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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모 Oct 05. 2024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



사랑해. 국어사전에도 없는 이 단순한 말이 가지는 현상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생의 전반을 관통하며 서로에게 소중한 구원의 의미로 남거나 평생을 두고두고 꺼내 보고픈 이름이거나 또 어쩌면 그저 가볍게 기억보다 먼저 소멸될 수도 있는 말. 희망과 배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독한 진실 혹은 감정의 카모플라주. 영속성을 가진 것들 중에 가장 영원에 근접해 있으면서도 가장 짧은 시효성을 지니고 있는 마음의 유기적인 발화. 입술로 전하지만 가슴이 시키는 대로 발현되어 눈빛으로 완성되는 말.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세상을 가진 듯 기쁘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보다 더한 슬픔의 강에 목이 잠기기도 하니 과연 사랑한다는 고백은 어디까지 유의한가. 물론 '사랑해'에 대한 신뢰와 순정이 모든 '사랑해'에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엄마가 아이에게, 오랜 세월의 친구에게, 또는 어떤 신념을 향해 우리가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사이에 두고 하필이면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남자가, 젠더와 젠더가 손을 맞잡고 서있을 때 온갖 모양의 행복과 상처로 피고 지는 것이다.


누구누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 누구누군 결국 헤어졌다는군, 모든 사랑에는 결말의 형식이 있다. 그러니까 누구와 누군 어쩔 수 없이 헤어지긴 했지만 오래오래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았대, 식의 응용이나 레토릭은 잠시 접어 두자. 사랑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보면 연애는 빛나고 찬란하지만 모든 연애가 그럴 수 없다는데 동의하게 된다. 사람의 기질이나 관점에 따라 감정적 유희에 머무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주가 섞인 채 종결되기도 하며 더러는 훗날까지 두고두고 되새겨질 통증의 흔적으로 남기도 하니 말이다. 


때때로 사랑은 역마살을 품기도 하여, 영화 중경삼림에서 배우들이 읊조리는 것처럼 오늘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할 수도 있어서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대문을 나서기도 하고, 사랑의 기한을 만년으로 하고 싶다던 무한한 마음은 인간의 시간으로 단축되기도 하는 것이다. 쓸쓸한 일이지만 순식간의 사랑, 그때 그 시간의 사랑에도 어떤 형식이든 각별한 감정은 들어있다. 다만 변심과 이별은 다시 사람의 일이다. 이 허탄한 현상, 달콤한 언어를 매개로 하는 쓸쓸한 감정의 헛방, 마침내 온갖 맹세와 약속이 깨져나가는 그 사랑의 끝에 깔끔하게 안녕이란 없는 것이다. 


사랑해,라고 말로 자꾸 설레게 하는 것보다는 도리어 묵직한 항아리에 담아두는 것을 권하고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 듬직한 침묵이 사랑의 완성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간혹 애정 함량에 대해 교환이나 보상심리가 섞이기도 하고 이 때문에 은연중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일 또한 살갑고도 순정한 애교가 분명하다.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에는 젊은이들이 삶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사랑과 혁명 이 두 가지뿐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아마도 사랑과 혁명을 향한 에너지가 능히 죽음과도 교환될 만한 등가적 가치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애초의 사랑이라는 것은 이유 없는 끌림에서 시작하여 전폭적인 밀착에 이르게 되는 틈 없는 소통이며 일종의 초월성마저 지니고 있는 교감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제 이 말 위에 얹어지는 삶의 질량을 생각해 보시길. 참으려 해도 온몸에 꿈틀거리는 애틋한 심정의 발아, 마침내 참았던 신음이 절로 새어 나오는 것처럼 사랑의 고백을 한다는 것, 상대를 향한 모든 간절함을 상정한 것이며 스스로의 마음에 각별함의 화인을 찍는 일이다. 그러니까 온전히 '사랑해'라고 말하고 온전한 '사랑해'라는 말을 듣는 일, 간결하게 한 사람의 전부를 타전하는 모스 부호가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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