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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모 Oct 07. 2024

편지, 귀뚜라미 소리 동봉



가을밤,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있다가 그 소리 끝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우울해진 적이 많아요. 찌르르하고 찌르르르한, 그러니까 내가 듣기에는 영락없이 똑같은 음색의 발성이 어쩌면 귀뚜라미에게는 목이 터져라 외쳐대는 어떤 사연일 수도 있을 테고 또 어쩌면 그리운 누군가에게 자신을 고백하는 애절한 연정일 수도 있겠다 싶어 막연한 쓸쓸함을 느끼게 해요.


그런데 막상 코드가 다른 사람들끼리의 소통이 귀뚜라미의 그것과 비슷할 거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차라리 내 만화적인 상상력 몇 페이지를 발기발기 찢고 싶어져요. 몹시 괴로운 듯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 온갖 불편한 것들도 뜯겨 나갈 것이라고 믿은 적도 있으니 허무한 상상력 몇 장쯤 찢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지나친 비약이거나 억측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아 줘요. 생각해 봐요. 만약 내가 지난 며칠 동안 끊임없이 울어대던 이유에 대해 당신이 전혀 듣지 못했거나, 들었더라도 소음의 한 가지로만 여겼다면 방금 전의 내 어설픈 귀납적 상상력은 다소 일리 있는 썰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가을밤을 이루는 그럴싸한 것들의 일부라고만 생각했다면, 정말 정말 그랬다면, 나도 당신으로부터 생겨난 귀뚜라미라고 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쓸쓸한 건 그것만이 아니라 귀납이 내포한 논리적인 오류마저도 불식시킨 후 마침내는 명백한 슬픔의 한 종種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그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지요. 맹랑하게 들리겠지만 새로운 학설이니까 참고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관계가 서정적일 수 없다는 사실은 아직도 간혹 나를 곤란하게 해요. 전에는 이 이유 하나만으로 오랫동안 쓸쓸병을 앓고 산 적이 분명히 있었어요. 소통의 부호가 굳이 형식을 가져야 한다면 그건 반드시 서정적인 내재율을 가져야 한다는, 근거는 없지만 다분히 모범적이고도 순진한 희망 때문이었지요.


요즘은 상실감도 필요악이라는 심증을 굳히며 살아요. 적당한 상실과 상념이 가진 에너지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온당한 쓸쓸함은 유토피아와 같은 걸 거예요. 세상에 없는, 아무 곳에도 없는. 우스운 건, 그걸 아는 지금도 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는 아주 심심한 사실이지요. 허무한 서정을 포기한 대신 신뢰라는 공물로 여전히 신탁을 구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가끔은 이런 상념들이 어떤 질량이나 부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마치 산들바람에 날리는 엉겅퀴의 솜털처럼 아득한. 하긴 어떠면 어때요. 내가 밥을 먹는 일에 열중할 때 당신이 나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고, 당신이 베이커리나 이비인후과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 순간 당신이 궁금한 내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관계 또한 형식에 갇혀 무작정 심란하고 볼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나를 믿지 못하는군요. 당신이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해요. 믿어요. 내가 믿는다고 한 말 혹은 마음을 당신은 믿어줄까요? 하지만 신뢰와 더불어 중요한 것 몇 가지가 더 있어요. 우리가 온전히 상관했는가 하는 것, 모든 관계의 본질은 용기라는 것. 아스피린을 좀 사야겠어요. 방금 창밖에서 굉장한 경적소리가 울렸거든요. 당신은 어때요? 귀뚜라미와 소리와 소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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