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분노

by 남킹

https://youtu.be/WMnW9n7f7Hw?si=rNhIa5NXBWFld8Ws


스피커는 침묵했다. 반데르그라프 제너레이터가 남긴 광기의 잔해마저도 시간의 먼지 속으로 모두 스며들어 버렸다. 이제 내 아파트를 채우는 것은 소리의 부재(不在), 그 자체였다. 이 고요는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난 뒤의 폐허에 내려앉는, 모든 생명이 소멸한 뒤의 적막이었다. 나는 소파에 웅크린 내 몸이, 이 방의 가구들이, 이 아파트라는 상자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졌다. 나는 살아있는 유령이었다. 과거라는 이름의 지박령.

나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나무 바닥의 감촉이 신경을 타고 뇌수까지 저릿하게 울렸다. 허기가 위장을 날카롭게 긁어댔지만, 식욕은 없었다. 대신 지독한 갈증이 느껴졌다. 영혼의 갈증. 나는 비틀거리며 작은 책장이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손가락이 익숙하게 책등을 더듬었다. 독일어로 된 기술 서적들, 몇 권의 소설책. 그리고 그 사이에, 25년의 세월 동안 수십 번의 이사와 이직을 거치면서도 결코 버리지 못했던, 낡고 해진 책 한 권이 꽂혀 있었다. 윌리엄 포크너, 『소리와 분노』.

나는 그 책을 꺼내 들었다. 손끝에 만져지는 낡은 종이의 질감, 희미하게 풍겨오는 묵은 책 냄새. 이 책은 내 삶의 가장 참혹했던 한 시절을 기록한 예언서이자, 모든 것이 파괴되던 그날의 현장 증거물이었다. 책을 펼치지 않아도, 그 안의 모든 문장들이 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떠다니며 소리치고 분노하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컴슨 가문의 비극.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각자의 독백만을 외치다 결국은 모두가 파멸해버린 사람들. 그들은 더 이상 책 속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 지옥 같았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그러나 그 아침에는 어떤 희망의 빛도 없었다. 밤새 켜져 있던 형광등 불빛은 아침 햇살 아래서 창백하고 병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남은 나의 흔적을, 우리가 나눈 그 폭력적인 정사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씻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텅 빈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의미한 무늬를 바라보았다. 내 몸에는 그녀가 남긴 손톱자국이 화끈거렸고, 온몸의 근육은 마치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셔왔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은, 내 영혼을 잠식한 공허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선을 넘었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우리 손으로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싼 채였다. 갓 샤워를 마친 그녀의 몸에서는 비누 향기가 났지만, 그 향기는 더 이상 내게 안도감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 생긴 거리를 상징하는, 낯설고 인공적인 냄새일 뿐이었다. 그녀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리고 기계적이었다. 마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내 오피스텔은 더 이상 우리의 성역이 아니었다. 그곳은 차가운 전쟁터, 혹은 소리 없는 장례식장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한 공간에 있었지만, 각자 보이지 않는 유리벽 안에 갇힌 채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화는 사라졌다. 식사는 각자 해결했고, 잠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잤다. 육체적인 접촉은 완벽하게 소멸했다. 나는 밤마다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등 뒤의 공간을 느끼며, 우주 한가운데 버려진 듯한 지독한 고독감에 시달렸다. 그녀의 몸은 바로 저기,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그 거리는 수억 광년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몇 번인가 대화를 시도했다.

“서연아, 우리… 다시 얘기 좀 해.”

그러나 그녀는 굳게 닫힌 성문처럼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은 늘 짧고 차가웠다.

“무슨 얘기를. 할 얘기 없어.”

나는 이사직 제안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왜? 왜 거절했는데?” 그녀는 나를 비웃듯 바라보며 말했다. “나 때문에? 나를 달래주려고? 됐어. 그런 동정 따위 필요 없어.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 나도 내 길을 갈 테니까.”

그녀는 나의 후퇴를 화해의 제스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나의 비겁함, 혹은 또 다른 형태의 기만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신뢰는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녀는 그것을 의심의 필터로 해석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서로에게 가장 완벽한 타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회색빛의 날들이 시체처럼 쌓여가던 어느 날,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그날도 나는 텅 빈 관계의 무게에 짓눌린 채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었을까, 디자인팀의 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말했다.

“팀장님… 서연 팀장님이… 오늘 사표 내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의 모든 회로가 정지했다. 귀가 멍멍해지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서연의 자리로 향했다. 그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항상 어지럽게 쌓여 있던 책들과 기묘한 오브제들, 그녀의 흔적이 담겨 있던 모든 것들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미친 사람처럼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나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문자를 보냈다. ‘어디야?’, ‘얘기 좀 해.’, ‘제발.’. 그러나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았다. 나는 조퇴를 하고, 미친 듯이 차를 몰아 내 오피스텔로 향했다. 제발, 제발 그녀가 그곳에 있기를.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직감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그녀는 거실 한가운데 여행 가방을 펼쳐놓고, 자신의 짐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책들, 그녀의 옷들, 그녀가 쓰던 찻잔,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눈 거위’의 모든 데이터가 담긴 외장 하드까지.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이 공간에서 완벽하게 지워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침착하고 단호해서, 나는 차마 그녀에게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문 앞에 망부석처럼 서서, 그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 짐을 챙겨 넣고 가방의 지퍼를 닫는 소리가, 내 심장이 파열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안에는 분노도, 슬픔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완전한 무(無)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포크너의 소설처럼,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언어로 외치는 두 개의 독백이었다. 서로에게 결코 가닿지 못할, 소리와 분노의 교차점.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상의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이렇게… 떠나야만 했냐고.”

[나의 소리(The Sound)]

나는 논리의 언어로 말했다. 이성과 합리성, 그것이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이건 비합리적이야. 감정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 커리어는 어떡할 건데? 당장 내일부터 뭘 먹고 살 건데? 이건 현실이야, 서연아. 우리가 만든 그 환상 속 세계가 아니라고. 네 재능, 알아. 하지만 그 재능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뿐이야. 내가 이사직을 맡아서 너를 보호해주겠다고 했잖아. 왜 그게 너한테는 모욕으로 들리는 거야? 나는 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했던 거라고! 우리가 함께 쌓아온 시간들이 있잖아. 어떻게 그걸 이렇게 한순간에 버릴 수가 있어? 이건… 이건 무책임한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내 말 속에는 그녀에 대한 걱정과 애정과, 동시에 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나의 무력한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비합리적’이라고 규정하고, 나의 세계, 즉 ‘현실’의 문법 안으로 그녀를 다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다시 예전처럼, 나의 논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나의 세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언어를 해독할 수 없었다. 아니, 해독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나를, 마치 처음 보는 외계인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분노의 언어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분노(The Fury)]

그녀는 이미지의 언어로 말했다. 그녀의 말들은 논리적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내면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날것의 감정과 상징들로 가득 차 있었다. “타협? 당신이 말하는 타협이 뭔지 알아? 그건 내 영혼의 색깔을 회색으로 덧칠하라는 말이야. 당신이 말하는 현실은, 모든 것을 네모난 상자 안에 가두고 규격화시키는 거대한 공장일 뿐이야. 나는 그 공장의 부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야. 당신은… 당신은 이미 그 공장의 관리인이 되기로 결정했잖아. 내 손을 잡고 그 공장으로 끌고 들어가, 내 손목에 바코드를 새기려는 사람이잖아! 보호? 웃기지 마. 당신의 그 ‘보호’는 새장이야. 황금으로 만든 새장. 당신은 내가 그 안에서 노래하기를 바라겠지. 안전하고, 아름답게. 하지만 나는 노래하지 않을 거야. 나는 내 부리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 황금 창살을 쪼아댈 거야. 피를 흘리더라도, 굶어 죽더라도, 나는 날아야겠어. 당신은 이미 나는 법을 잊어버렸잖아! 당신의 코드는 더 이상 시(詩)가 아니야. 그것들은 이제 가격표일 뿐이야.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기고, 효율을 계산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당신은 우리의 사랑마저도 손익계산서 위에 올려놓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방 안을 서성이며,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녀의 몸짓은 마치 현대무용수의 즉흥적인 춤사위처럼 보였다. 그녀의 몸이, 그녀의 존재 전체가 분노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들은 내 논리의 방패를 가볍게 뚫고 들어와,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녀는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나의 본질을, 나의 위선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절규했다. 그러나 우리의 목소리는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완전히 다른 우주에서, 다른 언어로, 다른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완벽한 실패였다.

논쟁의 절정에서, 나는 이성을 잃고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제발, 서연아. 이러지 마. 제발….” 나는 애원했다. 내 손아귀에 잡힌 그녀의 팔은 너무나도 가늘었다. 부서질 것처럼 연약했다.

그 순간, 그녀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나를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닌,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내 손에 꽂혀 있었다.

“……만지지 마.”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보다 차가웠다.

“당신 손에서는… 청구서 냄새가 나.”

청구서. Invoice. 그 한마디.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끝냈다. 그것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잔인하고 치명적인 언어의 칼날이었다. 한때 그녀의 세계를 현실로 구현해주었던, 그녀가 입 맞추었던 나의 손. 그 손이 이제 그녀에게는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자본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무너져 내렸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도, 설득할 수도, 심지어 바라볼 수도 없었다. 나는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여행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나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내 아파트의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을 뿐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 그녀가 문밖으로 나가는 소리.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철컥.’

그 소리. 그 마지막 소리가, 내 우주가 끝나는 소리였다.

그녀가 떠난 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방 안은 그녀가 떠나기 전과 똑같았다. 가구도, 벽지도, 창밖의 풍경도. 그러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공간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녀가 사라진 이 공간은, 공기마저도 질식할 듯한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의 작업 공간이었던 책상으로 다가갔다. 내 모니터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던 그녀의 모니터는 꺼져 있었다. 나는 내 모니터를 보았다. 화면에는 ‘눈 거위’의 마지막 작업 화면이 그대로 떠 있었다.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그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계.

나는 마우스를 잡았다. 그리고 그 세계의 입구를 클릭했다. 반딧불이가 나타나고, 거꾸로 자라는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거대한 폐허, 사랑의 무덤일 뿐이었다. 모든 이미지들이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세계를 끝까지 탐험할 용기가 없었다. 나는 그 안에 담긴 우리의 목소리를, 우리의 웃음소리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눈 거위’의 루트 폴더 위에서, 내 손가락은 망설였다.

‘삭제(Delete)’.

나는 그 단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것을 지우면, 그녀와 나를 연결하던 마지막 끈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고통의 증거를 내 눈앞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클릭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 이후, ‘눈 거위’는 내게 있어 접근할 수 없는 봉인된 성지가 되었다.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아이처럼, 짐승처럼, 세상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내 울음소리는 텅 빈 방 안을 채우고, 벽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나 자신의 소리와 분노일 뿐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코블렌츠의 어두운 아파트. 내 뺨 위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25년 전 그날처럼. 책장에서 꺼내 들었던 포크너의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펼쳤다. 어둠 속에서 글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페이지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와도 같아,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렇다. 우리의 사랑, 우리의 예술, 우리의 싸움.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한 편의 부조리극이었을 뿐일까. 나는 텅 빈 눈으로 어둠을 응시했다. 대답은 없었다. 오직 지독한 침묵만이, 내 질문을 비웃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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