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중경삼림에 붙여
혼자 살면서 우울할 때는 냉장고를 열어보지 말라고 했다. 나는 분명히 혼자 살던 때가 있었고 냉장고가 없었던 것은 비교적 행운이었다. 낮에는 막노동을 하고 야간에 공사현장 경비 일까지 하면 돈을 두배로 준다는 말에 선뜻 지원을 했고 한겨울 내내 공사장을 떠나지 않았다. 스물몇 살의 겨울은 그렇게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등록금을 벌어야 했고, 나는 폐허처럼 피폐해진 상태여서 사람들과 말을 할 마음도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한 번은 꼬박 사흘 동안 입을 다물고 지낸 적도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침묵하기란 매우 고단한 일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숙소에서 나를 뺀 나머지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싱크대 앞에서는 어이 수도꼭지, 울지 마. 전기장판이 젖잖아. 밥통 너는 네 배 부르다고 나 배고픈 건 신경도 안 쓰지. 하지만 몇 번 말을 하고 나면 곧 우울해졌다. 역시 다행인 것은 냉장고가 없다는 점이었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장면 하나마다 마치 스틸컷처럼 선명한 데자뷔를 보듯 놀라야 했다. 거기 똑같이 말하는 지난날의 내가 있었으니까. 663이 어느 날 그의 방에 있는 사물들이 많이 변해있음을 깨닫고 비누와 수건에게 말을 하는 모습은 매우 달콤 쌉싸름했다. 동질성의 발견에 대한 탄복이랄까, 그 후 영화를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다. 여섯 번인지 일곱 번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중경삼림의 리마스터링 소식은 그래서 눈이 반짝였고 어느 벚꽃 흩날리던 날 다시 한번 추억을 잔뜩 담아 만날 수 있었다. 화양연화를 놓친 것은 아쉬웠지만 다시 보는 양조위 등의 그늘진 눈빛과 사랑, 또 불안과 방황들이 얼마나 다정한 신화처럼 다가왔는지. 몇 번이고 흐르는 압도적 OST도 그렇거니와, 사람이 아닌 것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말을 거는 행위는 어쩌면 희망에의 손 내밀기였으리라.
혼자서 술을 마시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보면 은연중 내 감정들이 과장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어쩌면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집에 들어오면 글라스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두어 번에 나누어 마셨다. 때로는 맥주나 와인을 마시기도 했지만 단연 소주가 최고였다. 간혹 세상이 간지럽거나 우울감이 파도처럼 넘실거릴 때도 혼자 술을 마셨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혼자라는 건 유익하고 안전한 설정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내가 비틀린 하루를 살아가는데 도움을 받는 묘수들은 대부분 어쩌다 알게 된 것들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요즘의 나는 그때 가졌던 슬픔이나 애환 같은 것들, 혼자 실없이 말을 하거나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한다거나 습관처럼 외롭다거나 하는 일들에 대해 몰라보게 관대해지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럴만한 일들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건 지난날의 내가 생을 가로지르며 어쩌다 알게 된 것들이 지금의 내게 베푸는 호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폭풍우와 싸우며 바다를 건넌 사람의 무용담보다 내가 직접 바지를 걷고 개여울을 건너 본 일이 더 중요한 것,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을 제 때에 만나야 한다는 것, 어떤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결국 별개의 문제라는 것.
https://youtu.be/n6acks-wQ1w?si=6GQkExsx_9ucXS7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