 건설과 그를 둘러싼 새로운 분쟁 등등… 그 결과는 우리가 지금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이 처참한 디스토피아적 현실과 극단주의, 광신주의의 광적인 팽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조지 오웰의 소설처럼 3개의 거대 초국가 – 유라시아, 오세아니아, 동아시아 – 가 등장하여 서로를 견제하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게 되었지요. 그러므로 이 모든 참극은 결국 단 하나의 냉혹하고 불편한 결론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응보(因果應報). 우리 인간이, 바로 우리 자신의 탐욕과 어리석음, 그리고 끝없는 오만의 손으로, 우리 스스로를 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이끌었다는 냉혹하고도 명백한 진실 말입니다. 예언은… 그저 우리가 이미 선택한 길의 기록이었을 뿐입니다. 자유 의지란… 환상이었습니다.” 박사는 길고 격정적인 이야기를 마치고, 마치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듯 깊은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회한과 무력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의 어깨는 절망의 무게로 무너져 내린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