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종 소리에 낮잠에서 깨어났다. 리모컨은 손에 사수한 채로 잠시 잠든 사이, 그냥 켜놓았던 TV에서는 모르는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굳이 본다 해도 기억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나누며 진지하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초인종이 자꾸 울린다. 누구지? 누군데 저렇게 절절하게 남의 집을 두드릴까. 나는 이제껏 몇 번이나 저렇게 다른 이에게 간절한 노크를 했었을까. 생각은 순간 TV 속 주인공과 같은 공간으로 숨었고 나는 천천히 인터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누구세요? 인터폰 너머로 들려온 용무는 기한 만료로 재발급된 카드를 가지고 온 사람이다. 모르는 여자다. 문밖에 서서 한참을 서성거렸을 것이 미안한 마음에 서둘어 문을 열고 몇 마디 머쓱한 말들을 나누다 보니 낯이 익은 이 여자, 아는 여자다. 스물 후반 즈음의 내가 만났던,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학동호회 선배의 반강제 소개팅으로 두어 번 만났던 그의 사촌 누이. 문학을 좋아했던 그녀. 그리고 노스탤지어란 단어 때문에 나를 매정하게 차버렸던 여자다.
당시의 나는 노스탤지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브래지어라는 단어가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사건은 간단했다. 앤딩크레디트가 기다려지는 심심한 영화를 보고 더 심심한 식사를 하고 찻잔을 마주한 저녁, 노스탤지어에 대한 심상을 풀어놓는 그녀의 말끝에 나는 히죽 웃으며 그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브래지어가 연상된다는 모지리적 농담을 했고, 정갈하고 고상했던 그녀는 경멸의 눈빛으로 무장하며 말했다. 알고 보니 이상한 사람이었군요. 그리고 간단히 끝이었다. 아쉽지는 않았지만 오래도록 무안했다.
이 세상에 이상한 사람투성이라지만 당시의 나는 아마도 그녀에게 실망막급의 변태적 바퀴벌레, 예의 없는 재수대마왕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랬다는 것이다. 애써 아는 표정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신분증을 확인하던 그녀도 늦게나마 눈치를 챘는지 들어올 때보다 더 황급하게 돌아 나간 오후, 내 낮잠의 결말은 석연치 않았다. 드라마 주인공들은 이제 소리를 지르며 비 오는 골목을 분주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창밖에는 바람이 조금 더 세차게 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