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cPCLFtxpadE?si=M4w1phzKJ6wv2FM7
코블렌츠의 시가지는 젖은 캔버스 위로 물감이 번져나가는 풍경 같았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익숙한 회전교차로(Kreisverkehr)였다. 꼬리를 문 자동차들의 행렬. 나는 거대한 트럭의 몸뚱이를 비집고 들어가, 원심력을 거스르며 궤도를 따라 천천히 맴돌았다. 빙글빙글. 끝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이 움직임이 지금 내 머릿속을 점령한 기억의 회전목마와 닮아 있었다. 나는 텅 빈 화물칸의 울림을 등 뒤로 느끼며, 낡은 CD 플레이어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아닌, 내 손으로 직접 고른 음반을 걸고 볼륨을 높이던 시절. 그 시절의 플레이리스트는 지금처럼 무작위적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명확한 의도와 감정의 흐름이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켰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그 시절의 주파수를 찾아 헤맸다.
손가락이 Yes의 앨범 커버를 건드리는 순간, 스피커에서는 현란한 어쿠스틱 기타 인트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Roundabout>. 스티브 하우의 기타, 크리스 스콰이어의 베이스, 릭 웨이크먼의 키보드가 각기 다른 궤도를 그리며 돌진하다가, 어느 마법 같은 순간에 완벽한 하나의 중심으로 합쳐지는 음의 건축물이었다. 복잡하지만 정교하게 계산된 구조, 현란한 기교 속에 숨겨진 서정성, 끊임없이 변주하며 클라이맥스를 향해 질주하는 에너지. 이 음악은, 그 비 오던 밤 이후 우리가 함께 만들어냈던 가장 눈부신 시간들을 위한 완벽한 배경음악이었다.
그날 밤, 그녀의 집 앞에서 뺨에 남은 입맞춤의 온기를 간직한 채 돌아온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것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근원적인 것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프로그래머로서의 나는 늘 문제 해결에 집착했다. 버그가 생기면 원인을 분석하고, 가장 효율적인 코드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내 존재 이유였다. 그러나 서연의 슬픔 앞에서 나의 모든 논리는 무용지물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우산을 씌워주고, 어깨를 감싸주고, 그녀의 고통을 침묵 속에서 함께 감내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무력한 공감이야말로 그녀에게 가장 필요했던 위로였다.
나는 깨달았다. 그녀를 구원하는 방법은 그녀를 이성적인 세계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꺼이 그녀의 비논리적인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것임을. 그녀의 혼돈을 두려워하는 대신, 그 안에서 함께 춤을 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다음 날 회사에서 마주친 서연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밤새 앓았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이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이전까지 존재했던 얇고 투명한 막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훨씬 더 깊고 내밀한 종류의 연결이 자리 잡았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세계를 곁눈질하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의 영토에 발을 들인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그 주 주말, 나는 그녀를 내 오피스텔로 초대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을 보냈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용기를 내어 내 안에서 싹트고 있던 생각을 꺼내놓았다.
“서연아.”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스탠드의 부드러운 조명이 그녀의 옆얼굴에 따뜻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는 편안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네가 지난번에 보여줬던 개인 작업들….”
그녀의 어깨가 순간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그녀에게 상처이자 자부심인, 가장 연약한 속살이었다.
“그 이미지들, 움직이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움직이게… 만든다고?”
“응. 인터랙티브하게. 사용자가 마우스를 클릭하거나 움직이면, 이미지의 일부가 반응하는 거야. 시계태엽 심장에서 나비가 날아오르고, 눈물을 흘리는 달이 사용자의 커서를 따라 움직이고, 깨진 거울 조각을 클릭하면 다른 기억의 풍경이 나타나고….”
나는 내가 가진 모든 프로그래밍 지식을 동원해, 그녀의 정적인 그림에 어떻게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바스크립트의 이벤트 리스너, CSS의 동적인 속성 변화, 캔버스 API를 이용한 렌더링. 나의 기술적인 용어들이 그녀의 예술적인 이미지들과 충돌하며 기묘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듣고 있던 그녀의 눈이,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여, 내 설명에 완전히 몰입했다.
“그런 게… 가능해?”
“물론이지. 내가 뼈대를 만들고, 신경망을 까는 거야. 그럼 그 위에 네가 살을 붙이고, 피를 돌게 하고, 영혼을 불어넣는 거지. 이건 회사 프로젝트가 아니야. 클라이언트도, 마감일도 없어. 오직 우리 둘만의 프로젝트인 거야. 우리가 만들고 싶은 걸,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제안이 끝났을 때, 방 안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이것은 그녀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는 오만한 제안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입가에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체념이나 자조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찬 미소였다.
“좋아.” 그녀가 말했다. “우리만의 주파수를 만들어보자.”
그렇게 우리의 비밀스러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내 작은 오피스텔은 낮에는 평범한 주거 공간이었지만, 밤이 되면 두 명의 마법사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비밀 실험실로 변모했다. 우리는 퇴근 후면 으레 내 집으로 향했다. 저녁을 간단히 때우고, 나란히 책상 앞에 앉아 두 개의 모니터를 켰다. 왼쪽은 그녀의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가, 오른쪽은 나의 텍스트 에디터와 브라우저가 차지했다.
그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농밀한 순간들이었다. 우리의 협업은 마치 정교한 듀엣 연주 같았다. 그녀가 먼저 이미지의 파편들을 던져주면, 나는 그것들을 웹상에서 구현할 구조를 설계했다. 그녀는 색과 형태, 질감과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나비의 날갯짓은 좀 더… 처연했으면 좋겠어. 희망을 향해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마지막 힘을 다해 추락하는 느낌으로.” 그러면 나는 중력 값을 조절하고, 프레임 속도를 미세하게 조정하며 그녀가 원하는 ‘처연한’ 움직임을 코드로 번역해냈다.
반대로 내가 기술적인 제약을 설명하면, 그녀는 그 제약 안에서 새로운 창의력을 발휘했다. “이 부분에 3D 효과를 넣는 건 지금 기술로는 너무 무거워. 로딩 시간이 길어질 거야.” 그러면 그녀는 고민에 잠겼다가, 이내 평면적인 2D 이미지들을 겹겹이 쌓아 깊이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는 제약을 창의성의 감옥이 아닌, 새로운 해법을 찾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육체는 극도로 가까워졌다. 좁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있다 보니, 우리의 팔과 어깨는 늘 맞닿아 있었다. 그녀가 내 모니터를 보기 위해 몸을 기울일 때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내 뺨을 부드럽게 스쳤고, 나는 그녀에게서 나는 샴푸 향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곤 했다. 그녀의 체온이,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이, 그녀의 숨결이 내 모든 감각에 각인되었다. 나는 코드에 집중하다가도, 문득 내 옆에 앉아 있는 그녀의 존재 자체에 압도당하곤 했다. 모니터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 무언가에 몰두할 때 살짝 벌어지는 입술, 마우스를 쥔 가늘고 긴 손가락. 그녀는 내게 살아있는 예술 작품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우리의 몸은 피로를 호소했다. 뻣뻣해진 목을 주무르며 잠시 작업을 멈출 때,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곤 했다. 그 시선 속에는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교감이 흘렀다. 동지애, 존경, 그리고 사랑.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뭉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그녀는 나른한 신음을 흘리며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녀의 승모근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녀의 근육이 내 손안에서 조금씩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몸은 그녀가 겪어온 모든 스트레스와 긴장을 기록하는 역사서와도 같았다. 나는 그 역사를 읽어내듯,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쌓인 피로를 정성스럽게 풀어주었다. 내 손길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자, 그녀는 기분 좋은 듯 고양이처럼 목을 기울였다. 나는 드러난 그녀의 하얀 목선에, 그리고 가느다란 솜털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것은 성적인 욕망을 넘어선, 그녀의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이었다.
어느 날 새벽, 우리는 마침내 프로젝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완성했다. 유리 새장 안에 갇힌 시계태엽 심장이, 사용자의 클릭에 반응하여 처음으로 날갯짓을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마지막 코드를 입력하고 엔터 키를 눌렀다. 잠시 동안의 정적. 그리고, 모니터 속의 심장은 기적처럼 퍼덕이기 시작했다. 날개에서는 금빛의 가루가 흩날렸고, 배경에서는 우리가 미리 녹음해 둔 첼로의 낮고 슬픈 선율이 흘러나왔다.
“……!”
서연은 숨을 삼켰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자신의 상상이 현실이 된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환희와 감동, 그리고 스스로의 창조물에 대한 경외심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내 생애 가장 완벽한 성취감을 느꼈다. 수십억 원짜리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을 때보다, 업계에서 최고의 프로그래머라는 찬사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깊고 충만한 기쁨이었다. 나는 그녀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도구가 되었다. 나의 논리가, 그녀의 영혼이 춤출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브라보.”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 한마디. 그것은 내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찬사였다. 세상의 그 어떤 평가도, 그 어떤 보상도 그 한마디가 주는 감동에 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키보드와 마우스로 굳은살이 박인 내 투박한 손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 순간, Yes의 음악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모든 악기들이 각자의 기교를 뽐내며 하나로 어우러져 거대한 사운드의 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리의 심장 박동도 그 음악처럼 빠르고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결과, 그녀의 눈물로 축축해진 감촉을 동시에 느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언어는 필요 없었다. 우리의 눈빛이, 우리의 숨결이, 우리의 맞닿은 피부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이 만났다.
그것은 이전의 어떤 키스와도 달랐다. 그것은 단순히 애정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개의 다른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창조의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서 커피의 쌉쌀한 맛과, 그녀가 방금 흘린 눈물의 짠맛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는 내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고, 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내 몸에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이 내 단단한 가슴에 맞닿는 감촉. 그녀의 심장 박동이 내 갈비뼈를 통해 전해져 오는 진동.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탐닉했다. 나는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매끄러운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그녀는 내 목을 감싸 안고, 내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파묻었다. 우리의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졌고, 키스는 점점 더 깊어졌다.
그 밤, 우리는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의 신이었고, 서로의 뮤즈였으며, 서로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이 완벽하게 공명하는, 우리만의 주파수를 찾아냈다. 그 주파수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웠다.
트럭은 어느새 코블렌츠 시내를 벗어나, 내가 사는 한적한 주택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Yes의 현란했던 연주는 끝나고, 이제는 차창 밖 귀뚜라미 소리인지 풀벌레 소리인지 모를 단조로운 소음만이 들려왔다. 나는 우리 집 앞, 지정된 주차 공간에 거대한 트럭을 세웠다. 시동을 끄자, 세상은 완전한 침묵에 잠겼다.
나는 한동안 운전석에 앉아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내 온몸을 휘감았던 그 뜨거운 기억의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녀의 입술의 감촉, 그녀의 숨결, 그녀의 눈물 섞인 ‘브라보’라는 속삭임.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마치 조수석에 그녀가 여전히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축축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내 뜨거운 뺨을 식혔다. 나는 텅 빈 거리를 걸어 내 아파트 현관으로 향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만의 주파수를 찾아냈었다. 세상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완벽한 조화의 순간들을 만들어냈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그 주파수를 잃어버린 걸까. 어째서 지금 나는, 이토록 깊고 차가운 침묵 속에 홀로 갇혀 있는 걸까.
현관문을 열고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으로 들어서며, 나는 깨달았다. 가장 눈부신 순간의 기억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가장 잔인하게 빛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오늘 밤, 그 잔인한 빛 속에서 잠 못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https://youtu.be/k80fJbzcz38?si=M1y2B_X-JnvJ3w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