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느닷없이 맞이한 낯선 여자의 이름, 처음 보는 글씨체. 그리고 나란히 적혀있는 그리운 이름. 모퉁이를 돌다가 뜬금없이 낯선 이와 머리가 부딪쳐 뒤로 발라당 넘어가는 황당함처럼 마냥 권태롭기만 한 오후의 어느 후미진 모퉁이에서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과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인연의 어려운 언덕들을 허들 선수처럼 몇 가지나 건너뛰며 낯선 여자에게서 날아와 버린, 읽기가 선뜻 내키지 않던 편지 한 통. 누구지? 누군데 모르는 나에게 이메일도 아니고 돈 주고 우표까지 붙여 그렇지 않아도 바쁜 우체국 아저씨의 다리품을 팔게 하였을까. 얌체 숨을 몇 번 쉬며 겉봉을 뜯는 나의 마음은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무의식의 인연을 가늠했는지도 모릅니다.
정갈하게 손으로 써 내려간 편지. 처음 몇 줄을 읽으면서부터 나는 어떤 두려움을 예감했습니다. 중간 정도를 읽어 내려갔을 때 두 손은 이미 떨리고 있었고, 마지막 '안녕히 계십시오'를 눈에 넣고 난 후에는 이미 상실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네, 그래요. 분명히 우리 선생님이었습니다. 나는 아무에게나 우리라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있어 진정한 우리의 정의는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고, 속으로도 도리질 칠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내가 가진 나의 것입니다.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던 우리 선생님이셨으며, 세상의 몇 안 되는 나의 친구이자 참 스승이셨지요. 얼마나 긴 세월을 잊고 지냈는지 모릅니다. 우리 선생님, 마침내 돌아가셨다고 따님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처음 선생님을 만난 것은 중학교 삼 학년 때의 일입니다. 국어 선생님. 담임을 맡기에는 너무 노인네라는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을 만큼 선생님의 머리카락은 흰 눈에 덮여있었어요. 다만 나는 보았습니다. 작은 눈에서 반짝이며 퍼져 나오는 따스한 기운을.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한 사건이 발생했어요.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한 친구 하나가 종례시간에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만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집안 형편이 너무나 어려워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그 친구의 자존감이 상처받았던 겁니다. 모두들 놀랐지만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걸지 못할 때, 선생님은 그 아이를 상담실이 아닌 교정 후미진 곳으로 불러 등록금을 손에 쥐어 주시면서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조금 불편한 거라고 힘내자며 안아주셨답니다.
후일 술자리에서 그 아이는, 후정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위로하시던 선생님의 그것처럼 넓은 가슴을 아직도 만나지 못했노라고 고백했어요. 졸업을 하던 날, 선생님은 우리들 모두를 한 사람씩 안아 주시며 저마다에게 몇 마디씩 당부의 말씀을 해 주셨는데 그 말씀을 잊은 친구는 몇 없을 겁니다. 그리고 꼭 찾아뵙겠다는 우리의 당돌한 거짓말에도 웃으며 배웅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을 잊어가는 속도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빨랐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다시 삼 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문득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해졌어요. 몇 날을 벼름 벼름 하다가 결국 편지라는 귀여운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혼자서 선생님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용기도 없었고 차라리 얼굴 안 보이는 편지가 더 좋겠다는 마음에 첫 번째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흔한 공책 한 장을 칼로 잘라낸 편지지에.
그리고는 잊어버렸습니다. 교정에 가을이 슬그머니 찾아오고 운동장 스탠드에 낙엽이 막 떨어지기 전에 하얀 봉투 하나가 집으로 배달되었습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한 후에 얼마나 고맙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쓸어내리며 겉봉을 자르고 편지지를 꺼내는 나의 손은 아마도 길어 올리지 못하던 스승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세 장. 선생님의 편지는 처음부터 세 장이었어요. 줄도 없는 희디흰 백지 위에 굵고 까만 만년필로 자상한 격려와 배려를 실어 굽이굽이 흐르게 하셨어요. 처음 선생님의 글씨를 보았을 때, 참 엉터리 같은 글씨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편지를 읽는 내내, 넘쳐나는 온기로 가득한 글씨 하나하나가 남은 여백까지 일으켜 세워 나를 안아 주었습니다.
다시 편지를 드렸습니다. 처음과 똑같이 흔한 공책 두 장을 잘라 또박또박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정년퇴직을 하셨다는 안부며, 요즘은 산행에 취미를 가지셨다는 소식이며, 손자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너털웃음 등등.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편지는 계속되었습니다. 나 또한 고교시설 내내 어려워진 아버지 사업 이야기며 지금의 아픔과 걱정, 장래에 대한 희미한 불안이나 보이지도 않는 모퉁이 저 너머의 일들까지. 한 번도 불편해하시거나 외면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한 개의 사과 속에 숨어 있는 사과 씨앗의 수를 셀 수 있을 만큼 의젓해졌다고 말하면, 선생님은 등을 툭툭 쳐주시며 씨앗 하나에서 열리는 사과의 숫자는 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어요. 그만큼 넓고 넉넉한 가슴으로 늘 바라보셨습니다. 대학에 가면서는 또다시 선생님을 잊었습니다. 외면했던 몇 년 사이에 나를 물어오시는 선생님의 편지가 있었지만, 번들거리는 일상은 선생님을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선생님을 뒷방 늙은이로 지내게 하다가 다시 넘어져 일어나기 어려운 날이 오고서야 나는 절망 속에서 선생님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내가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방법은 편지였습니다. 선생님의 흉내를 내며 쓴 만년필의 굵은 글씨는 후회와 속죄의 눈물에 번지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몸이 불편하셔서 매일 가던 약수터도 거르는 날이 많다고 합니다. 그 편지를 받던 날은 종일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어쩌면 선생님은 내게 있어서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손수건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늘 주머니 속에 반듯하게 접혀 나와 함께 걸어 다니고 있지만, 필요하지 않을 때는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아파서 눈물이 흘러내리거나 상처가 생겨 피가 흐를 때, 깔끔 떨며 다니다 더러운 것들이 묻었을 그때, 나는 분명히 그 손수건을 꺼내 닦아 내며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눈물을 단 한 번도 닦아 드리지 못했지만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노쇠하신 선생님 댁을 찾았습니다. 그날 손을 꼭 잡아주시며 괜찮다 걱정 말라던 온기와 선생님 눈빛을 잊지 못합니다. 그 후 무엇이 바쁜 지 몇 년이 지난 후 편지를 다시 드렸고, 이제 낯선 여자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선생님 이름으로 왔지만 보낸 사람은 선생님이 아닌 편지. 선생님의 따님이 대신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늘 따님에게 말씀하셨답니다. 언젠가, 언젠가 한 번은 내게서 편지가 올 것이라고. 그리고 정말로 그 언젠가 내게서 편지가 오면 꼭 답장을 써 주라고 아프시는 동안 몇 번이나 말씀하셨답니다. 답장을 하면서 친구처럼 여겼다는 말, 꼭 써주라고 하셨답니다.
뒤늦게 선생님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워낙 눈물이 흔하여 드라마를 보면서도 자주 울지만, 그냥 절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어깨를 들먹였어요. 선생님은 왜 절을 받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선생님 무덤가에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두 번 절을 하였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하마 그 사랑은 몇이나 될지도 모를 무수한 열매를 맺고 있겠지요. 홀로 누워 계신 묘소 앞에 국화 몇 송이 두고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평안했습니다. 선생님 계신 언덕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추었고, 꼬불꼬불 내리막 황톳길에도 내 걸음을 따라 같은 해가 비추었습니다.
오래전 어느 날, 스승을 회억하며 소년의 마음으로 쓰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쓰지는 않았겠지만 선생님을 생각하는 그때 그 마음이 조금 기특하고 짠하기도 하다.