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어떤 생각
라이킷 170 댓글 3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리틀 포레스트

by 남모 Feb 22. 2025
아래로



새해가 밝고 한 달이 지나갈 무렵 평범한 식당에서 어떤 당신이 내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새해 들어서 마땅히 이래야지 싶은 각오 같은 거 없어요? 내가 말했다. 음, 없어요. 그럼 아무런 계획 같은 것도 세우지 않았나요? 나는 다시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음, 그런 것도 없어요. 당신이 의외라는 듯 다시 말했다. 무척이나 시시하네요. 미안해요, 시시하고 심심해서. 굳이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해보고 싶어요. 나는 대답을 하면서 스스로가 다소 무책임하거나 쓸쓸하다고 느꼈을 뿐 내가 새해를 맞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영화에서처럼 세상이 문득 아름답다거나 새롭다는 생각은 더욱 들지 않았다. 단지 내가 살던 생의 씨줄이 하루 더 길어졌을 뿐이라는 생각을 혼자서 했을 뿐이다. 다분히 건방지고 시니컬한 허기였다. 아무튼 그랬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먹고 있던 해물찜이 너무 매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세워놓은 계획이나 희원 같은 달콤한 일들은 내 안에 없었으니 결국 어떻게 말하든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어쩌면 나의 세계는 세상과 다른 알피엠의 회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낭패감 때문에 잠시 두통이 생기려던 찰나 당신이 사이다 같은 말을 했다. 찜이 너무 맵지 않아요? 매운 건 사실이었고, 매워도 너무 매웠다. 알탕을 하나 더 주문했지만 전에 다니던 허름한 주점의 깊은 맛을 흉내 내려면 아마 몇 년은 더 끓여야 할 것 같았다. 다만 흐린 하늘에 기념할 것도 없는 눈이 오고 있었고 벽에 붙은 해물찜 메뉴 옆에 빨간색으로 쓰여 있는 (매운맛)이라는 글자를 보며 더 이상 정색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던 건, 세상보다는 싱겁다, 인생보다는 맵지 않다, 하면서 물이나 소주를 마시는 일뿐이었다. 귀갓길, 내가 늘 다니던 길로 정확하게 우회전 죄회전을 반복하는 택시기사가 밉지 않았다. 택시 안에서 속으로 늦은 도치법 같은 대답을 했다. 단지 새해라서 기념비적 변신을 시도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내일도 하루 전의 나처럼 세상을 보고 세계를 형성하고 관계를 이룰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물론 삶이란 게 낭만적인 가정법만으로는 완성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역시 인생은 맵고 써서 눈물콧물쯤은 흘려봐야 한다고 믿는다. 가끔은 상냥한 마음으로 삼겹살도 먹어줘야 하는 것처럼. 어찌하다 보니 지방에서 혼자 생활한 지 5년이 다 되어간다. 천상 게으름뱅이 입장에서 그나마 재빨리 익숙해진 것이 배달음식인데 그 편의성과 신속함에 한번 맛을 들이니 가벼운 중독현상이 있는 것처럼 쉽사리 멈추기가 어려웠다. 반듯한 용기에 담겨 오는 딱 돈값만큼의 '뭐, 이 정도면'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적당히 따듯하고 적당히 비슷한 맛들. 대부분의 날들을 말없이 TV를 켜고 말없이 밥을 먹는다. 어떤 때는 혹시 내가 혼자만의 골방에서 묵언수행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수행이라면 얼마간은 더 정진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 하며 다시 말없이 리모컨으로 넷플릭스를 뒤적거린다. 이럴 때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은 역시 영화였고, 분명한 건 배달음식의 맛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일찌감치 전답을 팔아 서울로 상경한 아버지 덕에 지금까지 한 번도 손에 흙을 묻히며 작물을 심거나 수확을 위해 땀을 흘려본 적이 없지만 어떤 영화를 보면서는 으슥한 계곡처럼 나름대로 험난했던 지난날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우리의 삶은 간혹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그리고 그 간혹을 뺀 나머지의 시간들은 '왜 아무 일도 없지' 싶은 불안한 잔물결이 일기도 한다. 눈물콧물 후에도 이따금씩 훌쩍거리게 되는 가벼운 여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잘 쉬는 법을 모르는 마음은 가끔 일본영화를 보며 심심하고 나른한 위안을 받기도 하는데 여름과 가을, 겨울과 봄, 모리 준이치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도 그런 편이다. 매 끼니 손쉽게 대충 털어 넣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찾아다니기도 바빴던 내게, 또 배달음식의 단짠에 길들여진 내 서툰 입맛과 몸매에 대해 미안한 생각이 들게 한다. 그저 정갈하고 소박한 식탁. 얼마 전에 한국 리메이크도 있었지만 묘하게도 일본 원작이 더 마음을 다독인다. 줄거리는 별 것이 없다. 대사도 그리 많지 않다. 도시의 삶에 지친 여자애 이치코가 고향집에 돌아와 산골생활을 하며 음식을 해 먹는 것이 전부다. 계절의 풍경과 엄마에 대한 추억과 땅의 이야기들이 하품이 날 정도로 느리고 담백하게 펼쳐지고 차츰 속이 든든해진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야겠다. 오늘 저녁엔 엉망이 되더라도 밥을 안치고 무언가를 씻고 썰고 끓이기도 해 봐야겠다. 숨 가쁘게 살아온 것에 비해 턱없이 소홀했던 나에게 정직한 한 끼쯤 대접해 보려고. 어쩌면 마트의 직원과 몇 마디쯤 할 수도 있으니까. 



남의 단점이 보인다는 건 자기한테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이야.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은 올라갔거나 내려갔을 거야. 그런 거면 조금 낫겠지. 아니, 그것보다도 인간은 '나선' 그 자체 인지도 몰라.

뭔가에 실패해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수필가님께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