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없는 풍경의 데칼코마니

by 남킹

https://youtu.be/Mgq_EhrWvGw?si=MycDHzh2pN8xiL0-


킹 크림슨의 광기가 남긴 잔향이 트럭의 철제 캐빈 안에서 서서히 잦아들었다. 마치 격렬한 폭풍우가 할퀴고 지나간 뒤의 고요처럼, 내 귀에는 이명과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교통정체는 거짓말처럼 풀려 있었고, 스카니아는 다시금 정해진 속도를 되찾아 젖은 아우토반 위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가속 페달을 밟는 발목의 감각이 낯설었다. 방금 전까지 브레이크와 클러치 위에서 경련하듯 떨던 근육이 이제는 길고 부드러운 이완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정신의 정체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서연의 울음 섞인 얼굴, 그녀가 쏟아냈던 날 선 단어들이 시야의 가장자리에 잔상처럼 떠다녔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켰다. 이번에 흘러나온 음악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밴드 모과이(Mogwai)의 <Take Me Somewhere Nice>. 전주는 거의 침묵에 가까웠다. 희미하고 서정적인 기타 아르페지오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조심스럽게 공간을 채웠고, 그 위로 속삭이는 듯한 보컬이 나지막이 얹혔다. 공격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내향적이고 관조적인 사운드. 그것은 마치 신경을 마취시키는 대신, 아주 가늘고 섬세한 침을 꽂아 넣어 막혀 있던 혈을 뚫어주는 듯한 음악이었다.

음악이 바뀌자, 창밖의 풍경도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굵었던 빗줄기는 어느새 보슬비로 변해, 세상의 모든 경계선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인츠의 공업지대를 지나며 나타나는 평야,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 드문드문 서 있는 풍력발전기의 실루엣까지. 모든 것이 한 겹의 얇은 회색 막에 싸여 채도를 잃어버린 채였다. 세상은 거대한 흑백사진이 되어 내 주위를 둘러쌌다. 와이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격렬한 칼날의 몸짓이 아니었다. 느리고 규칙적인 움직임. 왼쪽으로 쓸어낼 때마다 뿌옇던 시야가 잠시 선명해졌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오며 다시 흐릿해지기를 반복했다. 그 단조로운 왕복운동은 슬픔을 위한 메트로놈 같았다. 째깍, 째깍. 과거를 향해 한 걸음, 현재로 다시 한 걸음.

모과이의 기타 선율은 빗소리와 완벽하게 뒤섞여, 이제 무엇이 음악이고 무엇이 자연의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소리의 직물 속에서, 하나의 감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젖은 아스팔트와 흙먼지가 뒤섞인 냄새. 2025년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맡는 그 냄새는, 시간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25년 전 서울의 어느 장마철 밤으로 나를 데려갔다.

데칼코마니. 어릴 적 미술 시간에 하던 놀이. 도화지의 한쪽에 물감을 짜고 반으로 접었다 펴면, 양쪽에 대칭의 기묘한 무늬가 찍혀 나왔다. 지금 내 의식 속에서 바로 그 데칼코마니가 일어나고 있었다. 현재의 이 회색빛 독일 풍경은 도화지의 한쪽 면이었고, 25년 전 그 비 오던 밤의 기억은 다른 한쪽에 짜놓은 짙은 잉크였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꾹 누르며 지나갈 때마다, 두 개의 시간은 하나로 겹쳐지며 기이하고도 선명한 얼룩을 내 영혼에 새기고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습하고 더운 여름밤이었다. 클라이언트에게 또 한 번의 잔인한 거절을 당한 날. 서연이 자신의 영혼의 파편과도 같았던 작업물들을 제 손으로 삭제해버린 바로 그날 밤이었다. 그녀의 책상 위, 모니터의 검은 화면은 마치 모든 것이 끝난 뒤의 묘비처럼 보였다. 사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냉방 장치가 토해내는 인공적인 바람 소리, 서버실에서 들려오는 낮은 기계음, 그리고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그 공간의 유일한 생명 활동이었다.

나는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이제는 실 한 오라기조차 움직일 힘이 없는 마리오네트. 그녀의 어깨는 너무나 가늘고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괜찮아.’, ‘힘내.’, ‘그놈들이 뭘 알겠어.’ 같은 상투적인 위로의 말들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그 어떤 단어도 이 상황의 본질에 닿을 수 없음을 알았다. 나의 논리적인 언어는 그녀의 무너진 세계 앞에서 무력했다. 그것은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가서 건축 설계도를 펼쳐 보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사무실 구석에 놓여 있던 내 우산을 집어 들었다. 싸구려 검은색 장우산. 편의점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샀던, 그래서 손잡이의 비닐조차 뜯지 않은 우산이었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우산을 펼쳤다. ‘펑’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우산은 우리 둘을 에워싸는 작은 지붕이 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모든 감정이 빠져나간 뒤의 진공 상태. 눈물조차 마른 사막.

“가자.”

내가 내뱉은 유일한 단어였다. 그것은 명령도, 권유도 아니었다. 그저, 이 절망의 공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존 본능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사무실을 나섰다.

빌딩의 현관을 나서는 순간, 후덥지근한 밤공기가 우리를 덮쳤다. 빗줄기는 아스팔트 위에서 부서지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냈고, 도시의 네온사인은 그 물보라 속에서 번져나가 거대한 추상화처럼 일렁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차가운 빗물이 내 오른쪽 어깨를 순식간에 적셨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차가움이 현실 감각을 되찾아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은 회사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버스를 탈 수도, 택시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무언의 약속처럼, 우리는 그저 빗속을 묵묵히 걸었다.

내 신경은 온통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우산 아래, 우리의 몸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녀의 코트 자락이 내 바지에 스치는 감촉,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풍겨오는 샴푸 향과 빗물의 냄새가 뒤섞인 향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어깨를 통해 내 팔로 전해져 오는 미세한 떨림.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이 울고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근원적인 슬픔이 그녀의 근육과 신경을 미세하게 경련시키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며, 마치 그녀의 슬픔의 일부가 내 몸으로 옮겨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우리의 발소리만이 유일한 대화였다. 내 구두가 아스팔트 위에서 내는 둔탁한 소리와, 그녀의 작은 단화가 물웅덩이를 지날 때 내는 첨벙이는 소리가 불규칙한 리듬을 만들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갔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걸어가는 우산의 행렬. 그러나 우산 아래의 우리는, 그 어떤 목적지도 없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난파선의 생존자들 같았다.

한참을 걸었을까,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있잖아.”

그녀의 목소리는 비에 젖어 잔뜩 쉬어 있었다.

“오늘 클라이언트가 내 시안을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앞만 본 채 말을 이었다.

“자기는 자기 딸 방에 걸어놓을 그림을 사려는 게 아니래. 자기 회사 물건을 팔아줄 전단지가 필요한 거래.”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젖은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처럼 위태롭게 들렸다. “전단지… 내가 밤을 새워서 만든 게, 결국은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같은 거였던 거야.”

나는 가슴이 저며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세계관 전체를 부정하는 폭력이었다. 그녀에게 디자인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을 인식하고, 소통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 방식을 거부하고, 훨씬 더 단순하고 노골적인 화법을 강요하고 있었다. 팔기 위한 언어, 유혹하기 위한 언어, 기능적인 언어만을 요구했다.

“내가 틀린 걸까?” 그녀가 물었다. “내가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인 걸까? 그냥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예쁘고 팔기 좋은 껍데기를 만들어주는 게 맞는 걸까? 그렇게 내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그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에게 던지는 독백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삶의 방식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다만, 우산을 쥔 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아주 조심스럽게 감쌌다.

내 손바닥이 그녀의 젖은 코트에 닿는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주 미세하게, 내 쪽으로 몸을 기대왔다. 나는 그녀의 체온을, 그녀의 심장 박동을, 그녀의 존재의 무게를 온전히 느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몸을 의지한 채, 계속해서 걸었다.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도시의 소음은 빗소리에 묻혀 멀어져 갔고, 세상에는 오직 우리 두 사람과 이 비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집 앞 골목에 다다랐을 때였다. 가로등 불빛이 빗줄기를 금빛의 실처럼 보이게 하는 곳. 그녀는 그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텅 비어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희미한 빛이 돌아와 있었다. 그 눈에는 수만 가지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슬픔, 분노, 체념, 그리고… 고마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차가운 입술이 내 뺨에 가볍게 닿았다. 그것은 연인 사이의 키스와는 다른, 훨씬 더 근원적인 의미를 가진 접촉이었다. 그것은 구원의 확인이었고, 이해에 대한 감사였으며, 절망의 한가운데서 발견한 유일한 온기에 대한 응답이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녀의 입술이 머물렀던 뺨의 한 점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시간은 영원처럼 늘어났다.

그녀는 내게서 떨어져,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그녀는 뒤돌아서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낡은 다세대 주택의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낮게 울렸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 오른쪽 어깨는 비에 흠뻑 젖어 차가웠지만,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왼쪽 뺨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 극명한 온도의 차이가, 그날 밤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의 총합이었다.

모과이의 음악이 서서히 페이드아웃되고 있었다. 마지막 기타 음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자, 트럭 안에는 다시 현실의 소리만이 남았다. 와이퍼가 유리를 닦는 소리, 타이어가 물을 밀어내는 소리.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왼쪽 뺨을 만졌다. 25년이 지났지만, 그날 밤 그녀의 입술이 남기고 간 그 희미한 온기가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코블렌츠 시내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았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돌아가서 쉴 곳이 있다는 것은 안도감을 주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은 집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전, 낡은 다세대 주택의 철문 너머로 사라졌던 그녀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아름답거나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연약함을 사랑했다. 세상의 거친 논리와 불화하며 상처 입는 그녀의 영혼을, 그 상처를 끌어안고도 자신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처절한 고집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연약함 앞에서, 나의 모든 논리와 이성이 무너져 내리고 오직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는 원초적인 본능만이 남는 내 자신을 사랑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강한 모습이 아닌, 가장 약한 모습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트럭은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남쪽 다리(Südbrücke) 위를 달리고 있었다. 강물은 잿빛 하늘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나는 강 저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요새의 육중한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수백 년 동안 저 도시를 지켜온 견고한 성채. 나는 그녀에게 저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녀의 세계를 지켜주는 단단한 벽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그녀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포탄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운전대에 이마를 기댔다. 데칼코마니는 완성되었다. 2025년 독일의 비 내리는 풍경 위로, 2000년 서울의 비 내리는 밤이 완벽하게 찍혀 나왔다. 두 개의 다른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슬픔으로 합쳐져, 내 안에서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그 얼룩을 품은 채,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와이퍼가 마지막으로 유리를 한번 닦아냈을 때, 나는 그 유리 위에서 눈물을 흘리는 내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것이 빗물 때문인지, 정말 나의 눈물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https://youtu.be/MbjO9S9TRsc?si=qMte62yzjGzkYd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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