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DDf_SuAlBA?si=1MYNUL-9cClV8XsH
차가운 물컵을 내려놓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밤의 한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억의 무게, 그리고 그 기억이 예고하는 피할 수 없는 파국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 때문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소파로 돌아와 다시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서는 차가운 외풍이 스며드는 듯했고, 뱃속에서는 허기가 뒤늦게 날카로운 통증으로 존재를 알렸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여정을 끝까지 마주할 용기였다. 그리고 그 용기를 얻기 위해,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잔인한 채찍을 휘둘러야만 했다.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거의 듣지 않는 재생목록을 열었다. 그곳에는 편안함이나 아름다움 대신, 혼돈과 불안, 광기와 절망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불길한 앨범 커버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흐릿하고 기괴한 흑백 사진, 번개에 맞은 듯한 나무. Van der Graaf Generator - Pawn Hearts. 나는 그 앨범의 마지막 트랙, 23분이 넘는 대곡 <A Plague of Lighthouse Keepers>를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스피커에서는 지옥의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틀리고 불협화음을 내는 오르간, 신경질적으로 공간을 할퀴는 색소폰, 그리고 이 모든 혼돈 위에서 신의 저주를 받은 예언자처럼 절규하는 피터 해밀의 보컬. 이 음악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판이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조율된 것처럼 보였던 우리의 세계에 첫 번째 균열이 생겨나던 그 순간을 위한, 가장 완벽한 진혼곡이었다.
우리만의 우주, ‘눈 거위’를 완성한 후, 우리는 한동안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창조자이자 연인이었다. 내 오피스텔은 세상의 모든 논리와 상업주의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견고한 요새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의 영혼을 먹고 마시며, 이전보다 더 깊고 단단한 신뢰를 쌓아갔다. 회사에서의 시간은 그저 우리의 성역으로 돌아가기 위한 티켓을 버는 지루한 노동에 불과했다. 우리는 회사 사람들과의 술자리도, 주말의 약속도 모두 거절했다. 우리의 우주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은 무의미하고 하찮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떤 요새도 영원히 고립될 수는 없는 법. 세상은 끈질기게 우리의 성벽을 두드렸다. 그 첫 번째 노크는, 가장 달콤하고 유혹적인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날 오후, 나는 사장실로 호출되었다. 우리 회사의 사장은 카리스마와 냉철함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최고급 원단으로 맞춘 슈트를 입었고, 그의 집무실은 테헤란로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빌딩 최상층에 있었다. 거대한 통유리창, 광택이 나는 마호가니 책상, 벽에 걸린 유명 작가의 추상화. 모든 것이 그의 성공과 권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곳은 서연과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자본주의 시스템의 심장부와도 같은 공간이었다.
“박 팀장.”
사장은 나를 최고급 가죽 소파에 앉히고, 직접 위스키를 한 잔 따라주었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포식자의 예리함이 숨어 있었다.
“자네가 우리 회사에 온 뒤로 개발팀의 안정성과 효율성이 놀랍도록 향상됐어. 자네는 단순한 프로그래머가 아니야. 자네는 구조를 보고, 미래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의 칭찬은 달콤했지만, 나는 그가 본론을 꺼내기 전의 서곡임을 직감했다. 내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위스키 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자네에게 새로운 자리를 제안하고 싶네.” 그가 말했다. “개발팀장을 넘어, 우리 회사의 기술적인 비전 전체를 책임지는 R&D 센터 총괄 이사직을 맡아주게.”
순간, 내 머릿속이 하얘졌다. 총괄 이사. 그것은 단순한 승진이 아니었다. 회사의 핵심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최고 경영진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였다. 엄청난 연봉 인상과 스톡옵션, 법인 카드와 개인 기사가 딸린 차량. 서른 중반의 나이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사장은 내 표정을 읽었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책임도 막중해지겠지. 하지만 나는 박 이사가 충분히 해낼 거라고 믿어. 자네의 그 논리력과 추진력으로 우리 회사의 기술력을 10년은 앞당겨주게. 이건 자네에게도, 회사에게도 엄청난 기회야.”
기회. 그 단어가 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나의 이성은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를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 이것은 성공이었다. 사회적인 인정이었고, 경제적인 안정을 넘어선 부의 약속이었다. 내 안의 깊숙한 곳에서, 수년간 나를 지배해왔던 ‘논리적인 나’가 소리치고 있었다. ‘잡아! 이건 네가 평생을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야!’
그러나 동시에, 내 심장의 다른 한편에서는 차가운 불안감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경멸하던 바로 그 시스템의 최상층부로, 내가 기꺼이 걸어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만든 우리의 성역을 지키는 파수꾼이 아니라, 그 성을 포위한 군대의 장수가 되려는 것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십시오.”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사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하지만 너무 오래 고민하진 말게.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
사장실을 나오는 내 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복도를 걸어 내 자리로 돌아오는 그 짧은 거리가, 마치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위스키 잔을 보았다. 황금빛 액체. 그것은 성공의 축배가 아니라, 내 영혼을 팔아넘긴 계약서에 찍을 인주처럼 보였다. 나는 그 제안이 우리의 세계에 가져올 균열을, 그 파괴적인 여파를 본능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평소보다 늦게 그녀가 기다리는 내 오피스텔로 향했다. 손에는 그녀가 좋아할 케이크 상자를 들었지만, 발걸음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보고 싶었잖아.”
그녀는 내게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내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죄책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의 순수한 미소와 신뢰 앞에서, 나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우리는 케이크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척, 평소처럼 그녀와 농담을 주고받고, 그녀의 하루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내 안의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언제까지고 이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문제였다.
밤이 깊어지고, 우리가 나란히 침대에 누웠을 때, 나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
“서연아.”
“응?” 그녀는 잠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내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내 턱을 간질였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내게 전해져 왔다. 나는 이 완벽한 평화를 내 손으로 깨뜨려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오늘… 사장님을 만났어.”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잠겨 있었다. 그녀의 몸이 순간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내 품에서 빠져나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사장이 내게 했던 제안을, 최대한 담담하고 객관적인 사실처럼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사직, 연봉, 스톡옵션. 그 단어들이 내 입에서 나올 때마다, 마치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삼키는 것처럼 목이 아팠다. 내 설명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의 따뜻했던 체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몸에서는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내 말이 끝났을 때, 침묵이 찾아왔다. 그것은 이전의 그 어떤 침묵과도 다른, 모든 생명 활동이 정지된 듯한 절대적인 침묵이었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제발,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반응만은 아니기를. 제발, 나를 이해해주기를.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유리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래서… 수락할 거야?”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당신과 상의하고 싶었어.”
“상의?”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가 어둠 속에서 비수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꽂혔다. “이미 당신 마음은 정해진 거 아니야? 그 ‘기회’를 놓칠 당신이 아니잖아. 박 팀장님, 아니, 박 이사님은.”
그녀의 말투는 지독하게 비꼬는 투였다. 나는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왜 그렇게 말해? 이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우리가 더 안정적인 미래를….”
“안정적인 미래?” 그녀가 내 말을 끊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실루엣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당신이 말하는 그 ‘안정’이라는 게 뭔데? 더 넓은 아파트? 더 비싼 차? 그런 걸로 우리 ‘눈 거위’를 살 수 있어? 우리의 시간을, 우리의 영혼을 살 수 있냐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격앙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규였다.
“나는… 나는 당신과 함께라면 이 좁은 오피스텔도 궁전이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함께 만드는 이 세계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고!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결국 저들 편에 서려는 거잖아! 당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그 시스템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들의 개가 되겠다는 거잖아!”
“말 함부로 하지 마!”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그들의 개야! 나는 내 능력을 인정받은 거라고!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면, 당신을 더 지켜줄 수 있어! 더 이상 클라이언트 따위에게 당신의 예술이 모욕당하지 않게, 내가 방패가 되어줄 수 있다고!”
나는 진심이었다. 나는 내 권력으로 그녀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말은 그녀에게 최악의 모욕으로 들렸을 뿐이었다.
“방패? 지켜줘?”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내가 언제 당신한테 지켜달라고 한 적 있어? 나는 당신이 내 옆에서 함께 싸워주길 바랐던 거야! 저 거대한 시스템과 맞서 싸우는 동지가 되어주길 바랐던 거라고! 그런데 당신은 성벽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서, 나 혼자 성문 밖에 버려두려는 거잖아. 그러고는 성벽 위에서 나한테 동정의 빵 부스러기라도 던져주겠다는 거야?”
그녀의 비유는 너무나도 정확해서,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내 선택의 본질을, 그 비겁함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음악은 이미 광기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피터 해밀의 보컬은 더 이상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문당하는 영혼의 비명이었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의 끝에서 부르는 파멸의 노래였다. 음악의 혼돈과 내 머릿속의 혼돈, 그리고 우리 사이의 혼돈이 하나로 뒤섞여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녀는 방의 불을 켰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불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분노와 실망, 그리고 깊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지만,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그 눈물은 그녀의 눈 안에서 들끓으며, 나를 향한 원망의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당신은 몰라.”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이해한 적이 없어. 내가 왜 그토록 이 시스템을 증오하는지. 당신은 우리의 작업을 그저 ‘사이드 프로젝트’ 정도로 생각했겠지. 현실에서의 성공을 위한 잠시의 유희 정도로. 하지만 나한테는… 그게 내 삶의 전부였어. 당신과 함께 만든 그 세계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고.”
그녀는 방 안을 미친 사람처럼 서성였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 그녀가 느끼는 배신감과 절망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나는 침대에 무력하게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우리 사이에는 이미 너무나도 깊고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건널 수 없는 강.
그날 밤, 우리는 서로에게 지독한 상처를 입혔다. 우리의 대화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서로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베고, 찌르고, 후벼 팠다. 우리의 사랑이 깊었던 만큼, 상처는 더 깊고 치명적이었다.
싸움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끝났다기보다는, 우리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상처를 주고받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탈진한 채 침대 한쪽 구석에, 나는 반대쪽 구석에 등을 돌리고 누웠다. 방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 어색한 밝음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고통스럽게 인지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나는 그녀의 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내가 틀렸다고, 그깟 자리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내 자존심은 내 혀를 마비시켰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가 먼저 내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내 몸을 더듬었다. 그녀는 나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이 지독한 싸움 끝에, 어떻게.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욕망이 없었다. 그곳에는 오직 절망과, 이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충동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섹스를 통해 이 균열을 봉합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균열을 확인하고, 그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 그 밤의 섹스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곳에는 교감도, 애무도, 부드러움도 없었다. 우리는 마치 서로를 벌하려는 듯,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서로의 몸을 탐했다. 그녀는 내 등을 손톱으로 할퀴었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아플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보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인 이 육체를 학대하며 쾌락을 짜어냈다. 그것은 쾌락이라기보다는 고통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절정의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저 짐승처럼 울부짖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우리는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내 몸에는 그녀가 남긴 손톱자국이 붉게 부어올랐고, 그녀의 어깨에는 내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새긴 것이다. 나는 그녀의 옆에 누워, 텅 빈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공허감. 내 영혼이 내 몸을 빠져나가, 저 형광등 위에서 나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듯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우리 사이에서 영원히 죽어버렸다는 것을.
음악이 끝났다. 23분의 대곡은 마침내 종언을 고했다.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웅크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춥고, 배고프고, 지독하게 외로웠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로, 그날 밤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던 우리의 모습이, 그리고 서로의 몸을 파괴하듯 탐하던 우리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균열의 전주곡은 끝났다. 이제 곧,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잔해 속에서, 평생을 길 잃은 유령처럼 헤매게 될 터였다.
https://youtu.be/MXcIW62a1h4?si=6gGkCXGzYgJGda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